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대통령이었던 시절 김한길이 민주당 대표였던 시절 세월호는 침몰했다. 그 당시 나의 출근길은 한강 다리를 지나쳤다. 그 한강 다리 아래서 하반신을 물에 잠그고는 세상에 대한 욕을 퍼붓던 여인을 보게 되었다. 그 여인이 세월호 침몰과 관련해 욕을 퍼부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애초에 누군가 듣기를 바래 외친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발음은 얽혀있고 어순은 뒤죽박죽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행위는 나를 상쾌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세월호 침몰 후 벌어지는 일련의 행위에 나는 미친 듯이 답답했다. 시위를 나가 촛불을 같이 들었음에도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답답함을 느꼈다. 경찰들이 정해준 마지노선 까지만의 행렬이었으니 시위 도중 생긴 쓰레기를 줍자며 참담하게 허리를 굽혔던 시위였으니 분에 못 이겨 구호 중간에 쌍욕을 외치는 이들을 경멸하는 시위였으니.... 국가가 선전한 가치 아래 지켜진 질서가 무너져 화가 나 모인 사람들이 또 다른 질서 아래 정렬 되어 간다. 그 또 다른 질서가 하찮게 보였던 것에는 공포감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시위에 참가하는 정치적 행위가 죽은 이들을 이용하는 정치적 행위로 보여지지나 않을까? 새로운 질서를, 새로운 가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혼돈이 무서워 기존의 질서를 부여잡는다. 결국 언제나 시위는 3개월쯤 지나면 경제적 손실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그것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짐짓 신사, 숙녀 태세를 되찾는다. 당신을 잊지 않으면 큰 슬픔에 살 수 없으니 양해를 구하는 행위인 추모식에서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따위의 구호가 외쳐진다. 그렇게 세월호 침몰은 4/16일이 되면 몇몇 곳에 플렌카드가 걸리고 '아... 그렇지 그런 사고가 있었더랬지' 하며 아픈 기억 생채기 살짝 내본다. 한강 다리 아래 분노를 표출하던 여인, 그 여인이 혹여 발걸음을 더 깊이 내딛지 않을까 싶어 그녀의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담배 세 개비쯤 필 때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물밖을 나왔다. 그렇게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서로 목례를 했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당당한 발걸음에 나는 살랑거렸고 상쾌해졌다. 상병 시절 테레비로 박근혜 탄핵 소식을 접했다. 박근혜가 탄핵된 것에는 정유라 부정입학 때문이라는 건 참으로 좇같은 현실이다.
세월호 침몰 이후 변한 게 없는 건 아니다. 유가족, 시민단체, 정치인들의 노력하에 세월호 3 법, 범죄 수익 은닉 규제 및 처벌법이 제정되었다. 국가 재난 시스템 역시 재정비되어 실제로 그 효과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 사회는 아픔을 이겨내고 진보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젠틀함이, 더욱 촘촘해지고 복잡해지는 법망이 수많은 울분을 얼마큼 말살했는지에 대한 고찰은 시대에 뒤떨어진 망상이 되었다.
