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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지 Dec 07. 2021

신원미상 그 혼미한 매력

화순 운주사 스펙 실종사건






절 입구 잔디밭에 십여 명의 아이들이 둘러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선생님 말씀에 온통 정신이 팔렸다.

"운주사는요오~"

답사 일행과 함께 아이들 곁을 지나던 나는 얼핏 들린 그 소리에 걸음을 늦췄다.

"몽고에서 온 병사들이 고향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기도하던 곳 일 수도 있대요~"


조금 놀라웠다. 유력하지만 아직은 가설로만 받아들인 얘기인데, 초등학생 단체 관람 인솔자의 설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몇 년 사이 새로운 연구가 나왔나 싶다. 그 선생님은 준비한 자료를 들고 아이들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도 재미나게 했다.  


미스터리 사찰 운주사


화순 운주사는 천불천탑(현재 석불은 101개, 석탑은 21기)으로 이름난 사찰이다. 운주사는 고려시대에 개창해서 고려 중후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임진왜란 후 2백 년 동안 사라졌고, 다시 대중 앞에 등장한 것은 1930년대에 재창건에 가까운 중창 이후다. 발굴과 1990년대 이후 지속적인 복원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운주사가 널리 알려진 것은 미스터리 때문이다. 이 절의 석조물들은 완전한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이 많은 석탑과 석불을 누가, 왜, 무슨 용도로 만든 것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 있다. 특히 한국 건축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양식이라는 점 때문에 운주사 석조물들이 의문의 핵심이다. 물음은 절의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운주사는 국내 다른 사찰들과는 전혀 다른 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천불천탑이 만들어지고, 절정기를 보내던 고려 중후기에 운주사는 무엇을 하던 곳이었을까? 


전남대 박물관이 네 차례에 걸쳐 진행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에서도 명확히 밝혀진 게 없었다. 당연히 궁금증은 더 커졌다. 다양한 추측과 가설이 쏟아졌지만 아직은 어느 설명도 충분히 검증되지는 못했다. 그중 그나마 설득력 있게 제시된 가설이 고려시대 몽고군 연관설이다.


운주사 원형 다층탑, 석조불감, 7층 석탑 (2021. 11. 화순)


몽고 연관 "설"

운주사가 처음 자리 잡은 시기는 11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석불과 석탑은 13세기 후반 원나라 간섭기에 조성됐다. 막새기와에 나타난 문자나 석탑의 문양, 석불의 형태 등은 원나라 간섭기 티베트 후기 밀교의 영향이다.* 즉, 고려 중기에 이미 있던 절에 누군가가 천불천탑을 새로 만들었다.    


몽고 연관설은 몽고가 고려에 간섭을 시작할 때 일본 원정이나 몽고에 저항하는 고려인을 공격하기 위해 장기간 머물던 몽고인 집단이 천불천탑을 조성했다는 견해다.**

나는 이 가설에 끌린다. 7-8년 전 처음 알았을 때 보다 장흥 귀촌 후 운주사를 두 번 다녀온 지금 더 솔깃하다. 게다가 최근 지역 문화유적 자료를 보다가 옆 동네의 몽고군 행적을 발견하고는 심증은 더 굳어졌다.

 

내가 사는 장흥 관산에서 몽고군이 일본 원정에 사용한 배 900척을 만들었다. 일본 정벌은 결국 실패했지만, 전선 건조를 위한 대규모 인력과 자원 투입은 물론, 두 차례 원정에 고려사회 전체가 전시동원체제였을 것이다. 인근에 몽고군 주둔지가 형성되고 딸린 인원들이 거주하는 촌락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장흥과 화순은 산을 경계로 접해있다. 곡창지대인 나주나 화순에도 몽고인들이 거주했다면 한가운데 위치한 운주사가 그들의 사찰로 운영됐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신사가 경주를 비롯해 여러 곳에 남아있고, 통일신라 장보고의 해상세력이 중국에 지은 사찰과 여관, 행정소도 있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타지 사는 이주민의 종교시설은 일반적이다. 서울 한남동의 이슬람 사원이나, 미국에 한인들이 지은 사찰도 마찬가지다. 원나라 내정간섭이 70년(1275-1352)에 달하니 그런 시설이 한두 곳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현재로서는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운주사 석불감 (2020. 12. 화순)


산책공원 같은 절


신비로운 '신원 미상 사찰' 운주사의 인기는 매우 높다. 이번 두 번째 답사는 주차장 여유 공간이 부족할 만큼 방문객이 많았다. 운주사의 신비주의에 사람들이 더 미혹되는 것일까. 

