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강골마을 열화정
보성 강골마을에 있는 열화정은 170년 쯤 된 멋진 정자 건축이다. 마을이 한창 번성하던 시기에 지어져 그 후로도 몇 세대 동안 주민들이 애용하던 시설이었다. 열화정은 마을 전성기 시절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 건물이 들어서던 때의 마을 풍경은 지금하고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실제로 그 때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었다. 1930년대에 간척 사업으로 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넓은 들판이 생기고 마을 경관도 바뀌었지만, 오랫동안 이 건물은 바다를 내려다 보는 해안가 마을의 정자였다.
열화정은 조선 후기 남해안 마을 정자로 정원과 함께 건립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있어 문화재로 지정됐다.
마을의 성장
이씨 집성촌인 강골마을은 16세기 후반 광주 이 씨가 입향하면서 시작됐지만, 이 씨족마을이 커진 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로 보인다. 이 마을에는 열화정 외에도 이금재 가옥, 이용옥 가옥, 이식래 가옥 등 문화재로 보호되는 건물들이 더 있다. 세 건물은 모두 마을 성장기에 지어졌다.
강골마을은 간척사업으로 넓어진 농토를 앞에 두고, 득량역과 예당역을 양 옆에 낀 교통편리를 누리며 더 한층 번성했다. 비슷한 시기 전국의 농촌마을 중에는 이처럼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농토를 가까이 하고 부농들의 씨족마을이 성장한 사례가 있다. 이는 그 전 시기의 전통 마을들이 꽤 규모있는 산을 끼고 비교적 한적한 곳에 들어섰던 것과 비교된다. 마을의 형성과 발달에서도 시대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강골마을도 바로 그 시기에 확장된 곳 중 하나다.
언덕위의 열화정
열화정은 강골마을 뒷산 작은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마을 뒤 오솔길을 따라 잠시 걸어 올라가면 계곡 위 한적한 언덕배기에 정자가 보인다. 열화정은 1845년 이진만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했다. 당시에는 맞은 편 안산에도 만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소실됐다고 한다.
언덕에 올라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당당하게 우뚝 서 있는 건물이 나타난다. 열화정의 첫 인상은 높고, 당당하고, 화려하다. 건물 기단이 하도 높아서 고개를 들고 쳐다보게 된다. 건물만이 아니다. 집이 놓인 언덕과 숲이 전체적으로 높고 깊어서 시선이 멀리까지 가 닿는다. 조금 전에 지나온 좁은 골짜기와 상반된 공간감이 상쾌하고 편안하다. 집 뒤로는 여러 단의 석축을 두른 높은 언덕이 버텨서서 건물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다. 언덕 위로는 키 큰 대나무들이 높고 시원한 숲을 이룬게 보인다. 언덕과 숲을 경계 짓는 석축위로는 단정한 토석담장을 빙 둘러서 대나무 숲과 함께 집 전체를 감싸고 있다.
건물 외형에서 맨 먼저 눈에 띄는 열화정의 특징은 높은 석축과 가파른 계단이다. 열화정의 석축 기단은 민가건축에서는 흔치않게 높다. 기단을 이토록 높게 쌓은 이유는 입지조건의 제약 속에서 되도록 건물의 시야를 넓게 확보하기 위함이다. 정자가 자리한 언덕 맞은 편에 또 다른 언덕이 가까이 있다. 집이 숲에 묻혀 답답해지지 않도록 최대한 축대를 높이 쌓아 건물 마룻바닥을 들어 올려서 시야를 확보해야했다. 그 결과 열화정은 계단이 높아지긴 했지만 탁 트인 전망을 갖게 됐다. 마루에 앉으면 마을이 내려다 보여 경관이 좋다.
열화정은 온돌방과 누마루를 갖춘 꺽인 집이다. 'ㄱ'자 평면에 지붕은 화려한 팔작지붕을 했다. 실내는 2칸의 온돌방을 가운데에 두고 앞 뒤로 툇칸을 덧붙였다. 꺾인 부위에는 폭 1칸에 길이 2칸의 누마루를 설치해 돌출시켰다. 이 누마루가 열화정의 중심 공간이다. 건물 초창 후 후학양성소로 쓰일 당시에는 이곳 마루에서 문중 서당 수업을 하고, 마을 사람들의 회합도 전망 좋은 이 마루에서 했을 것이다. 높이 쌓은 축대로 마루가 한껏 높아졌으므로 그대로 두면 불안하다. 안정감을 위해 돌출한 누마루 전체를 둘러서 난간을 설치했다. 난간은 간편하게 조각한 계자각(닭다리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난간을 설치했다.
아름다운 처마와 구조적 안정성
난간 전면 모퉁이 끝에는 높은 장주초석을 받쳐 두개의 활주를 세웠다. 활주는 지붕 처마끝이 처지지 않도록 세운 보조 기둥이다. 활주를 받치는 장주초석은 돌을 길게 깎아 세운 초석인데, 기둥 부식을 막기 위해 빗물에 노출되는 기둥 하부를 돌로 대체한 것이다.
