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면 바다가 보이는 명승* 천관산
여행으로 재충전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른 거 같은데 크게 두 가지다. "여행은 멍 때리기지"라며 느긋하게 즐기는 쪽과 '전투 모드'로 여기저기 섭렵하고 다녀야 만족하는 쪽. 그래도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경험으로 활력을 얻는 여행의 재미는 '멍파'든 '전투파'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낯설지도 새롭지도 않은, 내가 사는 시골 마을 뒷산에 있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돌아봤다. 태양아래 새로운 건 없다지만, 우리에게 새롭지 않은게 또 얼마나 있을까. 가까이 있어 익숙해도 알고 보면 새롭고 신선한 것 투성이다. '전투파'는 하루에도 다 끝낼 수 있고, '멍파'는 이틀이면 다녀 볼 수 있다.
명승으로 지정된 천관산
지난 봄 우리 동네 뒷산 천관산을 문화재청이 "명승"으로 지정하더니, 얼마 전에는 주차장에서 기념행사까지 했다. 지나는 길에 흥미가 생겨 차 세우고 잠시 발표를 들었다.
장흥 천관산은 명승 지정 이전에도 이미 명성이 있었다. 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억새가 피는 가을 성수기 때는 주차장이 꽉 찬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로 억새축제가 중단상태이긴 하다. 천관산은 멀리서 봐도 '기암괴석'인 바위들이 한눈에 띈다. 올라보면 누구라도 감탄할 거대한 바위더미가 능선을 따라 길게 늘어 선 모습이 장관이어서 땀 흘린 보람이 있다.
기념행사 발표자로 나선 교수는 이 바위들이 7천만 년 전에 형성됐다고 한다. 땅속 마그마가 분출하지 않은 상태로 굳은 후 지반 운동으로 솟아올랐다가 오랜 침식과 풍화작용을 거쳐 지금의 '작품'이 됐다. 그런데 7천만 년이라니. 지구 상에 현생 인류가 나타난 게 10만 년이라고 배운 거 같긴 한데...
이 태고적 바위들은 모습을 바꿔서 "명승" 지정의 또 다른 배경으로 다시 등장한다. 천관산 주변에는 700기 가량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이 일대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선사시대 문화지역이다.
천관산의 다른 볼거리로는 산 중턱의 천년고찰인 천관사, 국내 최대 동백꽃 자연 군락지인 동백숲, 지방 유형문화재인 장천재 등이 있다.
빼놓을 수 없는 매력으로 천관산은 동, 서, 남쪽 삼면에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이런 산은 전국에 별로 없다. 쾌청한 날은 한라산도 보인다고 한다. 아직 나는 못 봤지만.
봉수(화)가 있던 연대봉과 억새밭
천관산이 가을 억새밭, 이른 봄 동백꽃 말고도 여름과 겨울까지 사철 경치가 다 좋은 이유는 3면이 바다인 반도 지형에 산이 우뚝 솟아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출과 일몰 둘 다 감상이 가능하다. 천관산은 탁월한 정상 뷰에도 오르기 힘든 산은 전혀 아니다. 해발 723미터로 그리 높지는 않다. 성인 남성 기준 2시간 남짓이면 정상까지 충분하고 여유 있게 오르면 넉넉히 3시간이면 된다. 만만하면서도 흔치 않게 빼어난 경치를 갖춘 특이한 산. 이곳에 귀촌한 후 나는 천관산에 5-6번 다녀왔다.
천관산 가을 억새밭은 지자체가 밀고 있는 '메인디쉬'다. 코로나 이후 지금은 잠시 중단된 상태지만 매년 절정기에 억새축제를 연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못 봤다. 귀촌 첫 해는 동네 이장님 권유도 있었는데 별거냐 싶은 마음에, 이듬해는 축제 마친 후라서 놓쳤다.
그러나 억새밭은 꼭 가을 축제 때만 멋진 곳이 아니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봉오리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부턴 여러 봉오리들이 옆으로 쭈욱 연결되는 능선 탐방로가 나타난다. 고산지대라선지 큰 나무가 없고 키 작은 철쭉과 억새풀만이 넓게 펼쳐진다. 시야 간섭 없이 탁 트여서 바다가 내려다 보이니 청량감이 좋다. 정상 능선의 평탄한 길을 따라 걷는 상쾌함은 내륙지역 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묘미다. 처음 갔을 때 나는 한라산 중턱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한국 건축에 관심 있는 내게는 애초부터 관심 대상이 따로 하나 더 있었다. 연대봉(723m)이다. 연대는 봉수대라고도 한다. 불과 연기를 피워 정보를 전달하는 조선시대 군사 통신시설을 설치하는 '대'다. 첫 등반 때 산 입구 탐방로 안내판에서 그 이름을 발견하고는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나 보다 기대했다.