이곳의 불상과 석탑들은 다른 어디에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개성 있고 다양한 석탑들의 생김새도 흥미롭지만, 전례 없이 많은 숫자도 놀랍다. 곳곳에서 나오는 본 적도 없는 기호와 상징들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진입부에 들어서면 주변 경관이 보통 절과는 달라서 신선하다. 운주사는 곳곳에 불상과 탑이 흩어져 있어, 사찰 구역 전체가 문화재(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 분위기는 절이라기보다는 야산 느낌으로 연출한 산책공원이나 석조 예술품 야외 전시장 같다.


인공적 조경을 하지 않은 비탈지의 언덕 위, 계곡, 암벽 밑, 숲 속 사이에서 예고 없이 불쑥 석탑과 석불이 나타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왔다면 '운주 공원'이라 해도 믿었겠다. 

여유로운 산책길에서 800년 된 신비의 석조물들을 감상하는 편안한 재미가 운주사의 인기 비결인지 모른다.


운주사 9층 석탑 (2021.11. 화순)


운주사 터는 한눈에 봐도 일반 절들과 다르다. 운주사는 산속이 아닌 나지막한 야산 구릉지에 있다. 들녘과 야산이 만나는 작은 골짜기 1km 반경에 석탑과 석불이 여기저기 솟아나 있다. 1930년대 촬영된 운주사는 벼논 한가운데에 탑이 서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같은 고려시대에 개창한 다른 사찰들과 비교해 보면 운주사의 입지는 크게 차이 난다. 풍수지리를 중시했던 당시의 절들은 큰 산과 계곡을 끼고 규모에 관계없이 경관이 빼어난 자리를 골라 지었다. 반면, 운주사는 해발 135m의 낮고 특징 없는 작은 언덕들에 걸쳐있다. 일부러 고른 것처럼 큰 산이 없고 아담한 야산만이 펼쳐진 특이한 지형의 골짜기 한 곳에 터를 잡았다. 농촌마을 자리로 적당해 보이는 들녘 구석진 위치에 운주사가 들어선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천불천탑의 조성 세력과 당시 절의 활용방식에 관련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이런 특이한 입지가 아이들 단체관람에 적합한 산책공원 분위기를 만든 것 같다. 가파른 경사 없이 평평하고 길게 뻗은 골짜기를 따라 키 크고 날씬한 탑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한적한 모습은 이국적이다.  


경이로운 석탑 전시장

   

원형다층석탑(좌)과 구형석탑(우) 2020.12. 촬영


한 사찰안에 탑이 21개나 있는 것도 희귀하지만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탑이 한데 모여 있어 놀랍다. 

전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 양식의 석탑을 비롯해 벽돌탑 형태의 석탑인 모전석탑은 물론, 원판형 탑, 구형 탑도 있다. 가늘고 긴 고려 양식과 유사하지만 탑신에 운주사에서만 보이는 의문의 기호가 장식된 사각 탑도 3층, 5층, 7층, 9층으로 층수와 크기가 다양하다. 이렇게 특이하고 많은 석탑의 밀집은 한국 건축 역사에서 운주사가 유일하다.  


탑은 아니지만 사찰 진입부에 있는 석조불감도 여기서만 볼 수 있는 문화재다. 

