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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Feb 14. 2020

미스터 노바디(영화)

영화와 힙합

나는 힙합과 영화를 좋아한다. 이런 나는 자연스레 두 예술이 어울린 작품을 원해왔다. 하지만 여태껏 영화가 힙합 비트를 잘 활용한 작품을 보지 못했다. 간간이 블랙 컬처를 다루는 영화는 볼 수 있지만 이들은 내가 원하는 그림을 보여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에미넴의 발자취를 다룬 ‘8마일’, 스트릿 댄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텝업 시리즈’ 같은 영화에서 OST로 힙합 비트가 활용된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는 좀비 영화에서 당연히 좀비가 등장하듯 필연적으로만 쓰일 뿐이다. 좀비 영화에 좀비가 주인공이 될 수 없듯이 힙합 비트는 영화음악으로 쓰이지가 않는다. 영화에서 힙합 비트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흥을 돋우기 위해 쓰이거나 힙합 공연 장면에서나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영화 폭에서 영화 내적으로 힙합 비트가 활용된 영화는 전용택 감독의 ‘감자 심포니’가 유일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뮤직 비디오 성격이 강해 영화 내적 흐름과 동떨어진 어색한 느낌을 준다. 과연 힙합 비트는 영화 음악이 되기에 부접 한 것인가? 그럴 수 있겠다 하고 생각이 고착됐을 때 나는 자코 반도르말 감독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는 다시 갈망하기 시작했다.

반도르말 감독의 특색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는 역시 '미스터 노바디' 일 것이다. 하지만 '미스터 노바디'의 특별함을 살펴보기 전에 그의 영화 중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영화인 '제 8요일'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 8요일'은 반도르말 감독이 타 감독과 다른 연출을 선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이니 말이다. '제 8요일'은 다운 증후군을 가진 조르쥬와 사회적으로 성공한 해리의 만남을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의 특별함은 두 인물의 만남이 성사되기 전 장면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우정을 다루는 영화는 이들의 만남에서 쏟아지는 에피소드를 통해 사회의 통념이나 편견을 깨고 삶의 가치에 새로운 무언가를 환기시켜준다. 그렇기에 만남이 성사된 후 두 인물의 성격, 상황 등이 부각되고 이것들로 갈등하고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반도르말 감독은 이 같은 흐름을 역전시킨다. 두 인물이 만나기 전에 미리 각 인물의 성격과 갈등 요소를 선보인다. 이러니 자연스레 관객은 두 인물이 만나기도 전에 어떤 갈등이 존재할 것이며 어떤 지점이 해소될 것인지 쉽게 예상하게 된다. 심지어 이 예상을 뒤집을 반전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무언가 기이하지 않은가? 반도르말 감독이 어떤 식으로 미리 두 인물의 성격과 갈등 지점을 표현하는 가는 '미스터 노바디'를 서술할 때 설명하도록 하겠다.(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컷을 통해 핵심만을 부각해서 보여준다.) 여기서는 미리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감독의 기이함에 집중해보자.

내러티브를 구성할 때 핵심 갈등 요소는 최대한 숨겼다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이렇게 해야 수용자의 감동과 몰입력이 더 커지니 말이다. 이것이 내러티브의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며 수많은 극작가 혹은 소설가는 이 방법을 어떻게 더욱 극적으로 발전시킬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렇다면 반도르말 감독은 자신의 기이한 선택으로 내러티브를 망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는 정보를 숨기지 않으므로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창출시킨다. 감독은 조르쥬와 해리기 만난 후 생기는 갈등과 그 갈등의 해소를 빠르게 처리해버린다.(처리한다 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을 쓰고 싶지만 마땅한 게 없다.) 관객은 이미 감독에 의해 미리 정보를 취득했기에 이 급진적인 관계의 발전이 작위적이거나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게 된다. 바로 이점을 위해 그는 미리 관객에게 정보를 준 것이다. 심지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조르쥬를 당연하듯이 보살피는 해리의 태도 또한 어색함을 주지 않는다.(물론 조르쥬를 떠맡지 않으려는 모습이 초반에 나오지만 굉장히 빨리 체념해 버린다. 또한 해리는 조르쥬의 이상행동을 최대한 관망하다 위험하다 싶을 때 나서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무관심보다 조르쥬를 최대한 이해하려는 모습으로 비친다. 이 또한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후 감독은 친밀해진 둘 사이 다음의 내러티비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감독이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된다.

