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희서 Nov 05. 2019

우상

희서의 書, 여섯 번째 이야기


1.


박준 시인님께 물었다.


“시인님, 시상은 항상 떠오르는 건가요, 아니면 어떤 특정한 시기에 문득, 하고 떠오르는 건가요?”


나는 그의 손이 굉장히 섬세하다고 생각했다. 맥주잔을 잡는 손가락이 매우 독특하다. 유연하다.     


“글쎄요, 출판을 앞두고 시를 쓰기 시작하면 떠오르고요, 쉴 때엔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아요.”     


“정말요? 아, 전 시인들은 항상 노트를 갖고 다니면서,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쓰는 줄 알았어요.”


“떠오를 수도 있지만, 저는 일할 때엔 쭉 일하고, 쉴 땐 쉬려고 하거든요. 일할 때에는 하루 종일 쓰지만, 쉴 때엔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아요.”     


“와- 멋있는데요? 직업으로서의 시인은 역시 통상적으로 그려진 이미지랑 다르네요.”     


시인님은 나의 질문 공세에 대답하면서도 쑥스러워하셨다. 안경 너머로 머쓱하게 웃는 눈이 반짝인다. 나는 저 눈빛을 어디서 많이 봤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내 술잔에 녹아내리는 얼음을 내려다보았다. 봉준호 감독님 같기도 하고.     


2.


김민정 시인 님께 물었다.


“시인 님, 시인들은 술을 마시고 시를 쓰기도 하나요?”


“그럼. 술 마시고 많이 쓰지.”


“정말요? 그런 시들 중에 유명한 시도 있겠죠?”


“아니지. 그 다음 날 바로 찢어버리지. 술 깨면.”      


(아...)


문득, 잊고 있던 나의 부끄러운 낱말들이 생각 났다.


“희서는 시인에 대해 관심이 많구나.”


3.


루라 돌라스, 11년 전, 미국 버클리에서 가장 좋아했던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그 어떤 연기자도 본인의 작업 평가를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완벽이란 뭘까요? 과연 존재하는 걸까요? 여러분이 하는 역할마다 언제나 어느 정도의 불만족이 남겠지요. 그 불만족이 바로 여러분을 그 다음 작업으로, 더 나은 연기자로 만들어 나갈 거예요.


그 불만족이 여러분을 성장시킬 겁니다.

불만족이란 성스러운 거예요."


이 말씀을 하실 때, 그녀의 검은 곱슬머리가 탱그르르 허공에서 돌았다. 그녀는 그리스인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부끄러운 얼굴들에 가치를 부여했다. 그녀는 그것이 성스럽다고 했다. 다가갈 수 없어도 다가가고자 하는 그 몸부림이 성스럽고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나는 꿈을 꿔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4.


두 가지 꿈이 있지 않을까. 한 가지는 다다를 수 없다고 해도 달디 단 꿈. 우상. 그 우상을 향한 사랑. 그 꿈을 이룬 사람들을 향한 존경.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한 아름다운 망상.


다른 한 가지는 병과 같은 꿈. 다다를 수 없어서 아픈, 괴로운 꿈.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하며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꿈. 영원히 다다르지 못한다 해도. 그 불가능을 영원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


5.


짐 캐리가 말했다고 한다.     

“꿈을 포기하면, 당신한테 뭐가 남죠?”          


6.


부끄럽지만 서서히 다가가고 있다.

시란, 연기란 나에게 그런 것.




브런치만 해도 그렇다. 잘 쓰고 싶지만 매번 다다르지 못한다. 매번 욕심을 내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지우고 또 지우는 것이 후퇴만은 아니다. 포기하지 않는 순간부터 우리는 매 순간 전진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