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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녁주 Dec 02. 2023

끝의 시작, 시작의 끝


1.


2019년 7월은 아르바이트 계약이 끝나는 달이다.

스탠다드에이에서 일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고,

승일 실장님께 아르바이트의 연장 여부를 요청한 지 3박 4일 워크숍이 끝나고 2주가 흘러가는 시점이었다.

아르바이트를 더 안 해도 그만이지만, 내 생활을 유지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금은 필요했기에, 지금 하는 일이 싫지 않았기에

무엇보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아르바이트 계약을 연장하고 싶었고, 연장되길 소망했다.

"잠깐, 쉬는 시간 좀 갖자."

습하고 무더운 마감실에서 테이블 상판을 열심히 마감하던 중이었다.

실장님의 쉬는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랜 아르바이트 감각이 알려주었다.

그것은 실장님이 내게 연장 여부를 전달하기 위한 시간이었고, 그 예상은 하나도 틀림없이 꼭 들어맞았다.

쭈뼛쭈뼛 2층 회의실로 올라가 실장님과 마주 보고 앉았다.

"결론부터 얘기할게. 미안하지만 우리는 너와 더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아."

실장님은 스탠다드에이의 입장을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온전히 팩트만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모습이 눈에 보였다.

내가 원하면 정규직은 안되지만, 아르바이트로써 3개월씩 기간을 연장해도 된다는 것이 실장님의 결론이었다.

애초에 정규직은 바라지도 않았기에, 그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꿈을 조금 더 연장하기로 했다.

마치 입에 산소호흡기를 댄 것처럼. 후우- 후우-

10월 말까지, 내 꿈의 실오라기를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셈이다.

또 다른 발걸음을 내딛기 위한 생각과 마음이 담긴 선택이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내 땀이 그 가치를 증명해주리라.

내 옷에 묻은 진한 오일 때가 그것을 말해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1층으로 내려와 남은 테이블 상판들과 무더위 속 씨름을 했다.

스탠다드에이에서의 제2막이 시작된다.


2.


계약이 종료된 일은 한 가지가 더 있다.

"혁주 씨, 그건 꽤 좋은 비유인 것 같아요! 비유 참 잘해 ~ 칭찬해."

경진(직장동료; 특징 : 내 비유를 좋아한다)은 농담 섞인 비유에 격한 동의를 해주었다.

마감실에서 둘이 있는 시간이 많은데, 경진과는 이것저것 만담과 농담을 자주 하는 케미가 좋은 동료다.

"형, 남자친구는 계약직이고, 남편은 정규직 같지 않아요?"

남자친구는 언제 계약이 끝날지 모르고, 남편은 어느 정도 관계를 서류에서 보장해준다고 그에게 말했다.

유부남의 여유는 정규직이기에 오는 것이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계약직의 남자친구는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해야한다.

주변의 동료들은 계약의 여부와 상관없이 스윗한 사람들이 많다.

(스탠다드에이는 실장님 4명을 포함해서 지원팀장님까지 총 5명의 정규직과 남자친구로서 계약을 맺은 4명의 동료, 나머지 2명의 무직이 일하는 곳이다.)

나의 비정규직 계약은 7월의 장마가 오기 전에 끝났다.

계약이 끝난 뒤,

내린 장대 같은 장맛비는 갈라져 버린 마음의 틈 사이로 속절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나의 사랑을 충분히,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버티고, 이끌고, 애써 마음을 다잡아왔던 나날들이 단 세 마디에 와르르 무너졌다.

결국 그 세 마디에 무너지고 마는 나약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신뢰하지 못하는 사이에 더 이상의 시간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너는 언제나 왜 나를 더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매달리기 일 수였지만, 나의 사랑은 항상 MAX의 상태로 너와 부딪혔다.

보고 싶다고 하면 늦은 새벽에도 달려갔고, 나의 여가와 일상을 쪼개가며 너의 시간에 맞췄다.

너와 만나지 않는 날엔 행여라도 너의 마음에 상처가 될까 봐 누굴 만나기조차 조심스러웠다.

네가 자주 울기에 손수건은 언제나 가방에 있었고,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너의 말을 듣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했다. 약을 챙겨 먹는 일이 잦아 알람을 맞춰놓고 너보다 더 잘 챙겨준 나였고,

오가며 생각날 때 꽃을 선물했으며,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항상 너와 공유했던 게 나의 사랑이었다.

그게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라고 확신했다.

큰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양의 물을 조금씩 덜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8개월간의 만남 동안 우리는 약 3번의 이별이 있었지만, 서로 마음을 다잡아 여기까지 잘 왔다고 믿었다.

결국,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못 되나 보다. 너를 더 나은 사람으로,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노력한

나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네가 너의 모습을 되찾고 나아질 때마다, 나는 나라는 사람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고,

어느새 텅 빈 내 모습이 눈에 선명했다.

나의 마음에, 너의 마음에 물이 비었을 때 너는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그렇게 무서운 너의 눈을 처음 보았고, 감춰왔던 너의 속마음을 그제야 알았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다시 담을 수 없는 말을 뒤로 한 채

더 상처가 커지기 전에 둘의 시간을 여기서 멈추자고 부탁했고

비로소, 나의 계약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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