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있어도 춤을 추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춤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굳이 장르를 규정짓자면 현대무용을 좋아하고, 어릴적 핑크색 타이츠가 신고 싶어서 1년 남짓 배웠던 발레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 배운 춤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깐. ‘장르를 규정짓자면’이라는 소개에는 어폐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무용은 더 높은 점프, 더 유려한 스핀으로 점수를 매길 수 있는 타장르의 춤과 달리, 그 모든 법칙과 규제를 탈피한 움직임을 모색하는 춤이기에, 장르를 규정짓기가 어렵다. 발레가 아닌, 살사가 아닌, 스윙이 아닌, 모-던 댄스. 이렇게 말해도 사실 현대무용을 정확히 설명하기엔 나의 수사 능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나 요즘 현대무용 배워.”
“현대무용이 뭔데? 스우파에 프라우드먼이 하는 그런 춤?”
“어어... 그런 춤이 어떤 춤인데?”
“글쎄 뭐. 모니카가 하는... 멋있는 거 있잖아.”
멋있는 건 맞다.
정의내릴 수 없는 멋에 끌렸다. ‘이렇게 해야 돼.’에서 벗어나 ‘어떻게 해야 되는 건 없어. 업 투 유.’라는 자유를 누려보라고 허락하는 춤이라니, 얼마나 멋있는가. 정박의 리듬에 맞출 필요도 없고, 정해진 대본도, 교과서도 없다. 무용선생님과 좋아하는 곡 하나를 정하고, 그 곡을 듣고 선생님이 짜온 움직임들을 익힌다. 그 움직임들을 연속해서 곡에 맞춰 연습하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타이밍에 손을 올리고 싶어지고, 우리가 끌리는 리듬에 맞춰 구르고 싶어진다. 움직임을 익히다 보면 점차 우리만의 약속된 움직임이 되고, 그 약속된 움직임의 연속이 춤이 되는 것이다. 이 단순함 속에 새로운 발견들이 있다.
“근데 선생님, 무용 배우기 전에는 스핀이나 점프가 가장 어려울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까… 가장 어려운 건 그 동작을 끝맺고 멈추는 일이네요.”
전신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하나 둘, 하나 둘 점점 더 가까이 거울 속 나에게 ‘돌아’가다 휘청인다. 스핀이 되긴 되는데, 멈출 수가 없다. 어지럽다. 하긴, 올림픽에서도 체조선수들이 그 모든 기술을 성공시킨 후에 착지를 못하면 감점되잖아. 김연아의 트리플 악셀이 아름다운 이유는 공중 스핀 이후 빙상 위로 내려앉는 깃털같은 착지가 있기 때문이다. 움직임의 맺음, 멈춤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맞아요, 희서님. 그런데 멈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선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스핀 하다가 다시 곧게 선다. 누군가가 정수리 위에서 실로 나를 당겨주듯이. 그렇게 생각하면 멈추기도 쉬워지고, 다른 동작으로 연결하기도 훨씬 수월하실 거에요. 멈춘다고 생각하면 동작이 끊기기 마련인데, 선다고 생각하면 동작이 진행되거든요.”
수업이 끝난 뒤에도 선생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내 귓가에 맴돌았다. 멈추는게 아니라 서는 것이다. 선다는 것은 멈추는 게 아니라진행되는 동작의 일부고, 그러니까, 멈추는 것도 사실은 빨간 신호가 아니라, 파란 신호다. 점멸하는 파란등이 빨간등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보며 횡단보도 앞에 선 나는, 뜻밖의 발견에 어딘지 모를 위안을 받는다.
‘멈춤 안에도 춤이 있었네.’
-
며칠 후, 읽고 있던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마주한 반가운 글귀를 나누며 이번 브런치를 마무리한다.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 걷는 것은 산문이고 춤추는 것은 시지.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오랜 겨울의 켜켜이 쌓인 낙엽 속에서,
멈춰있어도 춤을 추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