추녀를 받치는 활주를 세우니 건물이 안정감 있게 보인다. 실제로 누마루 쪽 지붕은 처마가 길게 내밀어진 반면 폭이 좁아서 언뜻 보기에도 구조적으로 불안해 보인다. 건물 폭이 좁은 조건에서 처마 내밀기가 길어지면, 지붕에 설치한 추녀와 서까래의 뒷길이를 충분히 길게 할 여유가 부족해 구조적으로 취약해진다. 보통 추녀와 서까래는 기둥에서 내민 길이의 1.5배 이상 뒷길이가 확보돼야 안정적인 뒤누름 하중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열화정 누마루쪽 지붕이 불안해진 것은 폭에 비해 건물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다. 시야 확보를 위해 석축을 높게 쌓아 건물이 높아지면서 새로운 문제가 생긴 것이다. 건물이 높아지면 아래쪽 목부재가 비바람에 노출될 위험이 커진다. 또 건물은 높은데 지붕이 작으면 비율이 흐트러져서 집이 어색해 보일 수 있다. 결국 빗물 피해를 막고 높이에 어울리는 지붕규모를 갖추기 위해 처마를 최대한 길게 내밀어 설치해야 했다. 그 결과 건물은 당당하고 화려해졌지만, 구조적 약점이 생긴 것이다. 추녀와 서까래의 뒤누름 하중이 부족할 수 있어 처마가 처질 위험이 있다.
이 문제에 대응하는 실용적인 대처법이 추녀의 하부에 또 하나의 기둥을 세워 받치는 것이다. 활주를 세움으로써 구조적으로 취약해 보이는 지붕의 불안정을 해소하고, 시각적으로도 안정감을 얻었다.
누마루와 고식 분합문
열화정 누마루에 앉으면 마당과 높이 차이가 커서 마치 이층집에 올라온 것처럼 주변이 멀리 내려다 보인다.
마루 옆으로는 온돌방과 통하는 세살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고풍스러운 방문은 열화정이 지금보다 한참 이전 시기에 지어진 건물임을 말해준다. 문짝의 하부 1/3쯤이 문살과 한지가 아닌 나무 판장으로 마감되어 있다. 이렇게 하부는 판재를 가공해서 끼우고 상부에만 가는 문살에 한지를 바른 문짝은 문 전체를 살과 한지로 한 것보다 오래된 고식 문짝이다. 일상 통행이나 물건 운반시 상하기 쉬운 문의 밑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좀 더 강성이 높은 판재로 마감한 것이다. 이런 문은 튼튼하지만 방안이 어두워지는 단점이 있다. 실내의 채광과 미감을 더 중시한 후대에 와서 이런 문짝은 점차 사라졌는데, 열화정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 문의 개폐방식도 고풍스럽고 근사하다. 세 짝으로 된 문 중에서 왼쪽 한 짝과 오른쪽 두 짝이 분리되도록 설치했다.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열고 닫는 구조다. 오른쪽 두 짝은 문을 연 다음 서로 접어서 다시 위로 들어 올린 후 문짝을 걸 수 있게 되어 있다. 왼쪽 한 짝 문은 그 상태로 바로 들어 올려 걸도록 했다. 이런 문을 '들어열개 분합문'이라 한다. 더운 여름철에 문을 완전히 열어서 통풍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또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모임이나 잔치, 또는 서당 수업을 할 때에는 모든 방문을 올려 걸고 마루와 방을 한 공간으로 연장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부농과 양반가의 사랑채 등에서 흔했다.
거꾸로 휘어오른 대들보
분합문 위에 있는 대들보가 대담하게 위쪽으로 굽어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보통 민가에서 대들보는 아래로 굽은 형태로 쓰지 않고 이처럼 역방향으로 휜 상태로 설치했다. 이렇게 쓰는 것이 구조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대들보는 지붕 하중을 기둥으로 전달하는 핵심 구조재다. 집 지을 나무를 치목(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파는 일) 할 때 굵고 강성이 좋은 것 중에서 맨 먼저 대들보감을 선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 목재 수급이 여의치 않던 때에는 곧으면서도 충분히 굵은 대들보감이 마땅치 않으면, 이렇게 굽은 나무를 사용하고는 했다. 목재난은 특히 임진왜란 이후 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 후 지은 사찰 건물들에서 이런 부재가 자주 보인다.
한편, 조선후기 건축에 자연주의 경향이 확산할 때 굽은 대들보나 휜 기둥을 생긴대로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는 설명도 있다.
정확한 사용 경위야 어떻든 열화정의 대들보가 구조적 이점과 시각적 재미를 동시에 충족한 것 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휜 나무를 거꾸로 써서 지붕 무게로 보가 처질 위험을 줄이고, 재치있고 발랄한 미감도 함께 얻었다.
