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는 능력 좋은 원숭이 손오공이 끝을 모르고 날뛰다가 부처의 심기마저 거슬러 참교육을 당하고 자숙의 시간을 가진 뒤, 신실하지만 왜인지 계속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삼장법사를 만나 함께 서쪽 나라에서 당나라로 불경을 가지러 가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서유기를 있는 그대로 재미난 이야기로만 읽기엔 조금 아쉽다. 왜냐하면 500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 많은 문학작품 중 4대 기서로 꼽히는 소설이라면 분명히 사람들의 마음에 어필하는 어떠한 되짚어 볼만한 포인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유기는 오승은이 16세기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오승은의 서유기는 그 당시 중국에 전승되던 민간 설화들을 섞고 재가공한 결과물로 백퍼센트 한 사람의 창작물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소설이다.
만약 그 결과물이 시원찮았다면, 서유기는 난잡한 이야기라는 평을 듣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겠지만. 그 결과물이 수 백년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면? 그것은 중국인의 집단무의식의 정수가 담겨 인류의 보편적인 정서를 자극하는 문학작품이 되는 것이다.
손오공은 태생부터 남다른 세계관 최강자다. 시작부터 너무 똘똘하고 강해서 온갖 문제를 해결하고 원숭이 무리의 대장이 된다. 그렇게 대장이 되어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좋은 곳에서 살고 좋은 것을 먹고 안락한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한 삶을 살다보니, 언젠간 수명이 다해 이런 아름다운 삶이 끝난다는 사실이 절망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래서 손오공은 죽지 않는 법을 찾아 방랑에 나선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보고 출가한 부처를 원숭이로 오마주한 오승은의 블랙코미디 정신이 엿보인다.
손오공이 아는 죽지 않는 법은 종교를 통한 영생이다. 불교적 이상을 성취해 부처가 되거나 도교적 이상을 성취해 신선이 되면 죽지도 늙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손오공은 신선을 찾아 도술을 배워 수명 연장의 꿈을 이루게 된다. 실제로 종교적 수행과 수명 사이에 드라마틱한 연관관계가 증명된 경우는 당연하게도 없다. 다만 그 나름의 의미가 있고, 그것을 잠시 짚어보자. 종교적으로 어느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는 죽고 사는 것이 아무 차이가 없게 된다. 살고 싶어하고 죽기 싫어하는 마음 같은 것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부처에게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분명 육체적으로는 죽겠지만 죽음이라는 단어를 포함해 특정지울 수 있는 특정성 자체가 부처의 마음에는 없다. 그러므로 종교적으로 수행을 하면 자아를 가지고 영생을 누린다는 개념은 그 원류가 세속적으로 변형되어 본래의 상징성을 잃어버린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손오공은 그러고서는 본격적으로 더 막나가기 시작한다. 이제 도술까지 배워 무서울 것이 없어진 손오공은 스스로를 하늘을 다스리는 큰 성인이라는 의미의 제천대성이라 칭하고 하늘로 쳐들어간다.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먹을 복숭아를 훔쳐먹고 태상노군이 지어놓은 단약도 훔쳐먹는다.
왠만한 군대로도 감당이 안되니까 그냥 적당히 오공을 달래서 놔두던 옥황상제도 더 이상은 봐줄 수가 없었다. 결국 불교의 대장격인 관세음보살이 나서서 손오공을 직접 제압한다. 이것은 하나의 순리를 보여준다. 도덕이고 권력이고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대로 날뛸 수 있다. 손오공처럼 영리하고 강인하다면 세계 최고의 권력한테 개기면서도 살 수 있다. 그러나 관음보살에게는 제압당할 수 밖에 없다. 왜냐? 관음보살은 곧 세상의 순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손오공은 관음보살을 벗어날 수가 없다. 관음보살은 이미 손오공의 마음 속에도 있기 때문이다. 손오공도 세상의 일부이고 순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손오공에게 닥친 순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업이 있으면 다운이 있다는 순리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음식을 먹고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사람과 맞먹고 세상에서 제일 강한 원숭이가 되고 나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도파민이 터질때는 좋았지만 더 자극적인 게 없는 지금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 것이다.
