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트 Sep 24. 2021

4년간의 창업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디자이너이고 창업했습니다.

    




창업을 하게 된 배경

스물 두 살. 사람의 수명이 늘어 120세까지 살게 되며, 직업을 최소 세 가지는 가지게 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때까지 나의 인생 계획은 ‘디자인과를 졸업한다→멋진 제품디자인 회사에 들어간다→최고의 디자이너가 된다’였다. 이 글을 통해 평생 누군가가 나를 고용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디자이너의 수명은 평균적인 직업의 수명보다 짧다고 느껴졌다. 내 인생에 진짜 계획이 필요했다.


제품디자인을 공부하기 전에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좋은 디자인은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고, 현실은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맞춰주는 일만 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영화감독은 메세지를 전달하는 멋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소극적인 디자이너의 모습은 나에게 두근거림을 주지 않았다. 학점만 열심히 받으며 남는 시간에는 영화를 만들고 친구들과 비장하고 심도깊은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었다. 그러다 <만추>라는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스토리도 좋았지만 영화가 정말 아름다웠다. 찾아보니 ‘미술 감독’이라는 직업이 있고, 류성희 미술 감독님이 만추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진행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건 내 일이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감독이 그리고자 하는 큰 그림을 함께 보고, 미술 감독이 주체적으로 움직이며 미술 파트를 총괄하는 일.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미술 감독이 될 수 있는지를 찾아봤는데 정해진 루트가 없었다. 한 분야에서 어느 정도 실력을 쌓아 올린 후 감독과 소통하고 팀을 이끌어 나가며 전체적인 미술/디자인 작업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역량이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다양한 분야에서 미술 감독이 필요할 것 같았다. 방송국에서도 소속사에서도 행사를 기획하는 회사에서도, 어디에서나 미술 감독의 역할이 필요했다. 그런 생각을 펼치다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갑자기 전공하고 있던 제품디자인이 다르게 보였다. 실력있는 제품디자이너는 기획력과 디자인 역량, 문제 해결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미술 감독에게도 필요한 역량이었다. 남의 디자인을 해준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제품디자이너 역시 주체적으로 만드는 사람의 마음과 메세지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할 수 있는 모든 프로젝트를 다 진행해보았다. 공모전에 도전하고 디자이너로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사진전도 열고, 창업동아리도 하고(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바를 빌려 외국인 교환학생 친구들을 위한 파티도 열었다. 그렇게 졸업 후 프리랜서 디자이너로서 활동하며 해외 취업을 준비하던 중, H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대학생 때도 종종 각자의 프로젝트와 열정을 공유하곤 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친구와 함께라면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하지 않고도 ‘바로 나만의 일을 만들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 5년은 사회생활을 해 볼 계획이었다. 회사에서 배우는 점도 분명 있을 테고, 역량과 생각이 커진 후 나만의 일을 펼쳐보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변수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눈 H는 그릇이 크고 따뜻한 마음속에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해도 힘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와 생각이 잘 맞고, 가지고 있던 역량이 보완되는 관계였다. 역량과 경험은 부족할지언정 굶지는 않을 것 같고, 같이 머리를 싸매고 계획하고 실행하면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둘 다 그러고 싶다는 에너지 수준도 굉장히 높은 상황이었다. '꼭 취업이 아닌 창업을 통해서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기에, 거의 한달을 고민하고 한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2017년 여름이었다.




지난 4년간의 창업 이야기

#1 만드는 것과 공간, 그 속의 제작자들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창업
    [더오브젝트] 2017.6月~2018.3月 /9개월
각종 공모전과 해커톤에 함께 도전한 동료들

