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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Jul 14. 2021

킬링 디어(영화)

어떤 식이든 의사의 자부심은 조롱된다.

최근 같이 일하는 팀장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 일하기 좆같으면 쉬어버리고 더 이상 같이 일하기 싫으면 다른 회사나 팀을 기웃거리는 현장 바닥에서 내가 유일하게 "삼촌, 삼촌" 하며 따르는 분이다. 그는 고된 일이 끝나면 술과 토토로 남는 시간을 애써 보충하는 독신남이다. 현장 여건상 일을 할 수 없어 쉬는 날이면 "하... 오늘은 뭘 해야 하나" 하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사람이다. 워커홀릭도 이다지도 안타까운 워커홀릭은 보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가 인생에 할 거리가 일하는 것뿐이기에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는 것만은 아니다. 팀장이라는 직책임에도 아니 본인이 팀장이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몸을 아프게 만드는 더 큰 원인이다. 그의 확고한 생각을 고리타분한 고집으로 보고 '좀 설렁설렁하세요~', '애들 좀 시켜요~', '너무 무식하게 일하는 거 아니에요?' 따위의 이빨을 까는 것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삼촌의 행위가 버거운 것이다. 삼촌은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않는다. 오직 움직일 뿐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현장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그는 무너져가는 몸에 "괜찮아", "버틸 만 해!" 따위의 거짓말을 해댄다. 받는 돈이 더 많고 직급이 높은 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는 자신의 행위로 증명해낸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항상 증명해낸다. 다만 대부분은 그의 행위를 보기 꺼려한다. 애써 무시하며 버거워한다. 직급이 높을수록 책임감이 커진다는 안일한 생각을 간신히 받아들일 뿐이다. 쉽게 말해 '좇되 봐야 자신의 위치를 실감하자'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뭘 그리 떠들어 대는가? 무슨 거짓말이 더 필요한가! 결국 남 보다 편해보자는 거 아닌가? 그렇게 좀 더 편해보자는 행위가 모여 누군가의 몸은 급히 녹슬어간다.

책임을 진다는 말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시적인 것이다. 꾸준하게 행할 수 있는 것에 책임이 있는 것이지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에 책임이 있는 것은 정말 아니다. 순 거짓말이다. 사기꾼들의 전형성! '잘못되면 내가 책임질게', '아~ 이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거야 걱정 마' 우리는 반성할 때가 왔다. 책임이란 단어가 사기꾼들에 의하여 오염된 것은 아닌지 또한 이렇게 오염된 책임이 받아들이기 편했던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어떤 일이 잘못됐을 때 책임지고 해결해 줄 가상의 인물이 있다는 착각, 이것이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 보험을 늘리는 것에는 장기적인 돈 관리의 현명함 보다는 좀 더 편해보고자 하는 즉 나태해지고 싶다는 생각하에 이루어진다. 농사꾼이 밭에 뿌린 무가 잘 자라도록 행하는 노동, 그곳에 책임이 있는 것이지 그 무가 썩어 문드러져 농사꾼이 패가망신한 것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가 잘 자라지 못한 것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불가하다. 책임지고 패가망신하든가 책임지고 대박 나든가 따위의 생각은 농사꾼이 아니라 도박꾼의 생각에 불가하다. 책임이란 단어가 이렇게 쓰이는 것은 잘못되었다. 무가 잘 자라도록 흙 갈고, 물 뿌리고, 잡초 걷어내고, 벌레랑 사투를 벌이는 꾸준한 노동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제 먹은 우유가 상해 설사를 하더라도 꾸준하게 해야 할 노동, 그곳에 책임이 있다. 비트코인으로 한몫 챙긴 사람은 말한다. '나는 리스크를 떠안고 돈을 투자했다. 그러니 나는 이만한 돈을 받을 가치가 있다.' "그래! 그렇구나 너는 도박꾼이구나! 사기꾼이 되기 싫다면 남한테 권유하지는 마라!"