불감은 불전을 형상화한 것이다. 휴대용 예불 기구처럼 도자기로 작게 만든 사례가 있다. 그런데 운주사의 불감은 석재 구조물로 야외에 만든 초대형이다. 대형 석재를 가공해서 실제 기와집처럼 기단과 벽체, 지붕을 형성하고 내부에 불상을 안치했다. 특이하게 불상은 2기인데 서로 등을 맞대고 절에 들어오고 나가는 방향을 향해 배치됐다. 석조불감 앞뒤로 7층 석탑과 원형 다층탑이 각각 세워져 있어 이 구역은 운주사 경내에서 특별한 의미를 둔 공간 같다.    


 사찰 진입로 입구의 원형 다층석탑과 경내 안쪽에 있는 구형 석탑의 신기한 모습도 눈길을 끈다. 원형 다층석탑은 돌을 둥그런 원반형으로 가공해 쌓았다. 1층 옥개석을 가장 크게 하고 위로 갈수록 지름을 줄여 탑신부가 전체적으로 세모꼴이다. 상하 옥개석 사이에는 짧은 원통형 석재로 만든 탑신이 있다. 구형 석탑은 높은 기단석 위에 항아리 형태로 가공한 구형 석재를 적층 했다. 각 층은 별도 지붕석 없이 동그란 돌을 크기만 줄여 쌓아서 외형이 독특하다. 두 탑은 기존 고려 석탑들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모습이다.  


사각형 탑신에 옥개석을 얹은 일반형 석탑도 층수와 크기를 달리해 곳곳에서 보인다. 운주사 사각 탑은 일반적인 고려석탑을 더 좁고 길쭉하게 만든 모습이다. 고려 중후기 석탑은 5층 7층 9층 11층 등 다층탑이 많다. 운주사 사각 탑은 고려 전형석탑을 더 늘려놓은 모습이다. 일부 암반 위에 바위 표면을 정돈해 석탑을 세운 것도 같은 시기 전국 산지 사찰에서 만들어진 암반 위 석탑들을 떠오르게 한다.  

대웅전 앞 모전석탑은 벽돌로 만든 전탑을 석탑으로 표현한 양식이다. 모전 석탑은 경북 산간 지역과 강원도 등에 사례가 남아 있다.  


운주사 석탑은 고려시대 유행 탑과 전례 없는 특수 탑이 뒤섞여 있어 꼭 중세 석탑 전시장에 온 느낌을 준다. 

운주사 탑들은 이전 시기 탑에 비해 가공이 거칠고 디테일이 엉성한 느낌도 없지 않다. 이는 시대적인 특징이자 변화를 나타낸다. 중세 이전까지 주로 왕실과 중앙 귀족의 후원 아래 조영 됐던 석탑들과 다르게, 고려 중후기 산간 오지 사찰의 탑은 지방 부호나 개인의 기부로 만들어진 예가 많다. 이 탑들은 그전 시기의 '황금비'나 화려한 가공을 버리고 간략화, 단순화 경향을 보인다. 


이런 변화는 구조 공법상 합리적 방법을 찾은 결과로 이해된다. 이전시기 황금비 탑은 불국사 삼층석탑처럼 밑은 넓고 크게, 위로 갈수록 좁고 가늘어지는 외형이다. 그러나 최하층 기단이나 저층 탑신 부위에 거대한 석재를 정교하게 가공해서 쌓는 것은 산간 오지의 작업여건에 적합하지 않다. 가공과 운반이 불리한 환경이라면 석재 규격을 줄이되 높게 쌓아서 탑의 규모를 확보하는 방법이 유리하다. 따라서 "가늘고 긴 석탑"으로 규정되는 이 시기의 특징은 조영 세력(경제력)과 입지의 변화를 반영한다. 

이런 탑들은 그전의 '황금비' 석탑보다 조야해 보이는 면은 있다. 그러나 당시 새롭게 등장한 석탑 조성 세력에게는 무의미한 기준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시대적 미감의 변화로 해석한다. 

