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여름, 아침 6시쯤 핸드폰 벨소리가 나의 잠을 깨웠다. 평소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지만 그날은 예외였다. 마치 그날 중요한 사실을 꼭 알아야 할 것을 예견한 듯이 말이다. 화면을 보니 가장 친한 친구 두섭이로부터의 전화여서 기쁜 마음 반 의아한 마음 반으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는 두섭이가 아닌 두섭이 누나의 흐느끼는 목소리를 대신 듣게 되었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순간이다.
두섭이와 나는 중학교서부터 친구였다. 희한하게도 고등학교 때는 서로 연락이 없었다가 대학교 때 다시 만나게 되어 친해졌다. 두섭이는 키도 크고 잘생겨서 방송에도 여러 번 나가고 대학을 졸업하고는 캐빈 크루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항상 밝고 재밌어서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두섭이는 나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두섭이에게서 많은 것을 느꼈다. 한번은 두섭이가 서울 자취하는 집을 놀러 갔는데 너무 열심히 사는 모습에 감동받아서 대전에 내려가자마자 알바를 구했던 기억이 난다.
2020년은 코로나가 시작되던 해이다. 공교롭게도 우리 둘 다 재학중이였고 학교의 비대면강의로 인해 같은 동네의 독서실을 매일 같이 갔다. 나는 학교 수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 블로그 활동을 했었고 두섭이는 캐빈 크루 준비를 위해 중국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항상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장난을 계속 쳤는데 떠나기 전 마지막 날 밤까지도 자신이 나가는 전공 공모전 파일을 보내주면서 나에게 검토를 봐달라고 때를 썼다.
나는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두섭이의 부모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는 철든 사람이 되려던 이유는 아니었다. 다만, 내 친구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었다. 당장 핸드폰을 열면 자기는 오늘 독서실 늦는다면서 못간다는 카톡이 와있을 것 같았다. 당장 내일이라도 동네 음식점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메뉴를 고를 것 같았다. 같이 산책을 하면서 미래에는 뭐 하고 있을지 얘기하는 순간이 영원히 다시 올것 같았다.
나는 의아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왜 이 두명 중에서 내 친구를 골랐을까? 나는 아직도 답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의 나는 나 혼자만의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다.
하루키의 소설에는 주인공이 기즈키의 죽음을 겪고 이러한 말을 한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저쪽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을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삶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타인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한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해당될지는 정작 제 3자의 시선으로 외면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확정 사실 2가지는 탄생 이후 죽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두섭이가 있는 분향소를 찾는다. 두섭이의 칸에는 유골함과 자주 차던 시계가 놓여있다. 거기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복도에 서서 두섭이와의 행복한 기억을 회자하는 것 뿐이다.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다른 세계에서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