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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Feb 22. 2024

다리가 아파도 뽈뽀는 먹어야지

- 걷기 25일 차 -

‘몰리나세까’의 알베르게에서 외국인 부부에 대한 평가로 한국인끼리 시끄러웠다. 외국인 부부가 저녁 준비로 주방을 사용하며 갑 질을 했다나 어쨌다나. 옳고 그름을 떠나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인가 싶어 씁쓸하다. 내가 직접 겪은 게 아니니 듣고만 있는데 한국인들의 목소리가 큰걸 보니 이들이 이긴 것 같다.     


이른 아침, ‘까까벨로스’로 출발하기 위해 밖으로 나오니 어제 그 외국인 부부가 2층 창가에 앉아 식사 중이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어젯밤의 소란스러움 주인공으로 믿기 어려운 모습이다. 어제의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 이다음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나이에 걸맞게 처신함을 잊지 말아야겠다. 주변 사람에게 민폐가 되는 노후생활은 사양하련다. 편견은 이래서 무섭다.      



엊그제가 보름이었다. 커다랗고 둥근 보름달이 보기 좋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어둠 속 출발 때문인지 꽉 찬 달님은 여명에도 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힘 빠진 나그네를 지켜주는가 싶어 내려다보는 달님을 고개를 젖혀 바라본다. 그리곤 좋은 징조라고 내 식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철로 만든 다리라는 뜻의 ‘폰페라다’는 까미노 천사 ‘제니퍼'가 사는 고장이다. 순례길을 향해 가며 만나는 마을은 대부분 작은 마을이다. 신발은커녕 생필품 사기도 어려운 곳이 많다. 그러나 이곳은 도시가 꽤 크다. 제니퍼는 큰 스포츠 매장 위치를 알려주었다. 중등산화의 무거움을 덜어줄 경등산화 한 켤레를 사기 위해 도착하기 바쁘게 매장부터 찾았다.    

  

발 사이즈 230mm인 내가 신을 트레킹화 찾기는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와 같았다. 점원은 아동화 사이즈라며 난감해했다. 그러나 나는 의지의 한국인 아닌가. 눈을 부릅뜨고 신발 찾아 삼만 리를 하다가 마침내 240mm 트레킹화를 찾아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버금가는 기쁨이다. 디자인, 색상 등등은 고려의 대상에 끼지도 못한다. 그저 신을 수 있는 신발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더구나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있는 유명한 브랜드의 트레킹화라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다. 이 신발은 내 발의 수호천사가 되어 줄 것이다. 여전히 잘 걷지 못하지만 가벼운 새 신발을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 걸을 수 있는 다리의 상태는 시간이, 발의 추위는 이 아이가 해결해 주리라 기대한다.      


천주교 신자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할 크고 작은 성당은 폰페라다에서도 계속 만난다. 큰 것보다는 작고 볼품없는 성당에 눈이 더 많이 감은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성향 때문이다. 조금밖에 가지지 못한 자의 어려움을 작은 성당이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간다. 자만하지 않도록 마음 관리를 잘해야겠다.      


이곳에는 템플기사단의 성도 있다. 산 안드레스(San Andres)성당 벽을 따라가면 만나게 되는 이 성(Castillo de los Templarios)은 12~13세기에 지어졌다고 한다. 8,000㎡의 규모에 일정하지 않은 형태로 망루와 맹세의 탑이 건설됐고, 거대한 성벽에는 열두 개의 탑이 조성되어 있다. 이 탑들은 열두 제자를 나타낸단다. 템플기사단은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한 수도사들의 종교단체로 중세에는 순례자들을 지켜주기도 했다고 한다.     


템플기사단 성의 내부가 궁금했으나 출입문이 굳게 닫혀 열리지를 않는다. 순례길 위의 성당들도 아주 유명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았는데 템플기사단 성도 마찬가지이다. 하는 수 없이 끝에서 끝까지 찬찬히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전 부장과 함께 움직이다가 태극기 청년을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여린 풀잎 같은 소녀와 함께 걷고 있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소녀의 강단이 여간 아니다. 워킹홀리데이로 출국해 이스라엘에서 지내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이 길을 걷는다고 했다. 집채만 한 배낭을 메고 걷는 소녀가 듬직해 보인다. 내 나라 젊은이들을 만나면 왜 이리도 반갑고 기특한지, 주섬주섬 주전부리를 챙겨주고 다시 헤어졌다.      

오늘의 목적지 까까벨로스는 ‘뽈보’ 요리가 유명하다. 아무리 다리가 불편해도 이렇게 맛난 음식을 놓칠 내가 아니다. 저녁으로 뽈보를 먹으러 라푼젤 언니와 나갔는데 레스토랑에서 제니퍼와 제니퍼 남편 그리고 전 부장을 만났다. 반가움에 팔짝거리며 기념사진을 찍고 그들과 떨어진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뽈보 요리는 찜과 구이 두 가지가 있다기에 각각 하나씩 시키고 맥주를 추가했다. 땀과 먼지를 씻어내고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먹는 맛난 음식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오랜만에 찾아든 봄빛 같은 볕으로 하루가 산뜻하더니 저녁 식사까지 깔끔하니 행복하다.        


* 걷기 25일 차 (몰리나세까~ 까까벨로스(Cacabelos)) 24km / 누적거리 59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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