천관산 정상 능선 탐방로로 연결된 봉오리 중 하나인 연대봉에는 봉수대가 설치됐었다. 지금은 봉화불을 피우는 거대한 화덕(연조)을 설치했던 높은 단이 있다. 과거에는 이 연대 위에 경주 첨성대처럼 생긴 크고 높은 굴뚝을 만들고 거기서 불을 피워 봉화를 운영했는데, 지금은 단만 남아있다.
1986년에 복원한 천관산 연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통신사들이 세워 둔 안테나가 보인다. 수백 년 전의 통신 안테나가 바로 봉수였다.
조선시대 봉수는 전국에 걸쳐 총 5개 노선이 운영됐다. 최종 집결지인 서울 남산 봉수대를 향해 경남(부산), 전남(여수)을 포함해 북한 지역에서도 3곳의 국경지대 출발점이 있었다.
신호체계도 따로 있었다. 정상이면 한 개를 피우고, 적을 발견하면 두 개 하는 식으로 늘려 가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5개를 피워 긴급 상태임을 알렸다. 또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꽃을 사용해 잘 보이도록 했다.
천관산 봉수는 이 지역 바닷가의 군사정보를 알리는 수단으로 동쪽 보성과 서쪽 강진의 봉수를 연결했다.
봉수가 설치된 산은 인근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산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 천관산 정상 뷰는 이미 보증된 것이다.
복원 중창 중인 고찰 천관사
천관산 북쪽 경사면 중턱에 천관사(해발 320m)가 있다. 계곡 낀 절터 주위를 산자락이 동그랗게 감싸 안고 있어 아늑하면서도 시야는 트여 답답하지 않다. 산지 사찰들은 인근 마을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인데 천관사도 산 아래 큰 마을에서 올라오는 등산로가 있다. 여기가 바로 내가 사는 동네다. 동네 어른들 얘기로는 어린 시절 천관사까지 걸어서 다니는 주민들이 많았다고 한다.
800년대 초엽에 창건 한 이래 천관사는 1천 년 넘게 이 길로 사람들과 연결됐을 것이다. 이 길은 천관산 등산로 3개 노선 가운데 가장 짧은 코스다. 마을에서 절까지 연결하는 포장도로가 절 주차장까지 연결된다.
천관사는 한동안 폐사됐다가 다시 재건했다. 주요 건물들을 복원한 지 오래되지 않아 고풍스럽기보단 절 분위기가 밝고 깔끔하다. 그러나 천관사는 얕잡아 볼 절이 아니다. 신라 양식인 3층 석탑(보물)과 석등(지방문화재)은 이 절이 창건 당시에 상당한 규모였음을 말한다. 고려시대에도 잘 나갔다. 발굴조사에서 고려청자 편이 다량 발견됐는데 당시의 어느 기록에는 범종과 탑이 묘사됐고, 고려 후기엔 5층 석탑도 세웠다. 조선시대는 전성기였다. 다른 많은 절들이 강제로 문을 닫았지만 천관사는 조정이 지정한 사찰로 살아남았다. 건물이 수십 동이었고, 16-17세기에는 불전 목판 인쇄를 여러 차례 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
정점에 찾아온 위기처럼 천관사는 18세기(1747년) 대화재로 불에 타면서 급격히 쇠퇴해 폐사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 동안 지속적인 복원과 중창으로 다시 지금의 단정한 산지 사찰로 거듭났다.
지금 천관사의 모습은 이제 막 절을 새로 연 것처럼 깔끔해서 한옥 펜션 느낌마저 난다. 지난겨울 스님들의 배려로 하룻밤 투숙해본 요사채는 고급 한옥 게스트하우스처럼 쾌적했다.
절 뒤쪽 계곡의 오솔길은 천관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와 연결되고, 왼쪽 임도를 타면 동백숲으로도 연결된다. 천관산 등산로 한 라인에 위치한 이 절은 탐방객들에게 좋은 휴식처다.
주지스님은 신도가 늘지 않아 걱정이시다. 등산객은 물론, 조용한 산사에서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활용할 수 있게 노력 중이라 하신다. 문화재와 부대시설 정비를 위한 국비나 지자체 지원금은 결국 국민 세금이니 종교와 무관하게 더 많은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한편, 천관사에는 발굴조사에서 나온 특별하게 생긴 건물 초석이 전시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중앙계단을 오르면 중간 석축 앞에 큼지막한 돌들이 진열하듯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 초석들은 고려말 조선초까지 사용된 '고막이 초석'이다. 석재 상면에 동그랗게 다듬어진 기둥자리의 높이가 요즘 한옥 초석들과 달리 아주 낮다. 건물에 마루나 온돌방을 만들려면 초석위에 기둥 놓이는 자리를 높여서 여유 공간을 확보한다. '고막이 초석'은 마루와 온돌방이 없는 건물에 쓰인 부재다. 조선초까지의 불전에는 마루 없이 바닥에 방전(일종의 전통 '보도블록')을 깔아 사용했는데, 인근 강진의 조선 초기 건물로 귀한 사례인 무위사 극락전이 원래 전돌 바닥이었다.
