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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Feb 04. 2020

해피 투게더(영화)

왕가위가 바라보는 인간의 결핍

왕가위 감독은  참 특색 있는 감독이다. 물론 거장이라 불리는 영화감독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왕가위 감독을 말할 땐 유독 특색 있음을 강조하고 싶어 진다. 그만큼 영화판에서 그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수많은 감독들은 왕가위의 영화에 매료되어 그의 연출 스타일을 차용했지만 느낌만 간신히 낼뿐 나가떨어졌다. 이는 왕가위 감독의 연출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론적으로는 간단하며 접근하기 쉽기에 많은 감독들이 그의 연출을 흉내 내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왕가위 감독의 연출은 오직 왕가위 영화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일까? 이 점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왕가위 감독의 연출이 어떤 것인지 서술할 필요가 있겠다. 왕가위 감독은 의도적으로 카메라 초점을 흐린다. 몇몇 장면에서 초점을 똑바로 맞추지 않으므로써 묘한 감정을 끄집어낸다. 이 같이 카메라 기능을 의도적으로 손상시키는 연출이 왕가위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은 초점을 흐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카메라를 흔들기도 하고 싱크를 뒤틀기도 한다. 또한 숏과 숏의 연결을 거칠게 끊어내기도 한다. 이렇게 투박하고 아마추어적인 카메라 디렉팅이 세심하게 설계된 아름다운 장면과 어울러졌을 때 묘한 감정을 분출시키게 된다. 미술 디자인 전공자답게 왕가위 감독은 카메라 비율에 맞춰 사물, 인물을 세심하게 배치한다. 이렇게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그는 의도적으로 기능 부실의 카메라로 찍는 것이다. 일반적인 감독이라면 자신이 설계한 미적 구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카메라의 특성을 이용하여 더 자세하게 더욱 디테일하게 선보이려 할 것이다. 확실히 왕가위 감독의 연출은 일반적이지 않다. 여기서 세심한 미적 구성을 선행하지 않은 채 왕가위 감독의 투박한 카메라 디렉팅을 흉내 낸 많은 감독이 실패를 맛보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앞서 나의 물음에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좀 더 왕가위 감독의 연출을 알아보자.

왕가위 감독의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왕가위 감독이 선보이는 영화 스토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비정전, 중경삼림,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일대종사 등 그의 영화는 사랑 즉 로맨스를 주로 다룬다. 심지어 동사서독과 일대종사는 무협영화라는 인상만 줄 뿐 실제로는 남녀의 사랑을 다룬다. 재밌는 지점은 그의 영화 속 로맨스는 특별하고 기이한 러브스토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은 사랑의 강렬한 힘에 매료되어 사랑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수용자들을 학교 선생에게 사랑 이야기를 조르는 중, 고등학생으로 여길 수는 없다. 자신들만의 사랑을 해본 자들은 학교 선생이 설파하는 러브스토리에 옅은 미소만 지을 뿐이다. 결국 예술가들은 더 강렬하고 사회의 통념을 깨버리는 자극적인 러브스토리를 요구받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가위 감독은 고작 불륜이나 동성애 정도의 특별할 거 없는 스토리를 선보인다. 이는 녹슬고 낡은 칼을 들고 결투장에 임하는 꼴이다. 이 자신감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이 낡은 칼이 왕가위가 들었을 때 날카로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서 우리는 많은 감독들이 쉽게 따라 하지 못하는 왕가위만의 특별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수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찬양하는 작품을 좀 삐딱한 시선으로 봐보자. 저 들이 말하는 사랑의 이면에 결핍을 대입시켜보자. 사랑의 행위에 결핍을 대입시키는 순간 사랑의 미스터리와 강렬함은 꽤나 단순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여자의 젖가슴에 집착하는 기이한 남자는 엄마의 사랑이 결핍된 남자로, 아름다운 여자를 취하는 것에 몰두하다 취하자마자 공허함에 빠져드는 남자는 어린 시절 인정 욕구가 결핍된 남자로, 남자의 가벼운 호의에 쉽게 빠져드는 여자는 집안에서 보살핌이 결핍된 여자 등 이렇게 결핍은 인간의 기이한 행위를 고개가 끄덕일 정도로 해명해 준다. 이렇게 되자 사랑을 다루는 수많은 예술 작품들은 결핍의 단순한 변주 정도로 여겨진다. 또한 우리는 인간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라는 말에  쉽게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결핍된 존재로 태어난다. 특정한 기간 동안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먹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결핍 덩어리로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난 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결핍을 메꾸기 위해 삶을 소진한다. 그중 사랑 행위가 가장 효과적으로 결핍을 메꾸기에 큰 찬양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자신의 결핍을 허겁지겁 해결하기 위해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예리하게 간파한 자가 프로이트이며 프로이트를 기반으로 발전된 심리학은 현재 인간을 가장 잘 묘사하는 학파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결핍으로 해석하는 것에 어딘지 나는 꺼림칙하게만 느껴진다. 모든 걸 설명 가능한 말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명언이 있지 않은가?) 프로이트는 의도치 않게 인간의 고난을 끊어 버릴 수 있는 강력한 학파를 만들어 버렸다. 이제 심리치료 학자는 인간의 결핍을 유심히 관찰한 뒤 이 결핍을 해소할 적당한 방법을 구사하면 되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심리치료는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유토피아에 살고 있는가? 다만 좀 더 편해졌을 뿐이다. 더 냉소적으로 표현하자면 삶의 고난을 회피할 뒷구멍이 하나 생겼을 뿐이다. 여전히 우리는 삶은 고통이라는 싯다르타의 말을 듣고 가슴이 죄어와 황급히 가진 것들을 털어내고 해탈의 길로 들어서는가 하면 인간의 원죄를 운운하는 그리스도교의 말에 넋이 나가 흐리멍텅한 눈을 하늘로 향하거나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땅에 처박는다. 이 지점에서 왕가위 감독의 태도는 독특함을 표출한다. 심리학자는 인간의 결핍을 인지하고 이것을 해소하려 한다면 왕가위는 인간의 결핍 자체를 긍정한다.