  

의문의 기호와 상징


운주사 모전석탑(좌,2020.12) 과 암반위 7층 석탑(우,2021.11)



운주사 석탑에 새겨진 문양과 기호들이 관심을 끈다. 석탑의 여러 곳에서 탑신석에 X, 마름모, 수직선 등의 무늬를 돋을새김 하거나 선 새김 한 문양이 보인다. 이 문양들은 한국 건축 어디에도 나타난 적 없는 것들로, 해석이 분분하다. 그중 X자형이 티베트 후기 밀교 경전의 사상을 반영한다는 설명이 있다. 당시의 현지 석탑에서 같은 문양이 발견됐다고 한다. 한편 마름모의 원형을 힌두사원에서 찾기도 한다. *** 

궁금증을 자아내는 기하학적 문양의 비밀은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은 상태다. 


운주사 경내 곳곳에 무질서하게 세워진 것처럼 보이는 불상과 석탑의 배치도 일정한 규칙이 있었던 게 아닌가 여기는 의견도 있다. 불상과 석탑이 짝을 이뤄 고대 시기 한반도에서 흔했던 1 탑 1 금당과 같은 독립 구역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사찰 입구 석조불감 양편에 원형 다층탑과 7층 석탑이 배치된 것이 있다.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한 불상 앞에 원형 다층석탑과 7층 석탑을 따로 세운 것은 금당(불전) 1개에 탑 1기를 둔 배치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 

경내 안쪽 서편 언덕 위에 있는 좌상 불과 입석 불(속칭 '와불')도 암반 위에 세운 탑과 짝을 이룬다. 이런 세트 구성은 운주사 경내 곳곳에 보인다. 이를 확장해서 운주사 경내는 각자 독립된 예불 영역이 여러 곳에 산재한 복합적 공간임을 나타낸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친근한 석불

운주사 석불 (2020. 12. 화순)



운주사 경내에는 현재 확인된 것만 101개의 석불이 있다. 그러나 초창 이후 한동안은 실제로 천불천탑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530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석불과 석탑이 1 천구씩 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초까지 실재했다. 


 석불은 큰 것은 10m 대형이 있고 작은 경우 수십cm의 소형도 있다. 야산과 들판 곳곳에 흩어져 있다. 

운주사 석상은 대개 서로 비슷한 양식이다. 판석에 조각해서 떼어냈기 때문에 평면적인 모습을 했다. 얼굴은 세부를 묘사하지 않고 만화처럼 단순화해서 표현했다. 몸은 망부석이나 돌기둥 같은 형태다. 역시 돌을 판석 형태로 떼어내 세우기 편리하게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신체 세부 비례감 없이 간략화된 형상이다. 


이곳 불상들은 정형화된 근엄한 부처상이 아니다. 일반적인 불상처럼 보이는 것 말고도 마치 부모와 자식이 한 가족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것도 여러 곳이다. 이를 티베트 후기 밀교의 "부모 합체 불"로 보기도 한다. 

불상 여러 기가 세트로 만들어져 무리를 지어 조성된 것이 운주사 석불군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운주사의 불상들은 기존의 화려하고 장엄하며 권위 있게 묘사된 부처상들과 완전히 차별화된다. 서민적인 형상의 불상은 운주사가 기층민의 기복처이거나 신앙공동체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천체관측을 반영한 칠성바위

운주사 칠성바위와 주지스님 (2021. 11. 화순)


운주사 계곡 서쪽 언덕 위에 북두칠성 형태로 배치된 거대 바위들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칠성바위는 운주사 주지스님 설명에 따르면 실제 별의 밝기에 따라 해당 바위의 크기를 달리해 실물을 표현한 것이다. 주지스님은 바위 옆에 있는 석탑 안내판을 가리키며 실은 탑보다는 이 바위들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실제로 원반석은 크기가 제각각이고 배치 형태는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 형상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북두칠성의 방위각은 물론 별들의 실제 밝기를 그대로 형상화했다고 한다. 돌을 놓은 순서도 북두칠성이 물 위에 비치는 것처럼 좌우 순서를 뒤집어 놨다. 


