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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지 Dec 16. 2021

남도 백제계 석탑 보기

강진 월남사지 3층 석탑




강진 무위사와 백운동 정원에 다녀오는 길이라면 인근 월남사지에도 잠시 들러볼만 하다. 이곳에는 석탑 한 기만이 덩그러니 서 있지만,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중세시대 탑 변천 과정을 증언하는 흔치 않은 석조물이다. 꼭 탑이 아니라도 월출산이 멀리 보이는 산세가 아름답고, 절터도 넓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이 평온해진다. 지금 이곳은 텅 빈 절터지만, 아마 1천 년쯤 전에는 지역 '핫플레이스'였을 것이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영광을 누린.

나는 이곳에   다녀온 후로, 보름달  달밤에 다시 가봐야지 했는데, 아직  갔다. "월출산" "월남사지"라니 대체 달빛이 어떻길래 싶다. 인근에 "월하리"라는 마을까지 있어  궁금해진다.


천 년 전 핫플레이스

월남사지 삼층석탑 (2021. 9. 강진)


 발굴조사로 확인되기로는 이곳에 절이 들어선 것은 백제시대부터였다. 탑 앞의 건물터에서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건물 개축 흔적이 확인됐다. 고대에 세워진 절이 조선시대까지 오래도록 유지되어 온 것이다. 발굴조사 당시 수집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월남사지에는 탑이 2기 있었고, 근처 무위사 스님들이 와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밖에도 탑 앞의 금당(불전) 터도 확인됐다.    

고대 사찰은 기하학적 배치와 최고급 격식을 특징으로 한 상류층 건축으로 극히 제한적으로만 지어졌다. 이곳 남해안 외진 곳에 들어선 고대 사찰 월남사는 지역사회 명소로 많은 사람들의 각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와는 달리 탑 하나만이 남아 있는 지금, 이걸 보려고 길을 나서기는 망설여질 것이다. 석탑은 좀 낯설기도 하고, 그리 재미난 구조물은 아니니까. 나도 전에는 가끔 절에 가면 있으니까 보는 정도였지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객관성을 상실하고 한국 건축에 빠진 후에는 석탑 한 기 보러 경주든 부여든 가리지 않고 다니는 신세가 됐지만.

그런데 옛날 유행은 안 그랬다. 탑은 최소 1천 년 이상 한반도에서 친숙하고 중요한 석조물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만들어 세워서 전국 어디든 좀 오래됐다 싶은 절이면, 오백 년에서 천년 된 석탑쯤은 쉽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라고 할 정도다.


  석탑 나라


월남사지 삼층석탑 (2021. 9. 강진)


석탑은 부처의 사리를 보관한 불탑에서 유래했으니, 불교 신앙과 건축에서 핵심적 구조물이다.

석탑을 양산한 불교는 한반도에서 거의 천년 동안 영향력이 막대했다.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왕들은 부처의 권위로 왕권을 뒷받침하고자 했고, 삼국통일기에도 백제와 신라의 왕들은 강성대국을 꿈꾸며 수십 미터 높이의 목탑과 황룡사나 미륵사 같은 초호화 절을 지었다. 더 나아가 고려시대의 불교는 아예 국교였다. 왕자나 엘리트 귀족의 아들을 출가시켜 국사로 삼았고, 지방의 큰 절은 하나의 도시이자 행정기능을 겸하기도 했다.


이 처럼 불교가 위세를 떨친 세월을 모두 합하면 장장 천년에 이른다. 물론, 중앙권력이 불교를 억눌렀던 조선시대는 논외지만, 실은 이때조차 신앙으로서 불교의 영향력은 사회 전반에 여전히 강했다.

오랜 기간 시대와 유행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세워진 석탑들은 뛰어난 내구력 덕분에 목조건축과는 달리 천년쯤 유지되는 일은 흔하다. 그 결과 전국 도처에 무수히 많은 석탑이 남았으니 "석탑의 나라"라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탑의 시초_ 목탑



목탑 건물인 쌍봉사 대웅전(왼쪽, 2014. 5. 화순)


불교의 탑 건축물이 처음부터 돌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인도에서 처음 출현한 불탑이 중국의 목조 건물화를 거쳐 한반도에 처음 들어올 당시의 탑은 나무로 만든 목탑이었다. 잘 알려진 황룡사지 9층 목탑 말고도, 가장 오래된 미륵사지 동서 석탑 사이 중앙에도 거대한 목탑이 있었다. 그 목탑들은 당시의 전각(건물) 형태를 띠었다.


목탑 중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두 채가 있다. 화순 쌍봉사 대웅전(3층)과 보은 법주사 팔상전(5층) 이다. 조선시대 건물이지만, 전통 목구조는 1천 년 넘게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 목탑의 옛 구조를 유추하는데 귀한 참고가 된다.


