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같겠지만, 이쪽이 진짜다.
얼마 전 친구가 동남아 어느 나라로 여행을 다녀왔다. 패키지 가이드를 끼고 갔는데, 가이드가 소개해 준 곳에서 5봉지에 8만 8천원을 내고 말린 바나나를 샀단다. 동남아 물가가 예전같지 않네 뭐네 해도 한국보다 두 배나 되는 가격을 내고 말린 바나나따위를 사다니. 필리핀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짓이다.
벌써 옛날 얘기라 필리핀도 많이 달라졌겠지만 바나나 한 개에 어떤 품종이든 한국 돈으로 백원 이상을 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말린 바나나, 바나나칩은 다르다. 이건 그냥 바나나보다 품이 들어가는 일이다. 더군다나 바나나칩은 판매처도 다르다. 그냥 바나나는 시장의 바나나 가게에서 사면 된다. 과일 가게도 아니라, 바나나 가게다. 각기 다른 품종의 바나나를 쌓아두고 킬로그램 단위로 바나나를 떼어 파는 바나나 가게에서 사면 된다.
바나나칩은 주로 기념품상점이나, 잼과 말린 망고 등을 파는 가게에서 판다. 그래서 그런지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심지어 패키징에 따라서도 가격이 꽤 다른 편이다. 척 봐도 한국에 가져가서 소분하지 않고 그대로 선물로 줘도 될 것 같은 물건들은 백화점 매장이나 가격이 비슷하다. 그에 비해 좀 더 싼 건 못생기고 맛도 조금 들쭉날쭉하지만, 가격은 반값 수준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아무나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딱 두 번, 말도 안 되는 바나나칩의 비밀을 직접 본 적이 있다. 바나나칩은, 한국에서 "진짜 좋은 고춧가루"나 "제대로 된 참기름"이 알음알음으로 몰래 거래되는 것처럼 은밀하게 거래된다.
어느 날이었다. 필리핀 동네 시장을 돌아다니던 나를 동네 현지인 아저씨가 슬쩍 불렀다. 우리는 어느 사이냐면, 서로 얼굴은 잘 알지만 이름은 모르고, 눈이 마주치면 인사정도는 하는 그런 사이였다. 서로를 꼬레아노, 삘리삐노로 부르는 그런 사이. 딱히 뭘 같이 한 적은 없지만 한 동네에 몇년 쯤 살면서 옅은 유대감이 켜켜이 쌓인 사이. 아저씨는 내게 너 바나나 말린 걸 좋아해? 라고 물었다.
정말 뜬금 없는 질문이었기에 약간 망설이며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아저씨는 기묘하게 비밀스러운 몸짓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명 내게 따라오라는 투였기에 그 뒤를 따라가는 내내 아저씨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저씨는 한국인들도 종종 보이는 시장에서 더 깊은 안쪽 시장으로 들어갔다. 보통 블랙마켓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이름이 블랙마켓이어서 그렇지 사실 식료품점 겸 사설환전소인 가게들이 모인 곳이었다. 이쯤 되면 여기 오는 한국인들은 이 동네에 십년쯤 산 고인물들이거나 조금이라도 나은 환율로 환전을 하려는 사장님들 뿐이고, 그나마도 잘 보이지 않는다.
아저씨는 그 블랙마켓에서도 내가 처음 보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니, 사실 그 틈바구니를 골목이라고 부르는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 틈바구니 안쪽으로 들어가니 이제는 시장이라고 하기도 곤란한, 판잣집이 가득한 동네가 나왔다. 그 쯤에서 나는 내가 여기서 오늘 죽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아저씨는 그런 내 고민과는 별개로 나를 재촉해 어느 집 앞에 멈춰섰다.
왠지 머리에 천을 두른 젊은 아주머니가 문 안쪽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이 장면은 정말 기묘한 장면이었는데, 중동도 아니고 그렇게 큰 천을 머리에 두른 사람을 필리핀에서 본 적이 없다. 아주머니는 약간 수줍은 듯이 나를 보았는데 이 집에 외국인이 오는 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겠다 싶었다.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하시는 듯 싶었다. 아저씨는 아주머니와 뭔가 둘이 잠깐 숙덕였다. 아저씨는 아주머니가 자기 친척이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보여준 집 안에는 커다란 비닐 포대와 플라스틱 소쿠리들에 담긴 바나나칩들이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앞서 말한 백화점 급 바나나칩과 그 아랫단계의 일반포장 바나나칩의 원료가 되는 '비닐봉다리에 담긴 바나나칩'이 제조되는 가내수공업 공장이었던 것이다. 비닐 봉지가 아니라 봉다리가 맞다. 바람이 세게 불면 찢어질 것 같은 초박형 빨간색 흰색 줄무늬 비닐봉다리에 아주머니는 바나나칩을 정말 바가지로 퍼 담아주었고 나는 그걸 상상하지도 못한 가격에 사 들고 왔다. 돌아오는 내내 나는 마을의 비밀을 발견한 충격과, 이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은 감각에 전율했다.