박화영이란 영화가 논란작이 되고 관객에게 불편함을 자아내는 것에는 영화 속 인물들이 어설프고 맥락 없는 욕설을 퍼붓기 때문? 페트병에 지저분하게 쌓인 꽁초가 보여주듯 무작정 펴지는 담배 때문? 아낌이 배제된 섹스 행위 때문? 어떻게 보여줄까라는 고민을 배제하고 폭로 형식을 취한 카메라 구도 때문? 물론 그 때문에 불편하다. 허나 그것은 시각적 차원에서의 불편함일 뿐이다. 영화의 이미지 노출 측면에서 생각해봤을 때 시각적 불편함은 오히려 돈이 된다. 사람을 끌어모은다. 불편함보단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밝은 미래에 대한 정신병적 집착이 강한 현시대에서 미래 사이클에서 벗어난 미성년자들을 보여주는 것은 확실히 이목을 끌만하다. 이 같은 전략은 나에게 불편함보다 한심하다 느껴진다. 어떻게 보여줄까라는 고민하에 이루어지는 감독의 선택이, 노력이 결여된 것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난 후 불편함이 나에게 남게 되었다. 방을 이쁘게 꾸미기 위해 쿠팡에서 5만 원짜리 의자를 샀다.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을 뜯고 앉았을 때 편안함을 줘야 할 의자가 디자인에 신경 쓴 만큼 허리에 무리를 줄 때 불편함은 찾아온다. 어렴풋이 예상했던 것 그렇지만 현실로 마주하기 싫었던 것이 직시될 때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애써 이쁘기는 하네 하며 외면의 기간이 길수록 허리는 망가져 갈 것이다. 미성년자들의 이야기라는 점과 더불어 주변 시선에 의해 정체성을 정립해나가는 것의 폐해를 다뤘다는 점에서 이환 감독이 선택한 소재는 젊다. 덧붙여 이환 감독이 선택한 표현방식 즉 천박함을 신경 쓰지 않는 보여주기 역시 젊다. 이점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터부시 되는 것, 금기시되었던 것에 대한 반항으로 쿨함에 대한 가치가 긍정되었다. 음지화 되었던 것에 대한 포용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그 쿨함이 일배를 거쳐 천박하게 되었다. 소개팅 자리에서 앞으로 섹스하는 것이 좋으냐 뒤로 박히는 것이 좋냐는 질문을 던진다. 또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하는 게 더 야해서 좋다 말해야 쿨한 게 되었다. DJ가 선별한 비트에 흐느적거리며 즐기는 것이 좋다 말하는 이는 음흉한 사람이 되고 섹시한 여자 하나 꼬셔 따먹으려고 클럽 간다는 이가 쿨하게 되었다. 배려 차원에서 보이게 되는 우물쭈물함에 자신감이 결여되었다 말한다. 못된 일을 해도 당당하게 하는 것이 더 매력적이라 한다. 이 같은 흐름에 분별력이 모자란 것들이 내로남불을 사자성어로 만든다. 이제 슬슬 직시할 때가 되었다. 쿨한 것에 대한 천박함을,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투쟁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하는 것 역시 쿨함이란 것을
참고로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영화 비평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박화영이란 영화가 비평할 것이 풍부한 영화는 아니다. 관객에게 던져주는 이미지에 대한 참신함은 있지만 연출면에서는 한국형 아침드라마와 큰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니 말이다. 한 여인의 걸음걸이를 카메라에 담을 때 감독 본인의 의도가 담겨있는 디테일한 영화가 있는 반면 박화영의 카메라는 보여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 같은 영화에서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던져진 이미지를 내 식으로 소화할 뿐이다. 화난 표정, 슬픈 표정, 고통스러운 표정 등 얼굴의 급격한 변화에 어김없이 클로즈업을 하는 이환 감독의 의도 역시 감독 본인이 소화한 음식을 내보이는 것이 아닌 관객에게 소화해보라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내 방식으로 소화한 박화영으로 돌아가 보자.
살아가는 의미가 행복을 위해서라는 가치가 대다수에게 긍정되고 있다. 부국강병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살아왔던 시대에 비해 확실히 더 건강해졌다. 문제는 행복의 기준을 개인이 정해야 한다는 당연한 흐름이 자본주의 시대 아래 무시된다. 개인의 선택이 강제되어 행복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보다 편한 것으로 정의된다. 자신보다 부유하며 여유로운 사람들의 삶을 볼 때면 우울하다가도 월 200도 못 버는 이들의 인생이나 정상 범주의 가정을 꾸릴 힘이 없는 이들을 볼 때 세상 살만하다며 행복을 긍정한다. 소셜 네트워크는 이 같은 행복론을 더욱 들뜨게 만든다. 결국 '이쯤 하면 행복한 거지'가 현시대를 정의하는 문구가 돼버린다. 각자가 가진 행복이 노출되고 동시에 비교당한다. 비교당하고 비교하는 행위엔 스트레스가 동반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도태될 거라는 불안감에 멈추지 못한다. 이렇게 허영심에 스트레스를 동반하고 스트레스 해소법 따위를 갈구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시중에 팔리는 스트레스 해소법은 역시 돈지랄이다. 