목탑 건물인 쌍봉사 대웅전을 자세히 보면 일반적인 석탑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석탑은 쌍봉사 대웅전처럼 생긴 목탑을 돌로 변환한 구조물이다. 목탑을 돌로 만들면서 간략화하고 돌의 특성을 살려 고유의 조형미를 창안한 것이 한국 석탑 건축의 독자성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런데 목조 건축 석조화의 초기적 흔적은 백제지역 석탑에서 잘 나타난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건물 세부 부재까지 비교적 자세히 표현되어 시원적 석탑으로 평가된다. 같은 백제계 석탑인 정림사지 오층 석탑은 더 세련된 변환을 보여준다. 즉, 단단하고 가공이 어려운 돌의 재료적 특징에 맞게 목탑 세부 표현은 생략하거나 간략화하면서 그 뉘앙스를 잘 표현함으로써 완성적 형태미를 갖춘 예가 정림사지 탑이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정림사지 오층 석탑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일찍부터 보물로 지정됐다.

 

목탑의 석탑화를 보여주는 백제 석탑


정림사지 오층 석탑 (2016. 8. 부여)


정림사지 오층 석탑은 한 눈에 보기에도 쌍봉사 대웅전 같은 목탑을 축소한 듯한 모습이다.


크기와 재료 및 용도가 다를 뿐 두 건축이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석탑 용어로는 옥개부, 목조 건물에서는 지붕부로 불리는 곳의 기본적인 특징도 서로 같다. 정림사 탑을 보면 후대의 석탑과 달리 처마 내밀기가 기단 밖까지 나와 있어 목조건물의 세부 모습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처마선 양끝이 살짝 들린 반곡도 일반적인 건물 지붕과 같아 특징적이다. 탑신부라 불리는 기단 위 벽체부 역시 목조건물의 특징을 간략화해서 표현했다. 예를 들어 탑신부 양 옆으로 긴 부재를 세워 놓은 게 건물 기둥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목조 기둥 치목기법 중 하나인 '민흘림 기둥'(밑 마구리보다 윗 마구리 지름을 1/10쯤 축소해 치목 하기) 기법이 보인다.


즉, 정림사지 오층 석탑은 일반 목조건물의 비례나 건축기법을 그대로 반영한다. 정림사 오층 석탑은 목조탑이 석조로 바뀌는 변환 시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석탑의 완성형 _ 경주 감은사지 석탑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2015.2. 경주)


삼국통일기 감은사지 석탑은 백제계 석탑에서 한 단계 변형되고 더 다듬어진 모습이다.


맨 하단부에 만든 기단이 두툼하고 1층 몸체인 탑신의 높이는 고대 탑보다 다소 낮아졌다. 이전 탑들이 1층 탑신을 크게 만들어 일반 목조건물의 비례를 반영했다면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그 틀을 벗어 던진 모습이다. 2,3층 탑신의 체감이 백제계 탑들 처럼 더 이상 현저하지 않다.  


1층 지붕부인 옥개부에서 밖으로 내민 처마의 위치도 기단 안쪽에 위치한다. 이 역시 기존 백제계 석탑에서 지붕이 기단 밖으로 내밀면서 일반 목조건물의 처마 모습을 따랐던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즉, 통일신라 시대가 되면 석탑에 아직 남아있던 목탑의 흔적을 털어내고, 석재 특성과 질감에 최적화한 모습으로 석탑의 독자적인 조형미가 완성된다. 이 때문에 감은사 동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그 후 전형석탑은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정형화"된다. 다음 시기에 전국 곳곳에 만들어진 수많은 정형화된 석탑은 바로 여기서 확산된 것이다.


그러던 석탑은 통일신라 후기에 이르러 또 한번의 새로운 변화를 겪는다.  

최적화되고 정형화된 비율에서 탈피해 이번에는 가늘고 길어지며, 세부묘사는 더더욱 간략화된 새로운 유행이 등장한 것이다. 이른바 고려계 석탑의 등장이다. 이 때의 석탑은 층수도 다양해지고, 세운 위치도 파격적이다. 이제껏 본 적 없던 "이형"석탑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한 탑들이 등장한다.  


월남사지 3층석탑은 이때 나타난 복고풍이다. 고려 시대에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서 옛날 탑이 재등장했다. 백제 지역인 비인과 장하리에서 정림사지탑을 모사한 탑이 만들어졌고, 고구려 영향권이었던 곳에서 8각 다층석탑이 등장한 것이 그런 사례다.


고려시대에 다시 등장한 백제계 석탑


월남사지 삼층석탑 (2021. 9.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의 세부 모습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았다.


1층 탑신의 높이가 2층과 3층보다 현저하게 높다. 이는 이른 시기의 석탑이 목조 건물의 1층 건물 벽체를 표현하는 것과 비슷하다. 정림사지와 미륵사지 석탑이 1층의 높이와 그 외 상층의 체감이 매우 큰 특징이 있다.

탑 지붕부(옥개부)의 처마 끝선이 기단 밖으로 나온 것도 통일신라 이후 정형석탑보다는 그 이전 고대 석탑과 유사한 점이다. 또 처마 끝선의 옥개석 받침돌의 가공 수법도 정림사지 석탑 같이 모서리를 곡선지게 가공했다. 역시 백제계 석탑과 닮았다.


이 처럼 월남사지 석탑을 자세히 보면 그 구성과 축조법이 정림사 탑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월남사지 석탑은 고려시대에 만든 백제계 석탑의 드문 사례다. 숲속 갈림길에서 여러 갈래 등산로를 각각 가리키며 서 있는 이정표 같이,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석탑건축 변화의 한 순간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월남사지 삼층석탑 (2021. 9. 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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