(주의: 동남아 여행을 가서 저렇게까지 은밀한 곳에 혼자 가는 걸 절대 추천하지 않음. 나는 저 동네에서 중고등학교가 )
다음으로 비밀의 바나나칩을 받게 된 건 의료봉사를 가서였다. 의료봉사를 가면 현지에 있는 교회나 마을 회관, 체육관 따위에 센터를 설치하게 되는데 그 곳에는 90%의 확률로 할머니가 한 분 앉아 계신다.
한국에서 온 특별공연팀이 앞에서 북을 치고 노래를 불러도, 태권도 시범단이 부순 송판이 발 앞에 떨어져도, 옆에서 갑자기 응급수술이 시작되도,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아주 작고 조용한, 칠십에서 백 살 사이의 어떤 나이의 할머니. 그 할머니는 기묘한 소환술을 쓸 수 있는데, 분명 할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저 멀리서 수다를 떨던 아주머니나 콧수염 아저씨가 할머니의 텔레파시같은 것을 받고 할머니에게 찾아온다. 그 아주머니나 콧수염 아저씨는 높은 확률로 마을의 트레져러(회계?)나 서기 같은 것을 맡고 있고 의료봉사팀과도 긴밀하게 일하는, 발 넓은 동네 대장이다.
동네 대장 아주머니 혹은 콧수염아저씨는 할머니에게 몸을 기울여 뭔가를 듣는다. 이쪽에서 볼때는 할머니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하여튼 뭔가를 듣고 대답을 한다. 오뽀, 예스 마낭, 오오 맘, 이런 대답 소리가 들려오는데 모두 네, 그럴게요, 그런 말들이지만 여전히 할머니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 할머니의 지령이 모두 전달되면 동네 대장 콧수염 아주머니는 내게 와서 잠깐 자기를 따라가자고 손을 잡아끈다. 나 일 해야 한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그러면 다시 블랙마켓과 같은 패턴이 벌어진다. 마을 안으로 꽤 깊게 들어가면 (대신 이 때는 훨씬 넓고 밝은 마을이고 의료봉사를 온 터라 무섭지는 않다.) 또 웬 집이 있고, 그 집을 열고 들어가면 누군가 소쿠리에 넓게 바나나를 펴놓고 있다. 그러면 동네 대장 아주머니가 또 뭔가를 그 동네 말로 한참을 얘기한다. 그러면 커다랗고 두꺼운 비닐 봉지에, 왜 오래된 호프집에서 뻥튀기 담아놓는 것 같은 그 두꺼운 투명 비닐 봉지에, 담겨 있는 바나나칩 하나가 통으로 내게 주어진다. 이 때의 바나나칩은 공짜이다. 이렇게 공짜로 바나나칩을 받아와 보고하면 의료봉사팀 리더들은 의료봉사가 끝나면 동네 아주머니를 설득해 바나나칩을 또 사갔다. 이미 받은 호의는 호의로 두고, 추가 구매를 꼭 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추가 구매를 하더라도 그건 말도 안되게 저렴한 가격이다.
아마 그건 동네 애기들과 놀아주면서도 손바쁘게 움직이는 한국인 고등학생이 예뻐보여서, 할머니가 좀 주라고 한 것일게다. 조금 주지 말고, 많이 주라는 지령이니까 한참을 들었을 게다. 외국인이 진짜 맛있는 바나나칩을 현지인보다 싸게 사는 방법은 내가 알기로는 이것 뿐이다. 그러니까, 괜히 관광지 커다란 가게 가서 비싸게 주고 사지도 말고, 깎아달라고 실랑이를 하지도 말고, 먼저 친해질 것. 세상 어디나 비슷하다. 친구한테도 바가지를 씌우는 나쁜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