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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 Sep 24. 2021

디자이너가 창업했을 때 좋은 점과 어려운 점

디자이너인가 창업가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디자이너 모드와 창업가 모드

=

지난 4년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만큼이나 나를 끈질기게 따라왔던 내적 질문이다. 나는 디자이너이고 창업을 했는데 두 가지 버전의 모드가 달랐다. 존경하는 교수님께서는 디자이너는 같은 장미를 보더라도 매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사물과 현상의 차이점을 찾아내고 감각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창업가에게 요구하는 역량은 다르게 느껴졌다. 혼자 일하기보다 팀의 목표를 설정하고 팀원 모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 함께 달려 나갈 수 있어야 했다. 어느 정도까지 예민하게 파고들어야 하나? 내가 할 수 있음에도 일을 맡겨야 하나? 이런 고민이 될 때면 모든것이 어려웠다.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4년의 모든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이건 은근히 계속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자연스럽게 조금씩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문제들은 해결하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도 한가 보다. 정말 긴 고민 끝에 나를 ‘창업한 디자이너’라고 정의할 수 있었다. 정말 단순한 문장인데도 이 키워드를 찾고 나니, 오래 묵은 고민이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창업가도 아니고, 디자이너도 아닌 것 같아서 고민하던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결국 내가 찾은 답은 ‘디자이너로서와 창업가로서 둘 다 잘 해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디자인도 잘하고, 팀도 잘 이끌어서 가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 싶다. 당연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장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어려운 만큼 너무나도 해내고 싶은 일이기에, 해내고 나면 분명히 나만의 견고한 영역이 생길 것이다. 이렇게 둘 다 열심히 하리라 마음먹어도, 여전히 크고 작은 선택들 앞에서 매번 고민이다. 하지만 이 또한 고민하고 선택하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즐겁다.


디자이너 모드와 창업가 모드, 둘 중 정말 고민이 많이 되었을 때는 디자이너임을 약간 놓았던 적도 있었다. 디자이너보다는 공동창업자로서 팀을 공동의 목표로 함께 달려갈 수 있도록 하면서 정말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던 시기도 있었다. 밀려들어 오는 일들에 디자인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팀이 있어야 나도 있다고 생각해서 했었던 일이고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가장 현명한 결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꿈꾸는 나는 점점 작아지고 사업을 힘겹게 끌고 가는 내가 남았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나를 위해서도 팀을 위해서도 좋지 않았던 결정이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이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창업했을 때 좋은 점과 어려운 점

이리저리 구르며 직접 경험한, 디자이너가 창업했을 때의 장점 세 가지와 단점 한 가지를 적어보았다.


 1. 아이디어의 빠른 시각화가 가능하다.

가장 큰 장점이다. 요즘같이 SNS를 통해 아이템을 다양하게 노출시킬 수 있는 환경에서는 정말 중요한 스킬이다. 디자인 외주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면서도, 디자인적인 시각을 활용해서 조금 더 도전적인 다양한 아웃풋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 비용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로고부터 홈페이지, 명함, 브로슈어, 인스타그램, 블로그까지 디자인과 마케팅에 관련된 모든 것을 직접 만들고 운영할 수 있다. 또 목업과 렌더링을 활용하면 진짜 세상에 존재하는 제품/서비스처럼 보여질 수 있기에, 컴퓨터로 작업한 목업 이미지를 보고 몇몇 사람들은 실제로 제품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공모전과 창업대회에서는 종종 이 역량이 돈(지원금)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4년간 포토샵 목업 이미지를 만들고, 모델링&렌더링을 하고, 시제품을 제작하고, 홍보 책자를 만드는 등 아이디어가 있다면 빠르게 프로토타이핑을 해왔다. 아이디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빠르게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창업에서의 가장 큰 장점이다.  

   

 2. 직업 특성상 항상 새로운 이슈와 트렌드를 살피고 있다.

디자이너라면 아마도 새로운 장소에 가보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남들보다는 조금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인풋을 받아들이는 것을 이미 즐거워하는 사람들, 트렌드에 관심이 많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만큼 새로운 아이디어나 틈새시장을 발견할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한 번의 아이디어로 단숨에 성공할 수는 없다. 아이디어를 계속 업그레이드하며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대상에게 제안해야 한다. 이런 감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쌓아 올려진 감각 위에 나만의 것을 더하고 추가하고 새로운 것들을 접목해나가야 한다. 디자이너가 창업에 유리한 지점에 있는 이유이다.