그 돈지랄을 할 수 없는 이들은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그렇게 인간관계론, 심리학, 성격유형 등의 잡것들이 활개 치게 된다. 심리학의 역사는 빈부격차에서 시작된다는 말은 정말이지 상쾌한 명언이다. 이 같은 흐름에서 쿨함이 변질된다. 쿨함을 좀만 풀어서 써보면 귀찮으니 꺼지세요 정도가 될 것이다. 변질되었다 말하는 것에는 무엇이 귀찮아졌는지 그 대상이 바뀌었음을 말한다. 기존의 질서와 법 혹은 관습에 왜?라고 반문할 때 논리적으로 이것저것 끄집어 떠들어 댈 수도 있겠지만 쿨한 것들이 그 같은 귀찮은 짓을 할리 없다. 그저 감각적으로 반항해보는 것이다. 그 반항에 가시적 행위들이 동반된다. 무식하고 교양 없다 할 수 있지만 그 무식에서 새로운 가치가 표출된다. 그랬던 쿨함이 그저 천박해진 것에는 인간의 감정을 귀찮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감각적 반항에는 솟구쳐 오르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 넘실대는 감정을 어떻게 표출할까에 대한 고민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쿨함은 생각보다 아니 확실히 세상 편한 가치가 아니었다.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느껴지는 좌절감, 비루함, 두려움 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무언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 같은 고민하에 행해지는 행동력에 스타일이 생겨난다. 개개인의 감정이 다른만큼 개개인의 스타일 즉 개성이 발현된다. 그랬던 쿨함이 편함을 추구하는 행복론에 동화되어 감정을 귀찮아하게 돼버렸다. 담배 한 개비 필 때 환희, 우울, 고독 등의 감정을 캐치하기 위한 노력이 박화영에선 볼 수 없다. 시기, 질투, 열등감이 비싼 신발 하나로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폭력을 행하는 데 있어 묻어나는 여러 비굴한 감정들은 배제되고 오직 상대의 결핍을 재미지게 골려주는 것에 집중한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솔직함이 아닌 추함이 되고 자신의 감정을 무시할 때 행할 수 있는 비인간성이 솔직함이 된다. 상대의 감정에 얼마큼 무신경할 수 있는가가 용기의 척도가 된다. 이러한 이미지를 나열하는 이환 감독의 젊은 감각이 현시대를 날카롭게 폭로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주인공인 박화영이 가진 개성은 어떤 지점에서 현시대를 폭로하는지 생각해 볼만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것에서 개성이 시작됨을 나는 건강하게 생각한다. 그럼 감정을 귀찮아하는 쿨함에 개성은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변질된 쿨함에도 남들과는 다르다며 으스되는 이들이 있다. 박화영은 가출 소녀들에게 자신을 엄마라 부르라 하고 습관적으로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 말한다. 몇몇 이들은 그 같은 박화영의 행동을 보고 자신의 효용성을 느끼기 위한 행위라 한다. 나는 다르게 느껴졌다. 박화영은 자신의 효용성보다는 주변의 시선을 더 갈구한다. 박화영이 엄마라 불리거나 박화영 본인이 엄마라 부르라며 강요하는 장면에는 박화영의 쓰임새보다는 그녀의 한심함이 폭로된다. 쉽게 말해 광대짓에 불과하다. 외적인 매력이 낮은 박화영은 주변의 시선을 끌기 위해 엄마라는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불쌍하게도 자신이 만든 캐릭터와 실제 본인을 혼돈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내적 행위에 대한 거부감은 결국 외적인 것에 대한 집중으로 이어진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양이 개성의 강도를 결정한다. 이것이 기믹이 판치는 현시대를 만든다. 자신의 강점에 솔직해지는 것이 힘든 것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 역시 힘들다. 정립했던 정체성, 그 정체성은 쉽사리 변하면 안 되는 것임에도 사람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도 그 정체성이 무너지는 것도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다. 그렇기에 편한 삶이 최고의 가치가 된 시대에 정체성보단 잠깐 쓰다 버릴 캐릭터가 더 각광받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발 쓴 박화영이 가발을 벗으며 광대 웃음을 짓는 것으로 끝이 난다. 가발 쓴 박화영도 벗은 박화영도 둘 다 캐릭터일 뿐이다. 쿨함이 변질되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이환 감독 덕분에 직시되었다. 나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슬프게도 불편한 진실 하나 더 받아들여야 할거 같다. 유가족들의 단식 투쟁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한 것이 쿨함이었다는 것을 국가의 무능함에 분노를 표출하는 시위가 외적 이미지를 신경 쓰며 쓰레기를 줍는 것 역시 쿨한 것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