보통 비 장애인과 장애인의 만남을 다루는 영화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의 결함을 보듬어 주고 수용하면서 아름답게 끝맺는다. 이를 연출하기 위해 비장애인의 특수한 능력 혹은 삭막한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순수함을 가진 인물로 장애인이 표현되곤 한다. 이를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매력을 어필하고 영화는 이를 이용하여 둘의 관계를 발전시킨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필연적 결함을 뛰어넘을 정도의 매력을 인지하고 장애인을 보듬어주고 수용하는 것이다. 결국 장애인을 다루는 영화임에도 서사의 중심은 비장애인에게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아름다워 보이는 관계임에도 그 주도권을 비장애인이 쥐고 있는 꼴이다. 그래서 반도르말 감독은 해리와 조르쥬의 관계 개선에서 만족하지 못한 것이다. 이미 조르쥬는 해리에게 엄청난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즉 조르쥬는 해리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조르쥬 역시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는 인격체이다. 자신의 삶의 가치가 비장애인인 해리에게 인정받은 것은 조르쥬의 주체적 삶을 생각하면 하등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반도르말 감독은 조르쥬가 자신의 사랑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누군가 자신의 사랑을 찾아나서는 모습만큼 주체적인건 없을것이다. 조르쥬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르쥬의 사랑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좌절되고 자살을 하게 된다.(여기서 더욱 도발적인 것은 장애인 스스로 그 편견에 갇혀있기에 조르쥬는 좌절한다는 점이다.) 반도르말 감독의 미칠 듯이 따듯한 반항이 느껴지는가? 조르쥬를 자살시키다니 난 조르쥬의 자살 장면에서 감독의 반항정신에 입이 떡 벌어지고 아름다운 조르쥬의 몸짓에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감상하길 바란다. 반도르말 감독은 조르쥬의 비극을 통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장애인에게 던지는 따뜻한 시선 역시 권위적인 시선인 것이 아닌가? 당신은 자연스레 장애인을 바라볼 때 위에서 내려보는 시선인 것이 아닌가? 그러니 장애인을 특별한 시설에 격리시키는 결정이 쉬운 것이 아닌가? 그 눈이 아무리 따뜻할지라도 결국 당신은 장애인의 삶을 온전히 긍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점은 장애인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비열한 인간들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 같은 질문에 어떻게 입이 안 벌어지랴 이렇게 반도르말 감독은 장애인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조차 거부하기 위해 해리와 조르쥬의 아름다운 관계를 빨리 처리했다. 이로써 관객은 장애인의 삶을 온전히 긍정하고 존경하는 태도가 무엇인지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반도르말 감독의 특색 있는 연출이다. 자신의 철학을 표출하기 위해 관습적인 부분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 그것을 위해 미리 내러티브의 핵심적인 부분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하게 빨리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니 우리는 '미스터 노바디'를 살펴봐야 한다.

