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모래 Apr 28. 2023

조심스러운 나는 설 곳이 없네

조심스러운 나의 유감스러운 사랑

날 때부터 조심스러운 성격을 타고난 것은 아니지만, 3n살의 나는 조심스러워졌다. 천방지축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던 시절에 여러 번 뜨겁게 데인 탓이다. 음대를 졸업할 언저리에도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내가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 이렇다한 실패를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대학을 졸업할 때 쯔음, 아마 내 건방짐을 도무지 견디지 못한 신이 내게 일련의 시련을 내렸는데, 그 시련이란 거 꽤나 무서운 거였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졸업까지 하고 나니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극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쯤 우울증이 왔다. 말을 더듬기 시작하고, 아는 길에서 방향을 잃고, 가만히 있다가도 눈 앞이 하얗게 변하고 귓가에 내 심장소리만 요동치고. 극장에서 버는 푼돈으로 작업실을 차리고 이런 팀 저런 팀을 꾸몄지만 모두 쫄딱 망했다. 취업도 시원찮았다. 자신만만한 태도는 유지했지만, 이제는 정말 그게 허세일 뿐이었다. 이렇다한 성공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코로나 때문에 망했다고 하면 아주 거짓말은 아니지만 아주 참말도 아니다. 망할 만한 내가 망한 거니까. 저 우울증으로 쩔어버린 뇌로 뭘 해도 시원찮았던 것이다. 젠장맞게도 소주에 우울증 약을 말아먹으면서부터 20키로가 넘게 살까지 쪘으니, 패배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어찌나 밉살스럽던지.


승리만 해본 놈의 진짜 자신감은 잃어버렸다. 사람은 패배를 해 봐야 진짜 조심스러워지는 법이다. 체스에서 모든 말이 살아있는 사람의 플레이와, 폰 두개만 남은 사람의 플레이는 둘 다 조심스럽다곤 해도 그 조심스러움의 격이 다르다. 쫄딱 망했다고 하니 얼마나 망했길래, 우울증이라고 하니 어떤 정도길래 폰 두개 남은 정도냐고 한다면, 정말로 제대로 망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나는 사랑에 빠지더라.


이건 불가항력이다. 매번 빠지진 않았고, 한 5년만에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내 변한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나는 연애를 한다면 무지막지하게 공격적인 편이었는데, 혼자서 애간장만 태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나는 이제 줄 게 없으니까. 나는 아직도 공원에서 편의점 1+1 음료 하나씩 사 들고 이야기만 나눠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줄 게 없으니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마음 뿐이니까.


내가 줄 수 있는 게 많았다면, 나는 예전에 그랬듯 여전히 그것들을 선뜻 안겨주며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줄 수 있는 게 내 마음 뿐이라, 행여나 그것을 빈곤한 포장에 담아 선물했다가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 조심스러운 것이다. 내가 건넨 이 마음이 닿지 않는다면, 나는 또 다시 망가질 것이니까.


그런데 사랑을 한다면서 이렇게 조심스러우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조심성 없음을 전제로 시작한다. 좋아하는 마음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침내 서로 사랑하기까지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조심성은 정지 버튼이고, 무모함은 플레이 버튼이다. 알면서도 발이 묶여버린 이 사랑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해피 엔딩에 다다를 수 있을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