가장 처음에는 제작자들을 위한 공간을 운영해보고 싶었다. 다양한 디자이너들, 메이커들, 예술가들이 방문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전시도 하고 협업도 일어나는 공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렸다. 이름을 고민하고 공간을 둘러보고 인테리어는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사람들이 오게 될지, 돈은 어떻게 벌지를 이야기하는 과정이 참 즐거웠다. 혼자라면 어려웠을 부분도 함께 고민하니 진짜 뭔가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내 역량을 제대로 펼쳐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의 형태로 기획하고 매물을 찾아보고 예산을 짰다. 최소 6천만원 이라는 돈이 필요했고, 우리는 그 돈이 없으니 일단 훈민님의 작업실 겸 집에서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먼저 시작해보기로 했다. 나의 디자인 외주 일과 H의 시제품 제작 일을 함께하며 외주 홈페이지를 만들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우리의 기획과 디자인 역량을 활용해서 나가는 공모전과 해커톤마다 상과 상금을 받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각종 프로젝트 영상]

https://vimeo.com/230332464

https://vimeo.com/240698650

https://vimeo.com/240699939




#2_유목민 프로젝트팀, 별의별 일을 다 해 보다.
    [언더그로잉] 2018.4月~2019.3月 /1년
철거부터 리모델링까지 모두 직접했던, 작업실이자 아지트 '스페이스 그래비티'

1년 정도 우리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감사하게도 다양한 제안들이 들어왔다. 협업 제안부터 많은 일거리들이 들어왔고, 우리는 가리지 않고 거의 다했다. 사무실로 사용할 공간을 세 번이나 제안받기도 해서 유목민처럼 계속 움직이기도 했다. 그맘때쯤 우리와 비슷한 대전의 청년 창업 팀들과 깊이 있게 교류하게 되고, 유성구의 지하 한 공간을 공용 작업실로 만들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직접 철거하고 인테리어를 해서 공간을 오픈했다. 작업실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아지트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픈 파티를 열어 친구들을 초대했다. 저녁이면 하나둘 모여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누곤 했다. 그것이 확장되어 ‘스페이스 그래비티’라는 이름의 메이커스페이스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법인을 설립하고 팀명을 더오브젝트에서 언더그로잉으로 바꾸었다. 법인 언더그로잉은 세 가지 서비스를 운영했다. 


언더그로잉의 세 가지 사업군


[the object] : 시제품 제작 사업

: 3D프린터를 활용한 시제품 제작 서비스로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시각화하고 구체화해주는 일이었다.


[Make Box] : 메이커 키트

:  창의 융합 메이커 키트를 기획&제작하였으며, 특허청 지식재산연수원을 기점으로 다양한 교육을 진행했다.


[Space Gravity] : 메이커스페이스

: 제작자를 위한 공간을 운영하였으며 다양한 교육과 프로그램, 제작 컨설팅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공간 셀프 인테리어 영상]

https://vimeo.com/262833805




#3 시제품 제작 서비스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다.
    [그래비티컴퍼니] 2019.3月~2020.5月 /1년

동시에 세 가지 서비스를 운영하니 힘이 분산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다섯 명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시제품 제작 사업을 집중해서 키워보기로 했다. 이름도 일도 분산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여 회사명을 ‘그래비티컴퍼니’로 변경하고 사업을 통합하였다. 메이커 키트 사업은 완전히 접고, 메이커스페이스를 운영하며 시제품 제작 서비스를 확장했다. 컨설팅-디자인-설계-3D프린팅-후가공까지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했고, 그중에서도 대학생과 연구원들이 가장 많이 방문해주었다. 나의 역할은 계절마다 바뀌었다. 전공을 살려 디자인목업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채로운 일들을 했다. 그래비티컴퍼니에서는 팀을 관리하는 내부관리자, 고객과 팀을 연결하는 역할,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데이터 분석 등의 일이 메인이었고 가끔은 설계와 가공도 함께했다. 하지만 내가 앞으로 계속하고 싶은 일은 디자인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기 때문에 놓치지 않고 그래비티컴퍼니의 모든 디자인을 만들어 나갔다. 브랜딩을 위한 회의를 준비하고 함께 아이디어를 펼치고, 변화하는 우리 팀의 옷을 계속 만들어주었다. 우리 팀의 역량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계속 탐구해나갔다. 그중에서도 그래비티컴퍼니의 BI를 구상하고 전체적인 방향을 함께 잡아가는 일이 가장 즐거웠다. 큰 BI의 틀을 잡고 그걸 잘 보여줄 수 있도록 콘텐츠를 기획하고, 블로그를 운영하고, 각종 인쇄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우리의 몸집을 한 단계 더 키우기위해서 '맞춤형 제조 서비스'로서의 대대적인 개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4 ‘크리에이티브 프로젝트 그룹’으로 방향을 변경하다.
    [그래비티컴퍼니 2.0] 2020.6月~2021.5月 /1년
BI를 개편한 그래비티 컴퍼니의 홈페이지 이미지

