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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지 Dec 21. 2021

조선 국립 지방학교와 호텔

나주 향교와 객사(금성관)



향교와 객사는 조선시대의 국립 학교와 숙박시설이다. 이들 건축은 모든 지방 행정구역에 빠짐없이 설립된 공공기관이었다.

 

향교는 일종의 국립 고등학교인데, 교육뿐만이 아니라 제사도 함께 지내는 곳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학교와 추모공원이 한 장소에 같이 있었던 셈이라 조금 낯설지만, 조선이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국가였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이 곳에서는 유학을 가르치며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유교 사상을 보존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저명한 학자들을 기리는 예도 올렸다. 그러니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향교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향교에는 설립 목적과 기능에 맞게 교육공간과 제례공간을 별도 건물로 각각 구분해서 지었다. 교육공간에서는 과거시험 준비 학생을 가르치고, 제례공간에서는 정기적인 제사를 지냈다.


객사는 지방 관청에 설치된 숙박시설이자 임금에게 정기적인 예를 올리던 시설이다. 객사도 향교처럼 역시 두 가지 역할이 있었는데, 두 기능을 한 건물에 합쳐 놓은 점이 서로 다르다. 객사의 숙박시설은 일종의 국립 고급 호텔이었다. 여기는 주로 외국 사신이나 지방 출장 중인 고위관리들이 사용했다. 그러나 객사는 건물 중앙에 왕을 상징하는 패(나무 조각에 '궐'자, '전'자를 쓴 것)를 두고 지방관이 정기적인 예를 올린 곳으로도 중요했다. 그런점에서 객사는 단순한 숙박시설을 넘어서 임금의 통치가 지방에 관철됨을 상징하는 정치적 장소였다. 따라서 모든 읍성 중심지에는 반드시 객사 건물을 짓도록 했고, 지방 수령의 집무실은 그 옆에 배치됐다.  

 

향교와 객사는 감영이나 동헌 같은 행정기관은 아니지만,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인 조선사회의 필수적인 관영 시설이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 많은 수의 향교와 객사가 남거나 복원되어 있다. 이 곳 나주에 있는 향교와 객사는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격식이 높아서 일찍부터 그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은 문화재들이다. 특히, 나주 향교와 나주 객사의 주요 건물은 학계의 관련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삼는 특별한 건물들이다.  


나주향교


나주향교 대성전 (2017.4. 나주)


국립 교육기관인 향교는 사립학교인 서원과 비교된다. 향교는 정부가 학식과 덕망을 갖춘 교사를 파견하고 논밭과 노비를 줘서 운영됐다. 반면, 서원은 사림이라 불린 지역의 유학자 집단이 운영한 사학이다. 그런데 향교와 서원은 여러면에서 건축적인 차이가 있다. 건축이 들어선 입지와 환경만 봐도 둘은 서로 많이 다르다. 서원은 지방 중심지를 벗어나 경치좋고 한적한 계곡 같은데에 지은 반면, 향교는 지방 행정 중심지 가까운 곳에 넓게 터를 닦아 세웠다.


나주향교도 읍성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다. 읍성과 인근 마을에서 다니기 쉬운 입지를 택한 것이다. 나주 향교의 또 다른 특징은 드넓은 평지에 지은 점이다. 경사지가 아닌 평지 향교는 대체로 이른 시기에 들어선 대도시 향교의 특징이다. 나주향교는 고려시대 전국 12개 지역에 처음으로 향교를 설치할 때 지은 것이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시대에 여러차례 수리를 거친 것들이지만, 현재 건물은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나주향교는 전국 향교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성균관, 강릉향교, 전주향교 등과 함께 손에 꼽히는 향교건축이며, 전국의 다른 많은 향교들을 대표한다.  


전국 대부분의 향교들처럼 나주향교도 인근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향교에 딸린 토지를 경작하고, 향교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을이 향교와 함께 있었다. 전국 어디를 가도 반드시 한 두 곳 쯤은 있기 마련인 공통지명 교촌이나 교동은 여기서 유래했다. 나주향교 도로명 주소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향교 배치유형의 차이


나주향교는 높고 긴 담장과 별도 출입문으로 교육공간과 제례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한 모습이다. 이런 외관은 다른 지역 향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흔치 않게 나주향교는 제례공간이 앞에 있고, 교육공간이 뒤에 놓였다. 향교의 공간 배치 유형은 두 가지인데, 교육공간이 앞에 서고  제례공간이 뒤면 전학후묘, 그 역순이면 전묘후학이다. 나주향교 같은 전묘후학 배치법은 이른시기 평지 향교에서 주로 보인다. 후대의 비탈진 경사지에 지은 향교들은 예외없이 전학후묘이고, 전국 대다수 향교가 이 방식이다. 나주향교 같은 배치는 극히 소수다.