'미스터 노바디'는 초끈이론에 따라 여러 가능세계를 내포해있는 이 우주를 표현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 안에는 수많은 내러티브가 포함되어있다. 니모(자레드 레토)가 이혼으로 인해 결별하는 자신의 부모를 두고 엄마를 따라가느냐 아빠를 따라가느냐부터 시작해서 안나(주노 템플)를 사랑하느냐 엘리스(세라 폴리) 혹은 장(린 단팜)을 사랑하느냐 까지 각 에피소드마다 만만치 않은 니모의 인생 정보량이 함축되어 있다. 이를 2시간으로 요약하기 위해 반도르말 감독의 연출이 필요한 것이다. 반도르말 감독은 영화에 절대적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컷을 이용해 숏을 쪼개고 쪼개어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로써 빠르게 극을 진행시킬 수 있게 된다. 이 쪼개진 숏을 어떻게 유려하게 연결시키는 가는 글로 표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직접 그의 영화를 감상한다면 그의 천재적인 재치를 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쪼개진 숏안에 정보를 주입시키는 방법이다.

관객에게 전해야 할 정보가 많으니 하나의 숏안에 많은 정보를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마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반도르말 감독은 오히려 핵심적인 정보 하나 혹은 둘 정도를 강조하는 방식을 택한다. 예를 들어 니모의 엄마를 묘사할 때 의무적으로 어린 니모를 훈계하는 장면 즉 니모의 엉덩이를 무표정하게 때리는 그녀의 행위를 강조하는 기이한 숏을 보여준다. 이 장면 덕분에 이후 니모와 엄마의 갈등이 쉽게 수긍되고 이해되게 된다. 또한 엘리스의 과한 감정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그녀가 땅바닥에 뒹구르며 우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는 확실히 일상적인 숏이 아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의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잠깐의 관심을 보였다고 곧바로 오열을 하겠는가? 하지만 이 장면 덕분에 니모와 결혼한 엘리스의 기이한 행위가 쉽게 수긍되는 것이다.(이러한 연출이 앞서 언급한 '제 8요일'에서 조르쥬와 해리가 만나기 전 미리 각 인물의 성격과 갈등 요소를 표현할 때 쓰이는 연출과 동일하다.)

이런 식의 반도르말 감독의 연출은 '미스터 노바디'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아니 영화의 모든 구성이 이렇게 짜여있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의 연출을 글로 정의하자면 특정 인물의 상황 혹은 성격을 과하게 강조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이 캐릭터는 이런 인물이랍니다 뒤에 이야기가 대충 예상되시죠? 여러분" 하는 것이다. 이는 자칫하면 유치해 보이고 무성의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를 거뜬히 극복한다는 것이 반도르말 감독의 뛰어남인 것이다.(물론 그의 최신작인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는 무성의함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식으로 극복하느냐 일일이 설명하기는 지루하고 내 손가락이 아프다. 그러니 대표적인 예시 하나만 들어보겠다. 니모와 안나의 격렬한 사랑을 표현할 때 감독은 초근접 촬영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밀착되었고 은밀한지를 표현한다. 이는 섹스를 표현할 때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생각해봐라 두 인물의 몸의 섞임을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촬영을 하게 되면 관객은 자연스레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그 장면과 구성이 좋다 하여도 은밀함을 훔쳐본다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표출된다. 그래서 반도르말 감독은 근접 촬영도 아닌 초근접 촬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 덕분에 무성의하기는커녕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 장면이라 느껴진다 또한 이후에 보여지는 니모의 억척스러운 기다림이 쉽게 수긍된다. 반도르말 감독은 특정 부분을 강조하고 싶은 숏을 만들 때 가장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표현방식을 동물적으로 혹은 치밀한 계산하에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계획하에 진행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너무 천재이지 않은가?) 이것이 반도르말 감독이 유치함과 무성의함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렇게 우리는 '미스터 노바디'를 통해 반도르말 감독 연출의 특별함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미스터 노바디'에서는 이 특출 난 연출을 즐길 수 있다는 것외에 새로움은 없다는 것이다. '제 8요일'은 특출 난 연출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던졌다면 '미스터 노바디'는 결국 평생을 살 수 있어도 사랑이 중요하다는 흔히 타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래서 나는 감히 '제 8요일'이 반도르말 감독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 칭하고 싶다.(뭐.. 반도르말 감독의 특출한 연출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미스터 노바디'는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앞서 글의 첫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힙합과 영화를 연결시켜주는 부분을 반도르말 감독을 통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나 또한 반도르말 감독과 같이 그의 연출의 특출남을 빠르게 처리하였다. 이제부터 내가 진정하고 싶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떻게 하나의 숏안에 특정한 무엇을 과하게 조명시키는 반도르말 감독의 연출이 힙합과 연결되는지 알아보기 전에 클래식과 힙합의 차이에 대해서 서술할 필요가 있다. 힙합의 등장은 현대음악의 역사 안에서 가장 혁신적인 변혁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음악이 감상의 대상이 된 이후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멜로디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클래식은 '음~~'으로 구성되었다면 힙합은 '툭! 탁! 칙!'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잠시 클래식과 힙합을 비교하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비교인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확실히 그러한 지점은 존재한다. 하지만 음악을 시각적인 요소로 변화시킨  POP의 역사를 제외한다면 (나는 POP을 정확하게 정의하기가 힘들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POP은 마이클 잭슨 이후 등장하는 노래를 말한다. 이들은 뮤직비디오의 힘에 의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POP이다.) 음악 역사의 변모 과정을 클래식 > 재즈 > 락 > 힙합으로 거칠게 진행시킬 수 있다. 여기서 재즈와 락에서 사용되는 악기가 클래식에서 사용되는 악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재즈와 락은 클래식의 자식들로 엮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재즈는 클래식의 포멀함에 반기를 들었으며 락은 클래식에서 파생되는 온갖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부모에게 반항하는 자식들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음~~'거리는 멜로디로 엮여 있다. 반면에 힙합은 멜로디를 제거함으로써 클래식과 다른 독보적인 영역을 창조해 냈다.