칠성바위는 북두칠성 별 밝기를 구분하고 각각의 크기를 달리해서 만든 구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 또 실제 밝기의 차이가 상당히 정확하게 표현된 것은 고려시대 천문관측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북두칠성 천문 관측 실증 유물이라는 것이다. ***** 


이 돌들의 가공과 운반 과정도 궁금증을 유발한다. 운주사 한쪽에는 발굴조사 결과 채석장이었던 곳으로 확인된 구역이 있다. 운주사 천불천탑을 조성하는데 소요된 돌을 채석하고 가공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지스님 말씀으로는 발굴조사 결과 칠성바위를 채석 및 가공하고 운반한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칠성바위는 도교에서 중시하는 숭배 대상으로 알려져 있다. 운주사 칠성바위는 이 사찰이 불교사원이면서도 도교적인 성격을 함께 갖는 복합적 성격의 예불 공간이 아니었는가 추론하는 근거가 됐다. 실제로 칠성바위 옆에도 별도의 석탑이 조성되어 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 운주사 내 다른 불상과 탑들이 이루는 각각의 구역처럼 칠성바위도 별도의 독립 예불 구역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일어서지 못한 석불


운주사 석조 좌상 불과 협시불 (2021. 11. 화순)


계곡 서쪽 언덕 암반에 거대한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운주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가장 높은 지대를 차지한 입지, 거대한 규모와 잘 다듬어진 석불의 세부 모습 등으로 탐방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조형물이다. 주지스님은 상당수의 관광객이 이 불상을 보기 위해 온다고 하셨다. 

이 불상은 바닥에 있어서 와불로 불리지만, 정확히는 앉아 있는 모습의 좌상 불과 옆에 선 협시불이다. 조각은 완성됐지만, 바위에서 돌을 떼어내 세우지 못한 미완성 불상이다. 


이 불상들 앞에도 석탑 한기가 세워져 짝을 이루고 있다. 역시 1 탑 1 금당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남대 박물관의 발굴조사 및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정리된 논문에는 수십 년 전에 인근 주민들을 인터뷰한 내용이 소개된다. 이에 따르면 운주사 인근 주민들은 이 석불이 일어서면 세상에 큰 변화가 온다는 전설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수수께끼 건축의 매력

운주사 석불좌상 협시불 (2021. 11. 화순)


운주사는 여전히 미스터리에 휩싸인 신비의 사찰이다. 전국의 천년사찰들 중 과거가 묻힌 절은 운주사 말고도 많다. 운주사의 역사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현재가 설명되지 않아서다. 입지와 배치 방식, 불상과 불탑 조영까지 어느 것도 비슷한 사례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운주사를 놓고 제기된 가설은 많았다. 서민들의 기복처, 하층민들의 해방구, 종교 공동체, 밀교 집단의 사찰, 이민족의 사찰 등. 아쉽게도 아직은 어느 주장도 명확히 입증되기 전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건축의 매력은 미스터리가 뒤섞여 있을 때 더 할 수도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처럼. 

4천5백 년 전 피라미드에 비해 고려시대는 그리 먼 일이 아니니 오래지 않아 궁금증이 풀리게 될 수도 있다. 

운주사 창건 당시 동아시아는 하나의 문화권이나 다름없었다. 지리적 구분과 학문 분야별 칸막이를 넘어선 연구가 지속되면 곧이어 운주사의 베일이 걷힐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 황호균, '화순 운주사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위한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천불천탑의 불가사의와 세계유산으로의 탐색> 중 "운주사의 역사적 배경과 천불천탑의 제작 공정 복원론". 2014. 전남대 박물관.


나는 이번 답사에서 운주사 주지스님께 우연히 빌려 본 학술자료집을 통해 운주사에 관한 최신 논의를 접했다. 운주사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위해 7년 전 열린 국제학술대회 자료집이고, 논문 저자들은 지난 30-40년 동안 운주사를 연구하고 특히 1984년부터 시작된 총 네 차례의 운주사 발굴조사에 참여한 전문가들이다.  


**  김동욱, <한국 건축의 역사>. 2007. 기문당.

*** 황호균, 위 논문. 

**** 황호균, 위 논문.

***** 황호균, 위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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