향교 공간 배치 방식의 차이는 유교예법이 지형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 것이라 흥미롭다.

유교의 서열 중시 세계관에서 공자 위패가 있는 제례공간이 교육공간보다 상석이라는 점은 이해된다. 평지 향교에서 제례공간이 앞에 서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서울 성균관을 비롯해 나주와 전주, 경주, 진주 같은 당시 대도시에 일찍 들어선 평지 향교들이 전묘후학형 배치인 것도 그래서이다.

문제는 국토 대부분이 산으로 된 좁은 땅에서 넓은 평지에 향교를 신축하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위계와 서열을 중시하는 유교예법을 경사지에서는 어떻게 구현하느냐하는 문제가 생긴다.

해결책은 간단했다. 평지에서는 앞이 더 상석이지만, 경사지에서는 수평 거리상의 순서가 아닌 수직 높이상의 위계를 중시했다. 즉, 경사지의 상석은 지대가 높은 뒤쪽으로 본 것이다. 그 결과 현재 전국 향교의 90퍼센트 이상이 경사지에 지은 것인데, 이들 모두는 제례공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형 배치방식을 했다.

결국, 향교를 평지에 지을 때 적용한 유교예법이 경사지라는 지형 특성을 만나 변형된 것이다.

이 처럼 건축을 볼 때 구조기술만이 아니라 그 시대 관습, 종교, 사상 같은 인문학적 배경을 함께 알면 보는 재미가 배가된다.    


대성전
나주향교 대성전 (2017. 4. 나주)


나주향교 제례 공간인 대성전은 공자와 유교 성인으로 추앙받는 학자들의 위패를 안치하고 정기적인 제례를 올리던 곳이다. 중국 유학자는 물론, 신라시대부터 이름 있던 한국 유학자들 위패도 따로 두고 함께 제례 했다. 이런 행사는 유교의 정치이념과 사상을 백성들에게 확산(교화)하는 의미가 있었다. 대성전 말고도 부속채로 동서무라는 건물이 있다.  


나주향교 대성전은 전국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건축사적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됐다. 5칸 건물로 앞에 반칸 너비의 빈 공간을 뒀는데 이를 전퇴라고 한다. 제례를 올릴 때 대기하거나 의례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모든 대성전 건물이 필수적으로 갖추는 곳이다. 5칸으로 나뉜 건물에는 홀수 칸에 출입문을 달았고 짝수 칸은 흙벽에 공기가 통하는 살창을 설치했다. 이 역시 난방이 필요없는 제례 공간의 특징이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중국 주요 유학자들 위패를 순서에 따라 안치했다.  


동서무는 대성전 앞마당에 좌우로 있는 건물이다. 추가적인 중국 유학자와 한국 유학자들 위패를 각각 동무와 서무에 안치했다. 중요도에 따라 명단이 정해져 있고, 지방 행정구역의 위계와 규모별로 이곳에 안치하는 신위 숫자가 조금씩 달랐다. 동서무 건물은 폭이 좁고 길게 지었는데 일반 행랑처럼 생긴 외형이다.


나주향교 대성전은 임진왜란 당시 성균관 대성전(문묘)이 불에 타서 이후에 다시 지을 때 이 건물을 참고해서지었다고 할 만큼 가치 있는 건물이다. 실제로 두 건물은 건축 법식과 크기, 세부 요소가 서로 유사하다.


대성전 앞에는 넓은 대가 설치 되어 있는데 이를 월대라고 한다. 월대는 의례공간으로도 쓰고, 그 자체로 건물의 권위를 나타낸다. 왕이 사용하는 궁궐이나 격식 높은 유교 건물에 사용됐다. 나주향교 대성전 월대를 오르는 돌계단도 다른 지역 대성전에 비해 월등히 고급스런 모양을 갖췄다. 돌계단 양 옆의 옆막이 돌을 소맷돌이라고 하는데, 자연스런 곡선으로 공들여 조각하고, 끝에는 연꽃 문양을 장식해 꾸며 놓은 것도 보인다.