그러므로 고막이 초석의 발굴은 그 자리에 조선 초기까지의 고식 건물이 있었다는 의미다. 적천사 삼층석탑 앞에 몇 년 전 복원한 대웅보전 건물이 조선 초기 양식으로 지어진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대웅보전의 세부 치목기법은 서울 숭례문이나 안동 봉정사 대웅전과 유사한 조선 초기 다포계 건물 양식이다.
장천재
장천재는 장흥 귀촌 전부터 알았던 건물로 건축사 책에도 언급된다. 조선 후기 양반가 문중 서원과 서당 건물 중 평면 형태가 특이한 사례다. 장천재는 조선시대 흔치 않은 H 형 평면으로, 지금은 장흥 위 씨 문중 제사를 지내는 재각으로 쓰인다. 천관산 주차장에서 오르는 메인 등산로 초입부 계곡 건너편 언덕에 건물을 세웠다. 계곡이 깊고 언덕이 높아 입지가 독특하고 경관이 뛰어나다. 원래 이 자리에는 장천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어느 시점엔가 용도 변경된 듯하다.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 이름 있던 실학자 존재 위백규(1727-1798)가 강학과 교류의 장소로 사용했다. 지금 건물은 1873년 새로 중건한 것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이전 시기에 사찰이나 암자였다가 유학자들의 서원이나 문중 서당 또는 관공서의 일부로 바뀐 사례는 전국에 많다.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효시인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이 있다. 소수서원은 조선 전기에 숙수사라는 절 터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성리학자(안향)의 위패를 봉안하고 강학 공간을 열면서 시작됐다. 이를 본 퇴계 이황이 선조 임금에게 알려, 조정이 '땅과 노비를 내려'(사액) 격려한 것이 소수서원이다.
뿐만 아니다. 조선 3대 누각으로 이름난 영남루, 태화루도 고려시대에는 절터였다. 불교의 영향력이 컸던 고려가 망하고 유교 국가가 세워지자 건축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H자 형 평면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데에도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 한자의 장인 '공'(H를 돌려서 세운 형태) 자가 조선시대에 천시한 공업과 연관 됐다해서 꺼렸다는 설명이다. 그렇다고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보물로 지정된 도산서원 농운정사가 대표적인 H평면이다. 여기서는 오히려 장인이 일에 열중하듯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설명이 있다. 뿐만 아니다. 조선 후기에 지은 보은 선병국 가옥이 같은 형태다. 이 시절은 이미 상류층 건축에서도 유교적 관습에서 벗어나 생활 편의를 강화하던 흐름이 강하게 시작된 때였다. 건축이 생활상의 편의나 동선 변화를 추구하던 시기였다.
장천재도 정면 5 측면 4칸을 한 특이한 H자 평면의 건물이다. 지붕은 평면의 형태를 따라가므로 기와지붕이 화려해지고 전후면 처마가 서로 다른 독특한 특징이 생겨났다.
동백꽃 붉게 물든 계곡
자연휴양림 근처 계곡에 있는 동백숲은 천관산의 숨은 보석이다. 자연 군락지로 국내 최대규모에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장흥에는 자생 동백나무가 흔하다. 거목도 많아서 어느 마을을 가도 5-6미터 높이의 몇 그루쯤은 쉽게 본다.
천관산 동백 숲은 그런 게 아니다. 깊고 넓은 골짜기 전체가 동백꽃을 피워낸다. 평균 수령 100년 내외의 거목 2만여 그루가 골짜기를 뒤덮고 새빨간 꽃을 매달고 있다.
지난 봄 처음 가서 나는 한눈에 매료됐다. 화분이나, 잘해야 눈 높이 아래에 있어야 할 꽃이 하늘을 뒤 덮었다. 산책로를 걸으며 올려다보면 거리감 때문에 우거진 숲에 붉은 점을 흩뿌린 듯 보인다. 길 바닥이 떨어진 동백꽃으로 뒤덮이면 발걸음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하다.
*<용어 설명> 여기서 쓰는 "명승"은 법률용어다. 문화재 보호법으로 정하는 국가지정문화재의 "기념물"(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중 하나다. "명승"은 자연유산에서 "경치 좋은 곳으로 예술적 가치가 크고 경관이 뛰어난 곳"이며, 역사, 문화, 경관의 가치가 높아 보호 필요성이 있는 곳이다. "명승"으로 지정되면 건축행위 등이 규제된다. 천관산은 명승 제119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