The Killing of a Sacred Deer는 두근 되는 심장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보통 영화에서 수술 장면은 생략된다. 잔인하여 굳이 보여줄 필요성을 못 느낀다. 기껏해야 살을 잘라내는 것까지만 보여준다. 영화 속 주인공인 머피(콜린 패럴)의 직업이 흉부외과의라는 설정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일까? 아니다. 의사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면접관이 볼 자기소개서 글쓰기의 천박한 원칙! '글의 시작을 자극적이게 시작해라' 같은 것일까? 오직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나는 까발려진 심장에서 책임을 봤다. 이 영화에서 똑바로 사용되는 책임은 이 장면밖에 없다. 항시적으로 두근 되며 피를 공급하는 심장이라는 이미지 이것만이 책임을 말한다. 뒤에 이어질 장면에는 앞서 언급한 오염된 책임의 이미지만이 나열된다. 그렇기에 괴기하며 동시에 엉성해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1시간까지만 섹시한 영화이다. 그 이후는 벌려버린 이야기를 엉성하게 마무리하려는 감독의 애잔한 몸짓이 이어진다. 하지만 나는 1시간 이후도 나름 흥미를 가지고 봤다. 오염된 책임의 폐해가 폭로되면서 첫 장면 즉 심장의 항시적 두근거림에 의미가 부여되는 과정에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먼저 이 영화의 섹시함을 즐겨보자. 앞서 말한 1시간은 마틴(베리 키오건)이 머피(콜린 패럴)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을 빠르게 말해주는 부분이다. 마틴은 머피에게 터무니없는 저주를 읊는다. 재밌는 점은 오직 당사자인 머피만이 마틴의 말을 터무니없다고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반면에 1시간 동안 감독의 시선을 같이한 관객에게 마틴의 말은 확고부동한 현실이다. 이렇게 관객과 영화 속 인물과의 급격한 감정의 차이가 마틴이란 캐릭터의 악함을 즐겁게 만든다. 덧붙여 베리 키오건 특유의 냉소적인 연기가 그의 말에 힘을 싣는다. 

그렇다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어떤 식으로 마틴의 터무니없는 말에 관객이 설득당하게 하는가? 우습게 들리겠지만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설득당하고 싶은 것을 설득시키면 된다. 란티모스 감독은 딱히 기발한 묘책을 쓴 것이 아니다. 관객이 기대할만한 것을 자꾸만 간지럽혔을 뿐이다. 귀에 거슬리는 음악을 깔고 카메라 워킹을 고즈넉하게 꾸민다. 이 정도의 연출만으로도 관객은 자연스럽게 공포 영화를 보며 느꼈던 감각을 살리게 된다. 1시간 동안 지속되는 란티모스 감독의 음침한 연출에 관객은 지속적으로 다가올 비극을 기다린다. 이렇게 관객은 설득당할 준비를 마친다. 다만 란티모스 감독의 대담함은 논리적 설득 그 자체를 포기한다는 점이다. 머피의 의료과실로 인해 마틴의 아버지가 사망 그리고 마틴의 복수, 이 같은 스토리에서 마틴이 머피에게 품는 악 감점이 드러나는 장면 그리고 머피가 자신의 과실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혹은 머피라는 인물의 못된 점을 부각하는 장면 등을 넣을만한데도 1시간 동안 그 같은 장면은 일절 삽입하지 않는다. 오히려 쓸데없이 몸에 있는 털, 시계, mp3 그리고 근친상간 같은 것들만 나열된다. 논리적 소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의뭉스러운 소재로만 1시간이 채워진다. 이렇게 란티모스 감독은 이성은 감각을 둔하게 만든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직 감각만 간지럽히는 전략을 택한다. 이러한 감독의 전략에 관객은 어떠한 비극이든 받아들일 각오를 다지게 된다. 감독은 자신의 관객을 만드는 것에 열중했고 성공한다. 즉 이 인간은 말이 되는 비극을 애초에 상정하지 않았다. 터무니없는 비극이 폭로되자 다시 한번 관객의 이성은 죽고 감각만 예민하게 자극된다. 참고로 나는 머피의 딸과 마틴이 산책하는 장면을 뚝뚝 끊기는 움직임으로 연출한 장면에서 감독의 천재성에 박수를 보내며 설득당했다.