또 나주향교 대성전은 다른 대성전들이 전후면으로만 지붕이 있는 맞배지붕인데 반해 화려한 팔작지붕을 한 것도 특징적이다.  


명륜당


나주향교 명륜당 (2017.4. 나주)


교육공간의 핵심 건물은 강당인 명륜당이다. 일반적으로 명륜당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당이 있고, 양 옆으로 교사가 생활하는 방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또 명륜당 앞 마당으로는 향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기숙사라 할 수 있는 건물 두 동이 서로 마주 보고 배치됐다. 이를 동재와 서재로 불렀다. 상급반이 동재, 하급반이 서재를 썼다.


그런데 나주향교 명륜당은 다른 지역 향교들의 명륜당 건물과 확연히 다를뿐만 아니라 훨씬 고급 격식을 갖춘 것이 눈에 띈다. 보통의 명륜당 건물은 통으로 된 하나의 건물에 가운데 넓은 마루를 깐 대청을 두고 그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들인 형태가 일반적이다. 이때 중앙의 마루는 강의 장소고, 양쪽 방은 교사의 숙소가 된다.

이와 달리 나주향교 명륜당은 3칸짜리 독립 건물 3동을 약간의 간격을 두되 연이어서 지은 형태다. 가운데 건물은 지붕을 돌출시켜 격식을 높였고, 앞에 월대까지 설치한 모습이다.


이 같은 나주 향교 명륜당의 건물 형태는 조선시대 명륜당 중 비슷한 사례가 거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이 건물처럼 세 건물이 일직선상에서 연이어지고 가운데 건물 지붕을 위로 돌출시킨 모습은 향교가 아닌 객사 건물에 일반적인 양식이었다. 가까운 예로 나주객사 금성관의 형태도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구조를 했다.

건축역사학계에서는 고려시대까지 이 같은 형태의 건물이 많았던 것으로 보고, 나주향교 명륜당에 이른 시기 건축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나주객사 금성관


금성관 (2017. 4. 나주)


나주 객사 금성관은 규모와 건축양식, 세부 구성요소에서 다른 객사 건물들보다 빼어나게 화려하고 위엄을 갖춘 모습이다. 호남의 곡창지대이자 고려시대부터 이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지위를 나타내는 듯 하다. 특히, 금성관 정청(가운데 건물)은 조선시대 객사 중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한다. 정청의 지붕은 다른 객사 건물들의 맞배 지붕과 달리 팔작지붕을 했고 건물 앞에 놓인 월대도 매우 격식 있게 조성됐다. 언뜻 보기에 고려나 그 이전시기 궁궐 건물에 있는 전각과 유사한 외형으로도 보인다.  


현재의 금성관은 조선 초기 건립 이후 여러 차례 대규모 보수공사를 거친 건물이다. 건축양식은 조선 중기 모습이다. 이 건물은 역사적인 우여곡절도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 군청 등의 청사로 변형됐고 해방 이후에도 시청 건물로 쓰이던 것을 1976년 원래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한 것이다. 그럼에도 문헌상에 나타나는 건물의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어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 건물이다.  


객사 건물에서 중앙에 있는 건물을 정청이라하고, 좌우에 있는 건물을 방향에 따라 동익헌과 서익헌으로 부른다. 익헌은 날개채라는 의미다. 가장 중요한 건물은 정청인데 이곳은 지방 수령으로 파견된 관리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임금에게 예를 올리는 공간이다. 좌우 건물인 동익헌과 서익헌은 사신이나 출장 온 관원들이 숙소로 사용했다.


익헌도 위계가 명확했는데 동익헌에는 상급 관리들이, 서익헌에는 그보다 하급관리들이 투숙했다. 이런 위계는 건물 자체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객사는 정청의 위계를 가장 높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익헌과 서익헌도 등급을 둬서 격에 따른 차이를 표현했다. 금성관의 동익헌도 서익헌에 비해 칸수를 늘리고 지붕도 길게 설치했다. 상하 위계를 중시하는 유교 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나주객사 금성관 (2017.4.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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