그러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팬데믹 상황이 닥쳤다. 세 달이 지나고 여섯 달이 지나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새로운 기획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자가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사무실과 팀의 모든 세팅이 시제품 제작에 맞춰져 있던 터라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팀원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싶었다. 흥미있는 주제에 대해 탐구하고 우리의 역량을 분석하며,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하에 있던 작업실 두 곳을 정리하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골든 서클을 활용해서 각자의 why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2주간의 고스트 프로토콜도 진행해보았다. 제품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서 인터뷰도 해 보고, 콘텐츠와 플랫폼을 계속해서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나와 우리의 욕망과 돈에 대한 생각, 창업한 이유 등의 깊이 있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성장에 대한 욕구가 큰, 주체적인 나만의 일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건 사실 우리의 모습이었기에 그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다. 이 과정에서 그래비티컴퍼니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크리에이티브 프로젝트 그룹’으로 개편했다. #인사이트 #가치실현 #work #making 등의 키워드를 주제로 #융합 #콘텐츠 #기획의 방향으로 그래비티 2.0의 방향을 조정했다. 


[유튜브 채널 : 그래비티 픽처스]

https://www.youtube.com/channel/UCsEmq2DSP-vUGZ5d30YMNJA





4년간의 창업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5 각자 홀로서기의 시간을 가지다.
    2021.6月~2021 8月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일의 주제는 찾았지만, 쉽게 시작이 되지 않았다. 4년간 7개의 작업공간, 3번의 셀프 인테리어, 11명의 팀원, 3개의 팀명, 3개의 브랜드, 500건이 넘는 시제품 제작, 셀 수 없이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우리의 너무 많은 것들을 쏟아부은 듯했다. 새롭게 다시 일어서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됐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4년간 수없이 많은 문제를 마주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큰 산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어떤 문제가 닥쳐도 서로를 지지대 삼아서 해결해왔기 때문에 쉽게 이겨낼 수 있었는데, 이번의 문제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나오는 방식으로의 이별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남들은 지치고 번아웃이 올 때 퇴사를 하던데, 나는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는 생각과 감각이 최고치일 때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이별의 3단계를 맞이하였다.

 1단계  슬픔과 허전함, 아쉬움을 느끼며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다. 

 2단계  갑자기 엄청난 자유로움을 느끼며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만끽했다.

 3단계  어느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어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려 노력했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탐색하고 계획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별의 3단계를 거치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믿을 것은 내 마음 하나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기에 내 마음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장 많이 확보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방법을 몰라 어려웠지만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며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나가고 있다. 요가와 명상을 하고, 운동을 하고, 새로운 장소에 몸을 던지고, 여행을 떠나고,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썼다. 


이 시간들을 통해 찰나의 순간을 담은 사진 브랜드 ‘無限小’와 취향과 몰입의 공간 ‘블랙홀하우스’를 만들게 되었다. 브랜드라는 관점으로 나의 취향과 강점을 풀어내 보고 싶어서 기획했는데, 이 녀석들이 매개가 되어 사람들과 소통하고 더욱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앞으로 나의 굵직한 선을 따라가면서 크고 작은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만들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3개월의 시간 동안 팀 안에서는 보지 못한 나의 역량과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취향과 몰입의 공간, 블랙홀하우스 @blackhole_house
찰나의 순간을 담은 디자이너의 사진 브랜드, 無限小 @muhan.so



 


4년동안 회사와 나를 동일시하며 온몸을 던져 일했다. 그랬던 회사를 나오면서 두렵고 막막했지만, 오히려 나오고나니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4년간 배우고 쌓아왔던 모든 감각을 다시 활용하여 이제는 회사가 아닌 나로서 다시서기를 해보려고 한다. 지금 당장 이룰수는 없겠지만, 하나씩 계획하고 실행하면 생각하고 있는 미래의 모습에 조금씩 가까워지리라 기대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