거기에서 다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현실에 불만족해 화가 나는 것이고, 그럴 때 엉뚱한 짓을 하면 감당 안 되는 사고를 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한 원시 부족은 이러한 원리를 아예 관습으로 정해 놓았다.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한 전사가 의기양양하게 마을로 돌아오면, 2주간 그를 격리해놓고 풀만 멕여 기질을 죽인다.
오공도 위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끝내주는 활약을 했으니 이제는 그만큼 반대로 끝내주는 격리를 당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오공은 500년간 돌밑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이제 삼장법사가 등장하는데, 삼장법사는 신실한 스님으로 신심은 충만하지만 자기 앞가림을 못하는 모습을 굉장히 자주 보여준다. 저자는 종교적 가르침에만 집착한다는 것이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는 일인지를 삼장법사의 얼빵함을 통해 드러낸다.
삼장법사는 높은 뜻, 이성, 초자아를 상징한다. 동시에 손오공은 욕망, 힘, 감정을 상징한다. 이성만으로는 원하는 것을 실현할 힘이 없고, 힘으로 간단하게 해결해 버리면 해결한 의미가 없다.
손오공은 눈 깜빡할 새에 10만8천리를 가는 근두운을 타고 1초만에 당나라에서 서역까지 날아가서 다시 1초만에 경전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서유기에서는 반복해서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 '공덕을 쌓기 위해서는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한다.' 라며 오공이 삼장법사와 걸음을 맞춰 산과 강과 요괴 소굴을 건너 가야함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가는 길에 저팔계와 사오정 그리고 백마를 만나 동료로 삼는데, 그들은 모두 손오공처럼 속죄를 위해 삼장법사 일행에 합류한다.
저팔계는 돼지 머리를 한 생김새와 부적절한 섹스로 쫓겨난 이력을 고려했을 때 욕망, 그 중에서도 단순하고 본능적인 식욕이나 성욕 같은 욕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백마와 사오정은 안타깝지만 존재감이 없다.
당나라에서 서역까지 가는 여정은 끊임없이 요괴를 만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요괴는 저팔계와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욕망을 상징한다. 모든 요괴가 하는 일은 두 가지 뿐이다. 미녀를 납치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일. 즉, 성욕과 식욕이다.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점은 요괴의 욕망은 항상 혼란을 일으키고 타인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충족된다는 것이다. 요괴는 두려움과 분노, 원망과 좌절을 일으키는 존재다.
그리고 삼장법사는 혼자서는 요괴에 대항할 힘이 전혀 없다. 언제나 요괴와 맞서 싸우는 것은 손오공이고 손오공마저 감당을 못할 때는 보살과 도인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외압과 부정적인 감정 앞에서 이성은 무력하다. 그것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실제적인 힘이고 또 다른 욕망과 감정이다. 그리고 마지막 비장의 수는? 하늘에게 맡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뒤에는 스스로 했던 선택을 믿고 자연스럽게 일이 해결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다. 최선을 다한 뒤에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뭐라도 더 해보려고 가망 없는 시도를 계속 하는 것과, 지향점은 잊지 않되 억지로 무얼 하는 대신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것은 삼장과 손오공의 관계다. 삼장법사는 손오공이 말을 안들으면 두통을 줘서 손오공을 통제한다. 삼장법사는 힘으로 손오공을 이길 수는 없지만 손오공을 괴롭힐 수는 있다. 생각이 감정을 이길 수는 없지만, 생각은 원하는 생각을 하루종일 붙잡고 있으면서 머리 아프게는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생각 쪽으로 의지가 모아진다.
서유기는 중국인의 축적된 삶의 지혜와 오승은의 사회와 종교에 대한 통찰력이 조합된 중국의 대표 문학이라고 할만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