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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서 May 12. 2020

친애하는 독립예술영화관에게

#saveourcinema



스무 살 때부터 독립예술영화관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아왔습니다.


2005년, 난생 처음 낙원동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구 허리우드극장)에 가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2005)>를 보았고, 연극에 푹 빠져 있던 제가 영화에 출연해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죠. 예술 영화 자체도 저에게는 은하수와 같은 신세계였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극장이 저에게 안겨준 오감(五感)이었어요. 삐걱거리는 붉은 의자의 촉감, 팝콘 냄새가 아닌 극장 벽의 습기 찬 나무 냄새, 생수병 따는 소리도 들리지 않던 객석의 적막에 저는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낙원상가에 자리잡았던 서울아트시네마. (출처:네이버이미지라이브러리 김흥구 작가)


그 때부터 저는 수업을 빠지면서 서울아트시네마, 시네큐브, 필름포럼, 아트하우스모모 등 학교 근처 독립예술영화관에 드나들기 시작했어요. 어떤 영화들은 저의 허기를 채워주기도 했고, 어떤 영화들은 저에게 잘 마시지도 못하던 소주 한 잔 하고픈 갈증을 안겨주기도 했죠.

     

4학년 1학기, 수업을 빼먹지 않아도 독립예술영화관에서 마음껏 영화를 볼 수 있는 전공과목이 있다 길래, 바로 수강 신청을 했어요. 그 수업은 이름하야 ‘영화예술의 이해’. 제가 스무 살 때 서울아트시네마에 가지 않았더라면, 영화예술 혹은 예술영화에 흥미가 없었더라면 아마 관심도 갖지 않았을 수업이죠.


딱 5월의 이맘 때 즈음이었나봐요. 저는 기말고사 레포트를 쓰기 위해 필름포럼에서 <갇힌 여인 La Captive (2000)>을 관람하고, 벨기에 여성 영화 감독 샹탈 아커만을 알게 됩니다. 인물을 향한 그녀의 차갑고도 집요한 시선이 유독 좋았던 저는 졸업 후에도 그녀의 옛 작품들을 찾아보며 영감을 얻습니다. 최근에야 보게 된 <잔느 딜망 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 (1975)> 은  제가 여태껏 본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한 여성을 향한 카메라의 시선이 그 어떤 영화보다도 정직하고 집요합니다. 정말 뒷통수를 얻어 맞는 듯한 영화적 충격이었어요. 이 영화를 PC 모니터가 아닌 영화관에서 봤으면 어땠을까... 극장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지네요.

3시간 45분동안 오로지 한 여성만을 응시하는 영화 <잔느 딜망>. Delphine Seyrig의 존재감은 숨막힐 정도이다.



생각해보니, 독립예술영화관 덕분에 정말로 영화 같은 일도 일어났었어요. 어느 날, 저는 아트하우스모모에서 관람한 영화 <파수꾼 (2011)>을 보고 주연 배우 이제훈에게 완전히 빠지게 되었죠. 그 후로부터 몇 달 동안 저는 “나 이제훈이랑 꼭 같이 연기할거야!” 라고 입이 마르도록 퍼뜨리고 다녔습니다. 비록 그 당시 저는 학생 단편 영화를 주로 찍던 새내기배우였지만요. 하지만 꿈은 크게 갖고 볼 일인가봅니다. 제가 이제훈과 정말로 6년 후에 현장에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게다가 크랭크인 첫날부터 “파꾸! 우리 동거 합시다!” 라며 느닷없이 고백을 하고... 그 다음날엔 그의 뺨을 찰지게 때리고...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 전 그와 영화를 찍었습니다.


“Dream Big!!”


봄이 지나간 캠퍼스엔 백양나무가 푸르르고, ‘영화예술의 이해’ 수업도 마지막을 향해 가던 어느 오후.


교수님께서 그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여러분은 공장에서 가공된 재료로 만든 패스트푸드를 좋아하시죠. 하지만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최고의 셰프들이 최상의 재료로 정성껏 만든 코스 요리와 같은 영화들도 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천편일률적으로 가공된 햄버거, 맛있을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영화관에 가면 그 이상의 코스 요리를 먹을 수 있습니다. 많은 영화를 다양하게 섭취하세요. 패스트푸드만 먹다 보면 입맛 버립니다.


물론, 여러분의 건강도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기커를 위한 안내서 (2005)> 재기발랄한 저 세상으로의 초대.



독립영화예술관이, 그리고 독립예술영화가, 저의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저의 입맛도, 저의 건강도요.
저의 정신도요.


그 후로부터 10년이 지난 2020년, 저는 아직도 영화에 미쳐 있습니다. 아직도 독립예술영화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지난 10년 동안 저는 제가 미쳐 있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제가, 영화가 삶의 수단이기 전에 기쁨이었던 제가, 위기에 닥친 영화관에게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조금 낯간지럽더라도 편지를 써보기로 합니다.

그저 다가가기 쉬운 일상이었던 영화와, 영화관에게, 쉽지 않은 고백을 해보기로 합니다.


지난 15년 동안 저에게 영감과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던, 친애하는 독립예술영화관에게.


고맙습니다.


2020년, 전 세계를 덮친 질병의 위기로부터 일어나,

다시 저의, 우리의 일상이 되어주세요.      


Save Our Cinema.


For,


Cinema Saves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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