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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Genie Mar 24. 2024

살갑습니다

 큰개를 뒷자리에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겨우내 기다리던 봄이 차 안에 가득 차 큰개가 헥헥거렸다. 창문을 내려주면 큰 귀를 날리며 세상 냄새를 흩맡는 큰 개지만, 고속도로에선 내 귀가 웅웅 울릴 것이었다. 더워하는 큰 개를 의식하며 얼른 목적지에 닿으려고 서둘렀다. 

 

 오창 즈음 지날 때 앞 차들이 비상 깜빡이를 키며 속도를 줄였다. 막힐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던 시간에 고속도로에서 멈추게 되다니 사고라도 난 건가 싶었다. 겨우 2차선의 도로에서 사고가 나면, 꽤 오랜 시간을 차안에서 꼼짝없이 갇힐 것이었다. 한숨을 푹 쉬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좋아.'


 나는 뒷자리 창문을 내렸다. 큰 개가 꼬리를 빠딱 들어 올리고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차 안으로 시원한 3월의 공기가 쏟아졌다. 큰개가 콧구멍을 바삐 움직이며 큰 숨을 마시다가 흡족하게 활짝 웃었다. 멈춰 선 차 룸미러로 큰개를 구경하던 나도 씩 따라 웃었다. 선명하고 기분 좋은 봄기운이 얼굴 가득 닿았다. 고속도로로 봄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한 시간 즈음 더 달려 충주 집에 도착했고 걷고 싶었을 큰개와 골목들을 걸었다. 큰개는 다른 개들이 남기고 간 오줌 냄새도 맡고, 풀냄새도 맡고, 새로 터진 봄꽃내음도 맡았다. 큰개가 바삐 냄새를 맡을 동안, 나는 하얀 구름과 검은 하늘의 선명한 경계를 구경했다. 밤하늘도 자세히 보면 낮의 하늘만큼 서사가 많다. 


 큰개랑 걷고 걷다 보니 가로등만 희미하게 비출 뿐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산책로에 발길이 닿았다. 얇은 외투하나 걸치고도 춥지 않은 날씨와, 쎅쎅 웃는 큰개와, 정돈된 내 마음. 그 모든 것이 좋아서 춤을 췄다. 인터넷에서 본 짧은 춤사위를 떠올리며 팔과 다리를 어푸어푸 움직였다. 그러다 아파트 담벼락 밑에서 담배 피우던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가 담배 연기를 내뿜는 소리인지 비웃는 소리인지 헷갈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큰개의 목줄을 잡고, 있는 힘껏 내달렸다. 많이 창피해도 눈물이 찔끔 난다. 


 밤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허기질 큰개를 위해 에어프라이어에 구운 고구마와 삶은 계란, 알배추 몇 장과 당근 몇 조각을 섞어 큰 그릇에 담았다. 엄청 잘 사는 집들은 오리고기, 말고기 이런 걸로 선식을 먹이기도 한다는데, 나는 내 정성만 그릇에 담았다. 큰개가 챱챱 소리를 걸어와 밥그릇 앞에 섰다. 큰개가 먹는 걸 구경하려고 옆에 쪼그려 앉았다. 큰개는 당근도 알배추도 와그작 와그작 씹고, 계란도 고구마도 꿀꺽 삼켰다. 큰개가 맛있게 먹는 걸 구경하며 생각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살가운 사람이 되었지.'


 큰개를 키우면서 요즘의 나는 부쩍 부지런히 움직이는 살가운 사람이 되었다. 뭘 해달라 말하지 않는, 그저 참고 기다리고 바라보는 큰개의 의중을 살피며 항상 마음이 분주해졌다. 큰개가 말없이 오줌을 참을까 봐 6시간에 한 번씩은 나가주려고 한다. 배고플까 봐 밥그릇이 비었는지 확인하고, 물그릇에 담긴 물이 더러워서 목마를 걸 참을까 봐 물도 자주 갈아놓는다. 이번 달엔 약을 먹였는지 기억하고, 눈에 좋다는 당근과 수술한 다리가 건강해지게 단백질 가득한 고기나 달걀도 챙겨본다. 큰개가 행복해지게 이 산기슭과 저 천변을 열심히 걷는다. 


 큰개가 알배추를 아작아작 씹는 걸 바라보며 큰개를 위해 살가워진 내가 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란 사람, 칭찬해.' 뭐 그런 마음. 딱 거기까지만 생각했으면 자존감이 올라간 채로 잠들었을 것 같은데, 큰개가 당근을 씹는 동안 갑자기 아버지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떠올랐다. 아버지가 이 글을 읽으면 이런 말을 할 것 같다.


"니 애비한테도 반만 더 살가워져 봐라."


 혼자 자취할 때, 아버지가 오면 여기저기 떨어진 내 머리카락을 주웠다. 나는 "아버지 심심할까 봐 남겨놨어요."라고 너스레를 떨며 배를 긁었다. 그럼 아버지는 출근 안 하는 날에도 씻을 수는 있는 거 아니냐고 물으셨다. 못난 딸은 '그럼 언제 안 씻을 수 있어요?'라고 말대꾸를 했고,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큰개가 밥 먹는 거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살가움에 흡족해하는 나에게 할 말이 많으실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를 위한 마음까지 먹었다. 큰개를 위해 살가워졌듯이, 내게 많이 소중한 아버지를 위해서도 살가워져야지. 내일 전화하고, 아버지 쉬는 날 만나서 맛난 거 사드려야지. 몇만 원이라도 더 벌 일이 있으면 부지런히 벌어서 아버지 주머니에 "용돈입니다요." 찔러드려야지 생각했다. 아버지, 이 정도면 딸내미 기특하쥬?


 나 언제 이렇게 살가워졌지. 나란 사람, 대견해. 이게 다 귀여워죽겠는 너 덕분이다, 큰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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