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모래 Jul 06. 2023

관계의 톨

톨게이트의 그 톨 말이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유료 도로를 달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느 시점까지는, 그러니까 이게 진짜 '관계'가 되기 전까지는 그 도로를 달리는 건 무료다. 금방 다시 빠져나가는 출구(Exit)도 있다. 유턴 표지판도 보인다. 누구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무료도로. 그리고 그 무료도로에서 더 깊게 들어가려면 톨을 내야 한다.


톨이 뭐냐 하면, 어원의 뜻은 세금이 되겠다. 통행료라는 뜻이다. 어디서 얼만큼을 갈 때 꼭 내야하는 세금. 다행스럽게도 관계의 톨도 그저 톨일 뿐이라, 요금이 굉장하지는 않다. 나는 운전을 아버지에게 배웠는데, 톨비며 주차비를 아까워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톨비도, 주차비도 못 낼 지경이면 차를 사지 말라고 말했다. 적게는 몇백 원. 많게는 몇천 원. 그런데 장거리 운전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고작 그 정도의 돈이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톨비는 딱 그 만큼의 비용이다. 신경쓰일 정도, 그렇다고 그걸 냈다고 힘들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돈.


관계에도 톨을 내야 한다.


다행히 그 관계의 톨 역시도 그렇게 엄청난 비용은 아니다. 그 사람의 안부를 묻는 것,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웃는 것, 힘든 일이 있을 때 곁을 지키는 것. 그런 간단한 것들이다. 톨의 종류가 많아서 그렇지, 모두 하이패스처럼 그 길을 걸을 때면 자동으로 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어떤 톨은 쉽고, 어떤 톨은 어렵다.


잘 잤느냐는 인사.

오늘 너의 하루는 평안한지 묻는 것.

밥은 먹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괜히 궁금한 것.

부러 시간을 내어 잠깐 만나는 것.

네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해보는 것.

네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아보려는 것.

좋아한다, 고맙다, 보고싶다, 미안하다는 말.


아마 이런 게 열두 개쯤은 더 있겠지만 그런, 당연한 것들이다. 말하다보니 연인처럼 되었지만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고, 친구라고 다르지 않다. 이 관계의 톨을 내지 않고 무료도로만을 오가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아는 사람'인 것이고, '나랑 진짜 친하다'고 해도 사실은 돌아서면 남인 사람들인 것이다. 당연한 톨을 내는 게 쉽다는 건 아니다. 그건,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고, 피곤한 일이다. 그런데 관계란 거, 그런 거 아닌가? 혼자 있는 것보다는 조금 불편하고 피곤한 것. 그러나 그 비용을 감수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는 봐주겠지만, 결국에는 밀린 톨을 모두 내던지, 최소한 그 길에서는 쫓겨나게 된다.


톨을 거의 내지 않아도 되는 길도 있다. 톨은 보통 도로의 유지에 쓰이니까, 톨을 거의 내지 않아도 되는 길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게 유지가 되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의 관계이던가, 아니면 누군가가 베푸는 자선같은 은 관계일 것이다. 그런 걸로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대개 좋은 길을 가려면 꾸준히 톨을 내야 한다.


이런 당연한 말을 왜 하냐면, 이 다양성의 시대가 열린 탓인지, 톨을 내지 않아도 좋다고 믿는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관계의 톨을 내지 않는 것이 '틀림'이 아닌 '다름'이라고. 그리고 톨을 내지 않아도 되었던 관계들을 열거하며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모르는 것이다. 톨이란 것을 내지 않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고, 톨을 내지 않아도 되었던 관계에서는 다른 사람이 몇 배의 추징금을 지불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걸.


나는 아주 일찍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살았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복잡한 가정사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톨을 거의 내지 않았다. 안부도, 어떤 말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그냥 가족이 없는 것처럼 살고,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도 나를 가족이 없는 사람처럼 보곤 했었다. 나이가 좀 더 들어서야 알게 된 것은 내가 내지 않는 그 감정의 톨을 우리 어머니가 몇 배로 대신 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애정으로, 그리움으로, 미안함으로. 그런 것들로. 그럼에도 가족에게 톨을 여전히 제대로 내지 못하는 나도 있고.


돌아오지 않는 안부.

내가 궁금하지 않은 것.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이 귀찮은 것.

나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것.

좋아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보고싶다 말하지 않는 것.


업보를 돌려받는지, 이제는 내가 그런 걸 한다. 나는 정이 많고, 애정이 많아서 그렇다. 관계의 톨을 내지 않으면서, 나와의 관계는 유지하려는 사람. 그리고 그런 마음인 걸 알면서도 그냥 그 톨을 대신 내는 나. 나는 기꺼이 그 톨을 대신 낼 마음이 있어 그렇게 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다 자라지 못한 어른이어서 대신 내 줄 수 있는 비용이 많지 않은 가난뱅이어서 결국에는 줄 수 있는 마음이 다 없어질까봐, 쓸데없이 비싼 감정의 추징금으로 남은 건 상처만 남은 파과같은 내 속일까봐 고민한다. 모두가 자기 몫을 잘 치르는 세상이면 좋으련만, 여기 저기에 진 빚과 준 빚 투성이다.

작가의 이전글 호모 로맨티쿠스 (멸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