 3. 외주나 협업으로 고정 수익을 창출하면서 내 일을 병행할 수 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디자이너가 필요하다. 우리 역시 외주를 병행하며 일을 시작했다. 다만 디자인 스튜디오가 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에, 외주를 하면서도 꾸준히 아이디어를 내고 사람을 모으고 일을 만들었다. 항상 계획대로 되지는 않지만, 외주의 비중을 잘 정해두지 않으면 일의 우선순위가 뒤바뀔 수 있기에 항상 계획을 세우고 점검해볼 수 있어야 한다. 나 역시 현재 일주일에 이틀은 다른 팀에 소속되어 전체적인 디자인 틀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안정적인 수입이 주는 힘은 대단하다. 다른 도전을 해 볼 수 있는 경제적인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렇게 가능성을 가진 팀들과 연결되어 꾸준히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창업했을 때 어려운 점은,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서 다 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팀의 가능성을 작아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이 깊어졌을 때는 디자이너라는 생각보다 ‘나는 창업가이고, 팀을 잘 운영해서 더 큰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하는 역할이 조금 더 중요하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디자인 퀄리티를 내려놓아야 하는 일도 정말 많았고, 디자이너로서의 이상보다는 타협해야 하는 시간도 정말 많았다. 이런 일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정말 수치스러울 만큼 싫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결정이 옳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겠지만, 나의 이상 이전에는 우리 팀이 있고 그 이전에는 고객과 사람들이 있으므로 마냥 고집할 수만은 없다. 그럼에도 존경하는 교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디자이너는 이상을 꿈꾸며 가장 미학적인 것을 제안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하셨다. 이상을 추구하되 어떤 지점에서는 타협하는 일, 생각보다 쉽지 않다. 모든 것이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 고민에서 한 발 나와서 생각해보면 나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창업한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군에 종사하는, 지구상에 있는 정말 많은 사람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이런 고민과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큰 어려움이나 방해 요소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디자인과 창업이 만나는 지점에 브랜딩이 있다.

나는 디자인도 창업도 잘하고 싶다. ‘주체적인 디자이너로서, 심미적이고 가치 있는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다. 디자인적인 역량을 잘 활용해서 가치 있는 일들을 만들어 내고, 끊임없이 미학과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디자인과 창업이 만나는 지점에 브랜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팀의 스토리, 브랜드 전략, 디자인 경영 등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브랜드를 만드는 일은 창업한 디자이너가 참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든 디자이너가 브랜딩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브랜딩을 하기 위한 기본 스킬을 보유하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브랜딩까지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다.


 ‘좋은 브랜드는 좋은 책, 좋은 사람과 같다.’

by 임태수 님 -브랜드 브랜딩 브랜디드-

브랜딩을 설명할 수 있는 정말 적절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브랜딩은 예쁜 포장이 아니다. 좋은 브랜드는 좋은 사람과 같이, 괜찮은 생각을 하고 따뜻하기도 하면서 쿨하기도 한 것 같다. 사람마다 좋은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점은 모두 다를 것이다. 객관적인 기준은 없겠지만 떠오르는 몇 가지 덕목들이 있기는 하다. 내 곁에 두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 내 곁에 두고 함께하고 싶은 브랜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덕목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해볼 만한 화두이다. 그리고 그걸 발견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디자이너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시각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디자이너는 직업이 아니다. 오직 태도일 뿐이다.’

by László Moholy-Nagy

디자이너로서의 나의 정체성에 뿌리가 되는 문장이다. 더 나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태도로서의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쉽지만 어렵다. 수동적인 디자이너에서 한 단계 진화해서, 디자이너로서 생각하고 기획하고 아웃풋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받아들였다. 좋은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로고와 홈페이지만 만들었다고 해서 브랜딩을 했다고 할 수 없다. 태도로서의 디자인, 태도로서의 브랜딩을 통해 그 속에 생각과 이상을 오롯이 담아내야 한다.


나도 글로 쓰기는 썼지만,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항상 이상을 추구해야 하기에 나 또한 이를 잊지 않고 계속 더 나은 디자이너가 되어, 더 나은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





디자이너 출신의 CEO들이 많이 있다. 매거진B를 만든 JOH의 조수용 대표, 배달의 민족 김봉진 대표, 모빌스그룹의 모춘님과 소호님까지 디자이너가 창업하면 좋은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똑같이 수없이 많은 고민과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을 테고, 여전히 그러한 과정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꼭 창업하지 않더라도 디터 람스는 브라운에 소속되어 40년간 수석디자이너로서 주체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다.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 라즐로 모홀리나기 역시 한가지 직업인으로서 활동하기보다는 다방면으로 도전하고 실험하며 좋은 영향력을 만들어 나갔다.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방법과 직업은 다양하다.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삶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고 했다. 창업이나 취업, 혹은 그사이 어느 지점에서라도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만들어 나가는 삶을 살아가고 싶고, 그 고민과 탐구의 과정을 조금씩 기록하고 공유해 나가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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