물론 그의 영화가 처음부터 그러하지는 못했다. 왕가위 감독의 기능 부실 카메라는 왕가위의 스타일리시한 연출로 이해되었으며 홍콩의 독특한 역사 때문에 홍콩 시민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정체성의 불확실함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특정한 나라의 배경하에서 표출될 수 있는 미적 연출은 포스트 모더니즘 운동의 흐름에 힘 입어 왕가위 영화는 순식간에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가 되었으며 할리우드 영화 시스템에 대항 가능한 영화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해피 투게더’ 이후부터 기능 부실 카메라는 그 의미를 달리하기 시작한다. ‘해피 투게더’ 이전 그의 영화는 사랑하면 행복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방황하고 슬퍼진다는 일반적인 러브 스토리를 그 나름의 재치로 풀어냈다. 물론 ‘해피투게더’ 이전 영화에서도 전조 즉 결핍 자체를 긍정하려는 그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아비정전’에서 아비(장국영)는 비정상적으로 사랑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어머니로부터의 사랑 말이다. 영화 마지막쯤에 아비는 더 이상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왕가위 감독은 아비의 슬픔을 나약하게 표현하지 않고 당차게 혹은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아비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동사서독’에서 구양봉(장국영)은 사랑하는 여인이 형수가 되어버린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는 형수가 머물고 있는 고향을 벗어나 객잔을 운영한다. 이 객잔은 다시 형수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공간이며 그곳에서 그는 기다린다. 하지만 이후 구양봉은 형수의 부고 소식을 듣는데 여기서 왕가위 감독은 구양봉이 객잔을 불태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서독으로 불리며 유명한 검객이 되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이렇게 왕가위는 결핍된 존재가 자신의 결핍을 표출하는 모습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만 그 존재가 자신의 결핍이 채워지지 않음을 인정할 때 절망하며 나약해지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형태가 기이할지라도 새로운 성격의 캐릭터가 창조되는 원동력으로 결핍을 묘사한다. 이 같은 왕가위 감독의 태도가 ‘해피투게더’에서 가장 빛을 발하며 완성된 모습을 보인다. ‘해피 투게더’에서부터 드디어 왕가위 감독은 결핍을 삶의 원동력 정도의 시선에서 아예 긍정적인 힘으로 바라본다.

 보영(장국영)과 영휘(양조위)는 이과수 폭포를 보기 위한 여행을 하지만 끝내 길을 읽고 방황하다 아르헨티나에 머물게 된다. 보영과 여휘는 이미 숱하게 헤어지고 만나고를 반복했던 관계라 둘은 또다시 이별을 한다. 여기서 이과수 폭포는 ‘동사서독’에 구양봉의 객잔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 이별했음에도 여휘는 이과수 폭포를 모형으로 만든 스탠드를 바라보며 보영과 이과수 폭포를 같이 볼 날을 기대한다. 역시나 보영은 다시 여휘에게 돌아온다. 이때 흑백이던 화면이 컬러로 바뀌면서 왕가위 감독의 재치 넘치는 연출이 둘의 사랑을 따듯하게 비춰준다. 여기까지는 왕가위 감독의 전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보영이 다시 여휘를 떠나려고 하는 시점에 장(장첸)의 등장으로 ‘해피 투게더’는 전의 작품들과 다른 위상을 뽐내게 된다. 장은 이미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새로운 인물이 된 캐릭터이다. 어린 시절 눈병으로 인해 귀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린 장은 목소리로 사람의 감정까지 파악할 수 있는 인물이니 말이다. 여휘는 그런 장의 모습을 통해 보영의 존재를 다시 재정립한다. 여태컷 여휘에게 보영은 자신의 결핍을 훌륭하게 채워 줄 수 있는 존재인 동시에 자신의 결핍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여휘는 보영의 여권을 훔치고 많은 담배를 사 와 보영을 자신 곁에 두려는 기이한 집착을 보였다. 보영을 통해 자신의 결핍이 느껴지는 순간 여휘는 발버둥을 치며 보영에게 매달렸다. 이는 본인의 결핍을 느끼는 게 싫을 뿐 보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제 여휘는 장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나약함을 느끼게 되었다. 여휘는 장을 눈만 보이는 슈퍼맨이라 칭할 정도로 장의 삶의 태도에 존경을 보인다. 여휘는 이렇게 하여 달라진다. 그는 이제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보영이 없는 삶을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진짜 사랑을 받고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니 말이다.