이렇게 관객의 감각만 자극하는 란티모스 감독의 연출은 훌륭하지만 이런 식으로 2시간을 채울 수는 없다. 감각은 예민해질 수 있는 만큼 빨리 지친다. 마틴의 저주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 감독은 자신이 설득시킨 소재를 이용해 영화의 논리성을 채워야 할 것이다. 수용자의 감수성에 너무 많이 의지하는 것은 창작자의 나태함일 뿐이니 말이다. 아쉽게도 1시간 이후 감독의 연출은 훌륭하다 할 수 없다. 마틴에 의해 머피의 가족이 위협당한다는 것이 폭로된 이상 마틴의 행동에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함에도 단순히 불쾌감을 주는 단계에 그친다. 이에 덩달아 위기를 극복하려는 머피의 행동 역시 의미가 옅어진다. 이는 1시간에 앞으로의 영화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독은 자신의 연출에 발이 꼬인다. 결국 가족 중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선택해야 된다는 마틴의 말에 랜덤으로 뺑뺑이 돌려 총을 쏴대는 머피의 우스꽝스러움이 연출된다. 이렇게 되면 머피는 죽였음에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위기는 어물쩡 극복된다. 심지어 머피의 가족 입장에서 마틴은 다시 마주치기 싫은 존재임에도 기어코 마틴이 자주 가는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장면으로 영화를 마무리하는 패착을 보인다. 그 식당에서 감자튀김에 케첩을 뿌리는 딸내미의 행동은 민망할 정도다. 흥미를 잃은 감각에 애써 비비적 되는 꼴이니 말이다.

이렇게 란티모스 감독을 추켜올렸다 깔아뭉개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 감독은 그럴 정도로 쉬운 사람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의 테마는 책임이다. 사실상 마틴이란 존재를 섹시한 악역으로 꾸미는 것은 영화적 재미를 위한 것일 뿐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책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렇기에 애써 심장을 보여주고 엄마는 시체의 자태로 섹스를 요구하며 머피는 뺑뺑이로 총을 쏘는 것이다. 영화에서 머피의 손은 깨끗하며 고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의사라는 직업의 특수성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책임을 회피할 수밖에 없는 머피의 캐릭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할 수 있다. 그런 머피의 손이 외간 여자에게 빨림으로써 책임에 대한 문제가 던져진다.

술에 취한 머피의 의료과실인가? 마취의사의 실수였는가? 그것은 썩 중요치 않다. 감독은 사람의 생명을 책임지는 의사라는 직업 그 자체를 문제시한다. 애초에 한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머피의 잘못은 어설프게 책임감을 느껴 마틴에게 호의를 표한 것, 그것이다. 하지만 머피는 그럴 수밖에 없다. 의사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는 캐릭터이니 말이다. 머피의 아내까지 의사라는 설정에는 이 정도 이유가 있다. 또한 머피의 아들내미가 종국에 흉부외과의가 되고자 하며 그러한 아들내미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 즉 감독은 의사로서 타인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직업적 자부심을 부정한다. 총명한 의사 꿈나무를 죽이기까지 하며 의사라는 직업을 뭉개는 감독이 의사 간의 섹스를 조롱하는 건 쉽다. 부부간의 섹스를 의사가 시체를 탐하듯 연출한 것에는 의사라는 직업을 한바탕 놀려대는 감독의 심술궂은 장난일 뿐이다. 이렇게 이 영화의 큰 줄기는 애초에 책임질 수 없는 일에 책임을 표한 머피 그리고 그러한 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마틴 그 둘이 벌이는 똥꼬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봐야 뺑뺑이로 아들을 죽이는 머피가 이해된다. 그는 애초에 책임질 수 조차 없는 자이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나의 생각과 달리 감독은 책임을 져줄 누군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절대자가 존재하는 신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졌으며 기독교적 요소가 은은하게 깔리게 된다. 솔직히 말해 감독이 두근 되는 심장을 통해 일시적 책임을 조롱하는 동시에 항시적 책임을 강조했느냐에 확신이 없다. 오히려 란티모스 감독은 인간의 하찮은 책임의식을 조롱하여 절대자의 위대함을 부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슬프지만 그것이 맞는 것 같다. 어째... 진짜 슬퍼진다. 책임은 여전히 오염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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