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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Sep 01. 2021

안티크라이스트(영화)그리고 이동진

보통명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들

'악마를 연구하는 것은 삶, 성, 죽음의 혼합 상태를 연구하는 것이다' (장 - 디디에 뱅상) 안티크라이스트에 대한 이동진의 평론 글은 위의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안티크라이스트>에서 폰 트리에의 허세와 사기술을 발견하지 못했다....(생략)..... 그는 한 명의 감독으로서나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두려움의 근원을 향해 끝까지 파고 들어갔다....(생략).... 폰 트리에는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알아채고도 끝까지 응시를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게 이동진의 글은 마무리된다.

조선일보에는 교양이란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쓰레기들이 배출된다. 그 같은 글을 비판하기란 사실상 너무 쉽다. 그렇기에 비판할 엄두조차 낼 필요가 없다. 진짜 골머리를 아프게 하는 글은 앞서 소개한 이동진의 글처럼 교양과 지식이 넘실거리며 사람의 감각을 뒤흔드는... 그 같은 글을 비판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이동진의 평론은 개인과 영화 사이의 거리를 벌린다.]라는 나의 오래된 생각을 이글에서 표명할 생각이다. 결코 쉽지 않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하는 수많은 글들이 있다. 그만큼 예술은 모호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의 작품이 모호할 수는 있어도 예술 그 자체가 모호할 수는 없다. 김정현은 모호할 수 있어도 사람은 모호할 리 없다. 똘똘이는 모호할 수 있어도 개는 모호할 수가 없다. 고유명사는 충분히 모호해도 되고 혼란스러울 수 있고 두려울 수도 있으며 아름다울 수 있다. 그렇지만 보통명사는 결코 그럴 수가 없다. 보통명사는 애초에 대상을 단순히 보기 위한 용도이니 말이다. 히틀러는 유태인을 몰아내자고 외쳤지 개개인의 이름을 외치지 않았다. 박정희는 빨갱이를 색출하자 했지 개개인을 색출하자 하지 않았다. 보통명사 그 자체에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복잡함을 해설하는 행위는 사실상 유태인과 빨갱이를 이마에 뿔이 났으며 엉덩이에 꼬리가 달려있는 불을 뿜는 자들이라 생각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보통명사는 그 용도에 맞게 최대한으로 간단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예술이란 무엇인가? 보여주는 것 내보이는 것, 표출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 글의 결론을 미리 말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폰 트리에와 이동진은 개인을 단순화하는 반면 보통명사를 복잡화한다.

영화 평론계의 거장(?)을 깎아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 글을 완성시키기 위해 다소 복잡한 구성을 택해야 했음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나는 데릭 시엔프스의 블루 밸렌타인이란 영화를 언급해야 한다.


예술은 보여주는 것, 영화 역시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를 서사와 이미지의 결합이라 생각했을 때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미지가 구성된 후 그 이미지를 위해 서사가 만들어지는 것 그리고 서사에 맞춰 이미지가 활용되는 것 이렇게 2가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지와 서사 중 영화는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일까? 당연히 이미지이다. 영화에서 이미지만으로 서사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이미지 없이 서사를 진행시킬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내가 훌륭하다 하는 영화는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장면에 맞춰 서사가 구성된 경우가 많다. 안티크라이스트도 블루 발렌타인도 그런 영화이다. 하지만 한쪽은 어설픔을 보인다. 그 차이를 서술하고자 한다. 이동진은 안티크라이스트에서 허세와 사기술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렇다. 안티크라이스트는 허세도 사기술도 쓰지 않는 성의 없는 영화이다. 블루 발렌타인에서는 관객의 시선과 감정을 끌어당기기 위한 수많은 사기술들을 볼 수 있는 반면 안티크라이스트는 그 같은 노력을 일절 하지 않는다.

오직 한 장면, 같이 살아갈 앞으로의 삶에 대한 밝은 기대와 축복을 받는 결혼과 각자의 삶에 그 어떠한 기대도 표하지 않을 것과 저주 조차 허용하지 않는 이혼 그 두 극단의 영역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 블루 발렌타인은 오직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이다. 결혼과 이혼은 완벽한 반의어인 동시에 선후가 명확한 독특함을 보인다. 길다/짧다, 크다/작다, 사랑/증오, 포용/혐오 심지어 있다/없다 같은 반의어에는 선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연결이 됐을 시 특정한 효과를 부여할 순 있어도 서사를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반면 결혼/이혼 사이에는 시간이 존재하므로 연결되는 순간 서사가 자연적으로 생기게 된다. 시엔프랜스 감독은 이 독특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동시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폭죽이 터지는 길거리를 통해 결혼과 이혼을 확연하게 연결시킨다. 축복하기 위한 폭죽은 삭막한 전쟁을 상기시키니 말이다. 폭죽을 터트리는 이들의 쾌활한 발걸음은 보여주지만 밤하늘을 밝게 빛내는 불빛은 보여주지 않는다. 이렇게 아름다우며 처참함을 불러일으키는 기묘함을 감독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이 3분도 안 되는 장면에서 2시간짜리의 서사가 만들어진다. 허세와 사기술은 여기서 만들어진다. 사실 블루 발렌타인은 3분짜리 영화로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3분을 더욱 극적으로 더욱 아름답게 더욱 처참하게 만들기 위해 1시간 57분이 만들어진다. 3분을 꾸미기 위한 치밀한 사기와 사실 썩 중요치 않은 1시간 57분을 관객에게 재밌게 선사할 수 있다는 허세가 가득 찬 작품, 그것이 블루 발렌타인이다.


