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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Genie Feb 02. 2024

새벽 2시, 산책

 눈을 떴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1시 40분, 신랑과 큰개의 날숨 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다. 어제저녁, 왕복 300km의 일정을 소화하고 저녁밥만 겨우 먹은 뒤 지쳐 쓰러졌다.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으로 생각했다. '이 메뚜기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몸이 힘들고 마음이 더 힘들었다. 지친 몸에 저녁밥을 꾸역꾸역 넣으니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한 속을 붙잡고 웅크린 채 잠에 들었다.


 이미 6시간은 넘게 잤으니 하룻밤 잠은 거의 다 잔 셈이었다. '이대로 누워서 휴대폰 화면이나 주구장창 쳐다볼까?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금방 흐를 텐데. 그러고 나면 꼭 후회할 텐데.' 싶었다. 텁텁한 입이나 게워내고자 화장실에 가는 길, 큰개가 텐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가시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 시간에 안 자고 뭐 해?'


 귀찮다는 저 눈빛, 깨우지 말고 자라는 무언의 압박, 얄미운 저 표정에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긴다.


"나가자."


 인간보다 몇 백배는 잘 듣는다큰개만 알아들을 수 있을만한 소리를 냈지만 여전히 안 자고 뭐 하냐는 눈빛으로 나를 흘긴다.


"나가자고."


 한 번 더 설득해 본다. 큰개가 귀를 움직인다. 알아는 들었고 나가고는 싶으나 지금은 졸리다는 표정이다.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한다. 거실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 큰개가 가장 좋아하는 포도모양 고무공을 주웠다. 큰개는 여전히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나는 포도모양 고무공을 늠름하게 들고 한 번 주물렀다.


쁙-


 삑삑이 소리가 울렸다. 큰개가 헐레벌떡 일어나 거실로 뛰쳐나온다. 나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산책용 모자와 패딩을 입는 동안 큰개는 꼬리를 백팔십도 뱅뱅 돌리며 헥헥 웃는다. 그렇게 큰개와 나는 새벽 2시의 산책을 시작한다.


 새벽 2시, 신호등은 꺼져있고 고요함만 거리를 떠돈다. 지구종말 후 큰개랑 나만 살아남은 것 같다. 왠지 개다리춤을 춰도 될 것만 같고.


 흐릿한 조명이 있는 으슥한 곳을 찾는다. 큰개가 아니라면 이 시간엔 평생 안 갔을 곳. 주로 도롯가 산기슭이나 뒷산 입구 같은 곳이 그렇다.  


 지름 6cm짜리 포도모양 공을 던진다. 큰개는 35kg짜리 거구로 폴짝폴짝 뛰면서 포도모양 공을 찾아 나선다. 킁킁킁킁 냄새를 맡고, 풀숲으로 뛰어들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공을 찾으면 물고 내 앞에 와서 툭 떨어뜨린다. 그러곤 나를 쓱 쳐다본다. 나는"아이고 잘했어, 우리 개 천재!"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는다. 큰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다가 또 공을 찾으러 폴짝폴짝 멀어진다.


 덩치는 산만해서 달걀만 한 포도모양 고무공에 환장하고 뛰어다니는 게 어이없이 귀엽다. 매번 처음 하는 것처럼, 그 쪼끄만 공을 찾아서 주인 앞에 갖다주고, 다시 찾으러 떠난다. 참 신기하다. 하루에도 몇 십 번씩 하는 공 놀이를 여전히 즐기는 게.


 천변을 따라 걷다가 고라니도 봤다. 우리 동네에선 고라니 보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거의 모든 사람이 고요히 잘 시간에 나오면 심심치 않게 고라니를 만난다. 우리 큰개는 고라니를 보면 쫓아가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도대체 쫓아가서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말티즈한테도 쪼는 게.


 1시간 가까이 공놀이를 하고도 큰개가 집엔 안 들어간다고 버틴다. 나도 새벽 3시의 고요가 맘에 들어 좀 더 밖에 있기로 한다. 물이 졸졸 흐른다. 물소리와 큰개의 숨소리 밖에 안 들리는 고요의 시간. 나는 천 변에 걸터앉아 어떤 생각들을 한다. 괜찮기도, 괜찮지 않기도 하다.


'주인, 뭐가 고민이야. 나랑 재밌게 놀면 되잖아.'


 큰개가 얼굴을 들이대고 애교를 부린다.


"알았어, 알았어. 놀게, 놀게."


 생각 저 어딘가에서 지금, 여기로 돌아온다. 새벽 공기가 선명하다. 물 위로 빛이 반짝인다. 큰개가 히죽 웃는다. 코를 찡긋하며 따라 웃어본다. 큰개와 나 둘 뿐인 새벽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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