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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모래 Jul 25. 2023

톱을 든 7살

아주 개판이어도 잘 살아왔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내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온 집안에 하나뿐인 기술자였다. 외할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먹물'들이었다. 그나마 외가 사람들은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손재주가 있어 뭐든 뚝딱뚝딱 고쳐 쓰는 편이었는데 우리 친가 사람들은 정말 혼자 전구 가는 것도 어려운 정치외교학, 영문학, 국문학 전공자들이었다. 기계를 뜯는다, 납땜을 한다, 수리한다, 만든다, 고친다, 설계한다. 전기밥, 기름밥, 기계밥을 먹었다 할 만한 사람은 외할아버지 뿐이었다.


그러니까, 친할머니의 요리칼 말고는 공구란 것을 도무지 볼 일이 없던 나에게 외할아버지의 작업대는 엄청난 놀이터였다. 나는 혼자 뭘 짚고 일어날 수 있는 나이부터 외할아버지의 작업대를 침범했다. 맨 아래 서랍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나는 집요하게 나의 성장을 기다렸다. 혼자 힘으로 의자 위로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자랐을 때 부터 '진짜'였다.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작업대의 테이블 위에는 도면들과, 청사진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위의 철제 랙에는 세기와 크기에 따른 복잡한 규칙으로 정리된 자석들과, 모든 종류의 드라이버와, 렌치와 톱 같은 공구들이 완벽하게 일정한 간격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 장난감들은 내게는 최고의 물건들이었다. 2023년에 생각하면 미취학 아동이 톱이라던가, 몽키스패너라던가 하는 걸 들고 다니는 모습이 아찔할 지도 모른다. 사실 90년대에도 그 모습은 아찔했을 것이다. 온 집안 식구들은 두 가지 이유로 나를 뜯어말렸는데 첫째는 당연히 안전 때문이며, 둘째는 본인 공구에 손을 댔다가는 불호령을 내리시는 외할아버지 탓이었다. 다 큰 외삼촌도, 엄마와 이모도, 심지어는 외할머니조차도 할아버지의 작업대에 손을 댔다가는 그야말로 경을 치고야 말았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는 작업대를 그야말로 초토화를 시켜놓는 나를 한 번도 나무란 적이 없었다.


나무란 적이 없는 것 뿐만 아니라 언짢은 기색 한번 내비치신 적이 없었다. 물론 곤란하셨을 것이다. 지금 와서야 생각나는 것이지만 내가 자석의 위치를 모조리 바꾸어 놓고, 망치들을 흐트러놓고, 심지어는 줄톱을 부러트려 놓는 '일상적인 파괴'를 저지르고 나면 몇 시간 후에는 그것들이 다시 마법처럼 원상복구되어 있었다. 외할아버지 댁에 쥐새끼 풀 방구리 드나들듯 갔던 나는 그걸 매번 또 다시 가지고 놀곤 했다.


외할아버지는 그럼에도 나를 나무라거나 공구를 못 쓰게 하지는 않으셨다. 허허, 이녀석이! 하는 말 말고는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는데, 당신의 자식들은 그 모습에 질투마저 느꼈다고 했다. 대신 외할아버지는 고심 끝에 플라스틱으로 된 완구 조립 장난감을 들여놓으셨다. 그건 꽤나 퀄리티도 좋고 자유도도 높아 플라스틱으로 된 볼트와 너트를 체결해서 플라스틱으로 된 조그마한 집을 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진짜'를 추구하는 나는 그 플라스틱으로 된 장난감을 가지고 두어 시간 잘 놀고 난 뒤에는 반드시 외할아버지의 '진짜' 공구들로 개인 실습을 진행했다.


결국 외할아버지는 미취학아동인 나에게 공구의 올바른 사용법을 교육하시기로 마음먹었다. 나한테 목줄을 채워 마당 감나무에 묶어두지 않는 한 나는 아무리 높은 곳에 있어도, 아무리 어린이의 악력으로는 떼기 힘든 자석이라도, 반드시 가지고 놀고 말 테니까. 나는 그렇게 기술직 조기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톱으로 나무를 켜는 법을 배웠고, 나사를 RIGHT로 돌리면 TIGHT해진다는 것과 Left로 돌리면 Loose해진다는 것을 배웠다. 아무리 그래도 망치는 좀 쓰기 어려워서 조그만 핀망치부터 사용법을 배웠다. 검전기를 사방에 대 보고 도체에 대해 배웠다. 더 크고 난 다음에도 나는 외할아버지가 일하시는 작업실이라던가 전기실, 보일러실을 따라다녔다. 중학교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우리 집은 21세기 대한민국의 클리셰적인 이혼 가정으로 진화했다. 자세한 내용은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여느 집에나 있을 법한 얘기니까 생략하겠지만, 깨나 질풍노도의 성장기를 보내긴 했다.


이 얘기가 떠오른 건, 얼마 전 친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아서이다. 곧 본인의 생일인데, 올 수 있겠느냐 묻는 전화였다. 당연히 가겠노라 대답을 했는데 할아버지는 그렇게 통화가 끝난 줄 알고 핸드폰이 켜진 채 할머니와 대화를 하셨다. 온다니 좋다, 다행이다. 어린 게(나는 이제 어린 나이는 아니다)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이(따로 살 뿐이지 둘 다 멀쩡히 살아있다) 혼자 고생한다. 집안이 아주 개판(이건 맞다)인데 잘 살아서 다행이다.


늘 꿋꿋하게 잘 살지는 못했고, 마음이 꺾이는 날도 있었다. 가족들에게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기댈 수 없은 지 너무 오래 되어서, 혼자 버티는 게 너무 힘든 날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어린 시절의 사랑받은 기억이 나를 지탱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부끄러울 때면 외할아버지에게 사랑받았던 기억이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슬며시 나를 받쳐줬다.


음향시공을 다닌다며 못질이니 망치질이니 톱질을 할 때도, 군대에서 영문도 모르고 전술전화기를 수리할 때도, 음향을 한다며 이 장비 저 장비를 만지는 요즘에도, 나는 내가 점점 외할아버지를 닮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손자 세대에는 내가 유일하게 엔지니어(외할아버지와는 다르지만)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핫바리'라 기술자였던 외할아버지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나는 외할아버지와 내가 닮아간다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따듯해진다. 나는 외할아버지처럼 작업대 앞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예외를 두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어른으로 자란 것이다. 누구에게나 떠올리면 뭉클해지는 전구색 필터 씌워진 기억이 있다. 그런 기억이 있어야 사람은 아주 개판이어도 잘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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