 시엔프랜스 감독의 허세는 훌륭했으며 그의 사기에 나는 매료되었다. 딘(라이언 고슬링)은 아이가 생기고 아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빠가 먼저 된다. 신디(미셀 윌리엄스)는 이별 후 만남이 진행되지 않고 만남 이후 이별이 진행된다. 섹스가 하고 싶어 모텔에 가는 것이 아니라 모텔에 갔기에 섹스를 할 수밖에 없다. 미래방에서 과거가 들춰진다. 춤이 춰지고 노래가 만들어진다. 선후가 마구잡이로 뒤집히는 서사에 결혼과 이혼만이 선후가 명확함을 과시한다. 이렇게 결혼제도의 인위성은 비판받는다. 명랑한 소녀가 애타게 찾는 개는 영화의 갈등을 꾸며주기 위해 죽는다. 남녀의 아름다운 만남에 음침한 죽음을 내포하기 위해 늙은 두 노인은 과거를 회상하며 쓸쓸히 죽는다. 아름다운 미래를 약속한 딘을 보여준 감독은 곧바로 딘을 피떡이 되도록 맞게 만든다. 말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며 철장 위로 올라가는 딘은 로맨틱한 남자인 동시에 자학성과 폭력성을 띄는 남자라는 찜찜함을 보인다. 이렇게 1시간 57분은 아름다움과 처참함이 번갈아가며 채워진다. 이것이 허세와 사기술이다. 3분 안에 포함된 것을 기어이 2시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영화감독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보여주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만을 어설프게 어필할 뿐이다. 그렇다면 폰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를 통해 무슨 장면을 보여주고 싶은 건가? 모든 이들이 예상했듯 폰 트리에는 여성이 자신의 음핵을 잘라내는 장면을 보이고 싶어 한다. 안티크라이스트의 서사는 아기의 추락사가 아니라 음핵을 잘라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녀의 자학적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인가? 이 같은 물음은 이동진의 평론에서 명쾌하게 해설되어 있다. 여성의 주체성, 쾌락에 대한 부정, 삶과 죽음에 대한 파괴 행위, 기독교 사상 하의 여성에 대한 위치를 전복시키는 행위 등 그리고 이동진은 앞서 말한 의미와 함께 한 가지를 대표로 앞세운다. '실존의 증거로서의 고통' 이동진의 의견은 충분히 설득이 간다. 나 역시 안티크라이스트를 그 정도의 영화라 생각한다. 허나 이것은 그녀(샤를로뜨 갱스부르)의 행위를 하나의 행위 예술로 간주할 때나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 여자가 자신의 음핵을 잘라내는 행위가 폰 트리에게는 행위예술로 이동진에게는 실존의 증거로 보통 명사화된다.

이 같은 역겨운 치환에는 블루 발렌타인에는 있던 허세와 사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폰 트리에는 그녀의 행위를 관객에게 설득시키는데 실패한다. 어쩌면 폰 트리에는 설득시킬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2분을 보여주기 위한 1시간 58분 동안 그녀는 없으니 말이다. 그녀는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여성이 되고 환자가 되고 악마가 되었을 뿐 그녀 자신은 되지 않는다. 설득은 모호한 것을 지정하고 복잡한 것을 설명하고 아름다움으로 매혹하는 과정이다. 이 같은 과정을 보통명사로만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필히 고유 명사가 있어야 한다. 설득을 하기 위한 허세와 사기술에는 보통명사를 고유명사로 바꾸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또한 있는 것이다. 나는! 나는! 나는 레즈비언입니다. 나는 가난합니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나는! 이 '나는'이 있어야 설득이 되는 것이다. 성소수자가 나일수 없고 부자가 나일수는 없다. 하지만 폰 트리에는 그녀에게 여성, 환자, 악마를 집요하게 덧 씌운다. 그 결과 영화 속 주인공들이 어떤 보통명사로서의 대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을 제외한 타인들을 모자이크화 하는 짓까지 저지른다. 폰 트리에는 이렇게 보통명사를 나열한 뒤 이것들을 복잡화하기 시작한다. 이동진은 이러한 폰 트리에의 행위를 응원하며 상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글을 적는다. 이동진은 폰 트리에가 분출시키는 보통명사들을 수집하고 나열하여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같은 행위는 빨갱이가 뿔이 났다 하는 행위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빨갱이가 혹은 조센진이 개인으로 즉 고유명사로 보이지 않고 보통명사로만 보일 때 인간성이 결여된 잔인한 행위가 행해지듯 폰 트리에는 스스로 음핵을 잘라내는 비 인간적 장면을 만든 것이다. 이동진이 그녀의 고통을 실존의 증거라며 폰 트리에를 응원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행해진다.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알아채고도 끝까지 응시를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아니다! 그녀의 고통을 행위예술로, 실존의 증거로 그대들이 봤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고통으로 느꼈다면 그대들은 이렇게 괴물 같은 짓을 뻔뻔히 저지르며 나불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악마를 연구하는 것은 삶, 성, 죽음의 혼합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무슨 중2도 부끄러워할 말을 뻔뻔히 하는가. 단순화, 보통명사, 상징들을 연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복잡하게 만드는 행위에서 악마는 탕생 하는 것이다.

이동진은 이렇게 또 한 번 영화를 개인에게서 떼어내 상징으로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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