그렇다면 음악에서 멜로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술이 사람의 삶을 표현하는 매개체라는 점에 동의를 한다면 음악은 사람의 감정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점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은 뮤즈 그 자체로 여겨지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멜로디는 감정의 지속을 표현한다 할 수 있다. 기쁨, 슬픔, 분노 같은 감정이 인간 안에서 발현될 때 그 강도에 따라 지속의 정도도 달라진다. 크게 기쁨을 느낄 때 하루 종일 혹은 일주일이나 기쁨을 느낄 수 있듯이 감정은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음악에서 멜로디로 표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바이브레이션이 가미되면 그 절정을 표현하게 된다. 마치 너무 기쁘면 손발이 떨리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멜로디를 거부한 힙합은 감정을 똑바로 표현하지 못하는 불구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 힙합은 인간의 감정을 다른 시선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집에 묶여있는 강아지를 봤다고 해보자 클래식은 '어머 귀여워 귀여워 귀여워 기뻐라' 라면 힙합은 '귀여워 순하네 착하네 묶여있네 불쌍해라'와 같이 특정한 무엇을 봤을 때 느껴지는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 복잡한 것들 중 특정 감정이 더 크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니 힙합 비트가 하나 같이 음울하고 반항적이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각 비트에 따라 기쁨, 슬픔, 분노 등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힙합은 감정의 지속성보다는 복잡성에 포커스를 맞춘다. '툭!'은 감정의 발현을 '탁!'은 감정의 크기를 '칙!'은 그 감정의 짧은 지속을 표현하는 것이다. 힙합 비트의 메커니즘을 좀 더 서술하자면 힙합 비트는 15초에서 30초 안에 비트 루틴을 완성시키고 반복한다. 이 반복되는 루틴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감정이 더욱 강조되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이후 루틴을 깨고 새롭게 추가되거나 거세되는 비트를 통해 감정의 절정이 표현된다. 마치 클래식에서 바이브레이션으로 특정 감정이 강조되듯이 말이다.

