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러브충.
그 애를 만나는 짧은 시간에는 난 꽤나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라고 말하기엔 못내 낮간지러워서 그 애, 라고 부른다.
그 애를 처음 본 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 밝음이 불편했다. 성격의 밝음이라던가,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옷차림이라던가, 똑똑해 보이면서 묘하게 천진한 구석이 있는 것이라던가, 모든 것이 내 맘을 불편하게 했다. 그 불편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기와 질투와 열등감이었을 것이다.
나는 달랐다. 나는 노는 걸 좋아했지만 밝지는 않았다. 밝다는 건 거리낌 없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일 텐데, 나는 웃을 때마다 걸리는 게 많았다. 혼자 있으면 정신이 나갈 것 같으니까 미친듯이 놀러다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랑받고 자랐느냐 하면, 어느 시점까지는 꽤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 시점부터는 아니었다. 가족이나 친척들과 왕래 없이 혼자 산 지도 꽤 오래되었고.
그러니까, 혼자 있어도 그 울타리의 온기같은 게 느껴지는 그 애가 부러웠다. 그러자 내 못된 심보가 그 애를 괴롭히고 싶어 하기 시작했다. 못되게 굴고, 피 말리게 괴롭혀서 울리고, 마냥 밝지는 못하게 만들어버리자. 나와 같은 곳으로 끌어내리자. 나는 내가 그렇게 못되게 굴지 못하게 그 애와 거리를 둬야 했다. 나는 못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지만, 멋진 교육을 받은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삶을 살았다. 나의 삶이란, 별 것 없었다. 금방이라도 요절할 천재처럼 굴며 내일은 없다는 투로 살았다. 좋을 때는 배낭 하나만 들고 빈 지갑으로 여행을 떠나는 청춘이었고, 나쁠 때는 뉴스에 나오는 문제 있는 요즘 젊은이였고. 나는 양아치같은 (무책임하고, 생각 없고, 나만 재밌으면 되는 걸 나는 그렇게 부른다)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했다. 그리고 엄격한 쾌락주의자인 나는 양아치같은 삶에 재능마저 있었다.
그러다가 그 애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이상했다. 아주 서서히 몇 년동안, 그 애의 친구지만 내심 불편해하는 사이로, 조금은 거리를 두면서 점점 나는 그 애에게 젖어들었다. 내가 충분히 물기를 머금자 그 애가 어느 날 홍수처럼, 정말 더 이상의 맥락도 없이, 나에게 쏟아졌다. 수없는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잠들었다가도 쉽게 깨었다.
이제는 그 애에게 달려가는 마음을 억지로 붙잡아야 했다. 나는 분명히 그 애에게 어울리지 않음으로. 내 열등감은 나에게 그렇게 매일 속삭였다. 너는 항상 네 것이 될 수 없는 걸 금방 알아채고, 그걸 원하지 않냐고. 이번에도 그런 열등감의 발로라고. 네 안에서 새어나오는 그 모든 것들 중에 그 애한테 자신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냐고.
그래서, 나는 수없는 고민 끝에 비참한 마음으로 그 마음을 닫았다. 닫았는데, 그 마음이란 게 젊은 나이라는 물길을 타고 거세게 내려오니, 닫았던 문이 박살이 나버렸다. 나는 백팔십 도 변했다. 내 속에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피워내기 위해, 그래서 그 애의 곁에 대등하게 서기 위해, 태어나 처음으로 노력이란 것을 했다. 말투부터 몸짓까지 바뀌었다. 삶의 패턴도. 나는 진심으로 친절해졌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했고, 진심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드디어, 꽤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실수가 있었다면 모든 것이 그 애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는 나로서 좋은사람이었어야 했는데. 그 애의 부재에, 나는 그 모든 노력의 방향을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몸에 새로운 방식이 배어버렸다. 그렇다고 계속 노력을 할 이유도 없었다. 더 좋은 나를 줄 사람이 없으므로. 내 속에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면, 전부 너 때문이었으니까. 나는 그래서 오래 고장나 있었다. 집 앞 골목에서도 길을 잃어 헤메곤 했다.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오래 보고 있었다. 걷다가 속이 답답해 달리다가 오래 가지도 못하고 해가 질 때까지 주저앉아 있기도 했다.
어설프게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