열화정 툇마루의 안전장치
답사 당시 일행 중 한 분이 툇마루에서 열고 들어가는 방문이 너무 낮다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이 집을 지을 당시 주인이 앞쪽 툇마루 방향의 문을 방의 주된 출입문으로 삼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이 문은 출입에 필요한 최소 필요 높이를 의도적으로 확보하지 않았다. 문의 높이는 기둥 사이에 가로로 걸리는 긴 목재(인방) 중에서 맨 위 상인방의 위치에 달렸다. 상인방은 보통 기둥 머리에 결구해야만 문짝의 필요 높이를 확보할 수 있다. 누마루쪽 분합문 위 상인방도 기둥의 맨 윗부분에 걸려 있다.
그런데 열화정 전면 문틀의 인방은 기둥머리에 있지 않고 중간 언저리에 설치됐다. 보행에 필요한 높이를 피하고, 일부러 낮춘 것이다. 즉, 이 문은 통행을 주목적으로 하는 출입문이 아니라 환기나 채광 또는 외부 관망 용도로 사용하는 창으로 만든 것이다. 방의 주 출입문은 누마루 쪽 분합문이다.
마당에서 올라오는 쪽마루에 방 출입문을 두지 않은 것은 안전사고를 방지하려는 의도 같다. 열화정은 유난히도 높은 석축위의 건물이니 합리적 선택으로 보인다. 실제로 낮은 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와보니 마당보다 2미터 이상 높고 좁은 마루가 몹시 불안하게 느껴졌다. 누마루처럼 난간을 설치하려 해도 실용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넓은 대청마루쪽 세살 분합문으로 주 출입문을 낸 것 같다.
마당을 향하는 툇마루 쪽 문을 낮게 만들어 놓으니 그 자체로 안전 장치효과를 낸다. 이 문으로 애써 나오려고 하면 높이가 낮아서 허리를 숙이고 보행속도를 늦출 수 밖에 없어진다. 이곳으로 다니려면 허둥대지 말고 잘 살피하라는 메시지가 되는 셈이다. 건축주의 세심한 고려가 느껴진다.
석축과 담장으로 꾸민듯 안 꾸민 후원
열화정에는 건물 못지않게 잘 보존된 전통 정원의 정취가 살아있다. 열화정 후원은 한적하고, 기품있고, 청량한 느낌이 난다..그런데 한국전통건축의 정원은 요즘의 정원하고는 좀 다르다. 전통정원은 꽃밭에 잎사귀를 잘라 모양 낸 나무가 있는 그런 뜰은 아니다. 전통정원의 백미로 꼽히는 창덕궁 후원은 지형과 산세에 어울리는 자연상태의 숲에 최소한의 건축행위를 적절히 결합한 모습이다. 철마다 바뀌는 자연의 변화를 감상하고 천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데 초점을 둔 정원이다. 열화정 후원도 비슷한 멋이 있다. 집주위의 대나무밭과 원래 있던 높은 언덕을 그대로 두고 자연석 석축을 쌓아서 군데군데 나무를 심었다. 높은 대나무숲과 오래된 동백나무, 석축과 언덕이 어우러진 풍경이 자연스럽다.
열화정 후원은 기존 언덕의 기울기를 그대로 이용해서 조성했다. 경사가 급하지 않은 곳은 그대로 나무를 심어 경관에 어울리게 하고, 가파른 곳은 자연석으로 석축을 쌓아 동백나무나 백일홍을 심었다. 급경사 지대인 집 뒤쪽은 서너단으로 나누어 자연석축을 쌓았다. 이 석축은 터가 넓어 장대한 길이를 형성했는데 지형과 어우러져 대숲의 정취를 더한다. 담장은 석축 이상의 포인트가 되고 있다. 담장은 후원과 집 밖 대나무숲의 경계 구분을 위해 언덕배기 전체를 빙둘러서 쌓았다. 흙과 돌로 쌓은 토석담 위로는 기와를 얹어 마감했고, 경사구간에서는 전통법식 그대로 수평지게 층단쌓기를 해서 정돈감을 높였다. 전통담장은 경사지게 쌓더라도 담장 위 끝선은 경사지게 쌓지 않고 수평지게 쌓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급경사지에서는 담장 상면이 계단처럼 층지게 되는데 열화정 측면 담장에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가장 높은 뒷산 방향에는 다시 석축을 두단 쌓고 그 위에 담장을 쌓아 담장의 필요 높이를 확보했다. 인공 담장이 대나무 숲과 어울려 정갈한 느낌이 난다.
열화정 후원에 적용된 조경 원리는 자연 상태의 지형에 최소한의 인공적 조경을 결합하고, 집 밖 대숲의 자연림과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후원에서 담장 밖의 대나무 숲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 조경요소가 된다. 전통건축 정원은 집주위 울타리 넘어 뒷동산까지 포함하는 것이 특징이다. 집의 내부와 외부가 서로 조응하면서 천연스런 공간감이 만들어진다. 안꾸민 듯 꾸민 열화정 후원의 자연스러운 멋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작은 동산처럼 보이는 언덕에는 100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 동백나무 몇 그루가 서서 후원에 기품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