‘해피 투게더’ 이전의 작품에서 왕가위 감독은 결핍이 삶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을 어필하였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이 결핍을 인정하는 과정은 수동적이었다. 주인공 스스로가 자신의 결핍을 수용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받아들이수밖에 없는 불행한 사고로 표현되었다. 아비와 구양봉은 강제적으로 결핍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후 행보에 공허하고 쓸쓸한 그림자가 깔린다. 여휘는 다르다. 그는 울기도 하고 공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꾸역꾸역 자신의 결핍을 직시하고 받아들인다. 보영을 대신하는 존재로 장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억지로 혼자가 된다. 혼자 이과수 폭포를 보는 행위를 끝으로 여휘는 이제 보영이 없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스스로 결심을 굳힌다. 결국 여휘는 보영의 유혹을 뿌리치고 홍콩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표정은 전과 달라진다. 항상 찡그리고 불안한 표정이 었던 여휘의 얼굴이 이제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다. 반면에 아르헨티나에 남겨진 보영은 여휘와 달리 자신의 결핍을 긍정하지 못했기에 그 괴로움에 허덕이며 살아가게 된다. 왕가위 감독은 보영을 여휘가 살던 집에 구속시킴으로써  아비나 구양보를 표현했던 거와 달리 나약하게만 표현한다. 이 지점에서 ‘해피 투게더’가 전의 영화와 다름을 알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은 성장한 여휘를 더욱 축복해주고 싶은 마음에 여휘에게 장의 본집을 우연히 알게 되는 선물을 선사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 이렇게 ‘해피 투게더’에서 달라진 왕가위 감독의 태도는 후에 ‘화양연화’에 까지 이어진다. 그렇기에 수 리첸(장만옥)과 초우 모완(양조위)이 이별을 미리 연습하는 영화사 길이 남는 명장면이 탄생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왕가위 감독의 결핍 자체를 긍정하는 태도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의 기능 부실 카메라 연출은 단순하게 그의 감각적인 연출로만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흔히 완벽한 표현력을 지닌 예술로 칭송받는다. 이는 노래가 시간의 예술이며 조각, 회화는 공간의 예술이며 영화가 이 두 예술을 가장 훌륭하게 접합시킬 수 있는 예술이라는 생각에서 기인된다. 하지만 노래가 공간을 표현하지 못하는 결핍이 있기에 아름다운 춤사위가 탄생했으며 조각, 회화가 시간을 표현하지 못하는 결핍이 있기에 우리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고 눈물을 흘리거나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의 표현력에 시, 공간의 결핍이 없다. 그래서 영화는 시, 공간에 구애되지 않는다. 이를 결핍을 긍정하는 왕가위 감독의 태도에서 보면 구애받지 못하는 영화의 신세가 안쓰러워 보인다. 그렇기에 왕가위 감독은 의도적으로 카메라 기능을 손상시킨다. 손상된 카메라는 드디어 결핍을 지닌 존재가 되었으며 사랑을 받을 수도 줄 수도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흔들리고 흐리멍텅한 초점의 앵글이 그토록 사랑스러운 이유이다. 보여주고 싶은 것을 온전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영화의 폭넓고 디테일한 표현력에 매료된 감독이라면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왕가위를 따라 하자면 결핍을 긍정하는 용기부터 가져야 한다.

왕가위 감독에게 자극적인 러브 스토리는 불필요했을 것이다. 오히려 자극적인 러브 스토리는 인간의 결핍을 너무나 거대하게 표현하여 무찔러야 할 적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왕가위 감독은 차분하게 인간의 결핍을 보여주고 이를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여휘를 통해 왕가위 감독은 인간이 결핍되었기에 사랑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이 있기에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핍을 해소하려는 심리학자의 행위는 사랑 또한 없애버리는 것이다. 결핍마저 사랑으로 포함시키는 이 넉넉한 마음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삶은 고통이라는 싯다르타의 말을 들어도 가슴이 죄어오는 것이 아니라 든든해질 것이며 인간의 원죄를 운운하는 그리스도교의 말을 들어도 흐리 멍텅한 눈을 땅이나 하늘에 향하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흐리멍텅한 눈을 봐줄 사람을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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