 (정정호의 결)


이제 클래식과 힙합의 차이를 알아봤으니 이를 영화 연출에 접목시켜 보자. 영화에서 클래식의 멜로디 즉 '음~~'은 롱테이크로 표현된다 할 수 있다면 힙합의 '툭! 탁! 칙!'은 다양한 컷의 변주로 표현된다 할 수 있다. 역시 영화계에선 컷보다는 롱테이크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영화에서 컷은 카메라의 존재가 부각되는 위험성과 남용하게 되면 영화가 부자연스럽고 지저분하게 보일 위험성이 포함된 연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감독은 컷의 의도적 사용을 최대한 줄이려 한다. 심지어 영화에서 컷은 필요악으로 여겨져 컷이 사용되었을 때 컷과 컷 사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연출에 집중을 한다. 이것이 많은 컷을 사용하는 감독보다 롱테이크를 잘 활용하는 감독이 상을 많이 받는 이유이다. 물론 컷의 쓰임새를 훌륭하게 재평가한 몽타주 기법이 있지만 이는 메시지의 강력한 전달성 때문에 선동성 위험이 존재해 그 쓰임에 제한이 생긴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우리는 롱테이크에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인가? 롱테이크의 아름다운 동선과 구성은 실로 감탄할 만 하지만 지루하다는 평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클래식에 지루함과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 생겼듯이 영화계도 비슷한 형상이 일어날 것이다.( 여기서 나는 힙합 비트를 강조하고 싶은 마음에 클래식을 깎아내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바흐의 팬으로서 클래식이 가지고 있는 우수한 표현력과 고결함을 좋아한다. 물론 바흐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에는 바이브레이션 사용이 최소화되었다는 점이긴 하지만)

(정용국의 blanc-black-blank)


 또한 감정의 지속은 일정 부분 감정이 인간의 이성을 속인다는 위선적인 면이 있다. 위선이란 감정이 이성적으로 이용되었을 때 발현된다. 감정을 억지로 지속시키는 행위는 언제나 위선이 발현될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여기서 특정 클래식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수 있다. 간파당한 위선은 따분함을 선사한다.) 반면에 감정의 복잡성은 좀 더 솔직한 인간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밥을 굶고 있는 거지를 봤을 때 동정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의 우월성 또한 느껴진다는 점을 힙합은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힙합이 솔직함에 리스펙을 표현하는 이유에는 이러한 것들이 큰 영향을 끼친다. 영화는 시각적 표현 즉 보여준다는 행위에 솔직함을 의존하고 있지만 역시 롱테이크는 치밀한 동선과 잘 짜인 구성이 존재한다는 위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보여준다는 메커니즘만으로는 위선의 위험성을 포용할 수 없다. 롱테이크의 의도적이고 뒤가 꾸릿한 아름다움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컷이 될 것이다.

컷은 다시 재조명받아야 하며 그날은 올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에 가장 근접해 있는 감독이 반도르말 감독인 것이다. 한 가지 숏에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과장해서, 응축해서 핵심을 보여주는 방식과 이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반도르말 감독의 연출은 확실히 힙합의 '툭! 탁! 칙!'과 비트 위를 춤추는 랩핑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반도르말 감독은 영화음악으로서 힙합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클래식을 자주 사용하는 감독이다. 하지만 나는 반도르말 감독의 영화를 볼 때 조심스럽게 내가 아는 힙합 비트를 대입하곤 한다. 그랬을 때 더 멋있는 장면이 상상된다는 것을 나의 망상으로만 치부하긴 싫다. 언젠가는 힙합 비트가 영화 음악으로 당당히 울려 퍼지는 날을 나는 갈망한다. 그날이 오면 영화는 더욱 다채로움을 뽐내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롱테이크 또한 그 효과에 대한 재조명이 비칠 것이다. 똥이 있으니 황금이 더 귀 해 보이듯 언제나 반대면이 있어야 더욱 돋보일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 말이다. 물론 누가 똥이 되고 황금이 될지는 지켜봐야 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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