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한 사람이 달리는 수레에서 떨어졌을 경우에는 다치기는 해도 죽지는 않지. 뼈나 관절이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지만 보통사람들보다 덜 다치는 것은 술에 취해 오히려 그 정신이 온전히 보전되었기 때문이네. 수레를 탔다는 것도 모르고 떨어진 것도 알지 못하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각, 놀라움과 두려움의 감정이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지. 술에 취한 사람은 어떤 사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
술에 취한 사람이 술로 인해 정신의 온전함을 얻은 결과도 저만큼 대단한데, 자연의 도에 정신을 온전히 맡긴 자는 어떻겠는가? 성인은 자연의 이치에 몸을 맡기고 있기 때문에 무엇도 성인을 해칠 수 없다네. 복수를 하려는 사람은 원수를 미워할지는 몰라도 원수가 지닌 막야나 간장과 같은 칼 자체를 미워해서 부러뜨리려고 하지는 않지. - <장자 외편>
마약을 해본 적은 없지만, 마약의 생리학적인 효과와 사용 후기를 종합해 보았을 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술에 취한 사람이 술로 인해 정신의 온전함을 얻은 결과도 저만큼 대단한데, 마약에 정신을 온전히 맡긴 자는 어떻겠는가?'
하지만 술과 마약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이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질적 공리주의로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이 저서에서 독자에게 던졌던 질문이 있다. '배부른 돼지가 될 것인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것인가.' 술과 마약에 탐닉한다는 것은 밀에게 '이성을 잃고 만족하는 돼지가 되겠다'고 대답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이성을 대가로 내주고 얻은 만족도 오래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술과 마약이 주는 만족은 개인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의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왜 술에 취하는 것을 도를 얻는 것과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했을까? 왜냐하면 술에 취하는 것과 도를 얻는 것 둘다 도를 따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라는 것은 도가도 비상도라는 말이 있듯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자연스러운 이치와 비슷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종교적 체제에서 절대적인 원리로 숭상받는다는 점까지 고려해보면 기독교로 치면 하느님의 뜻, 불교로 치면 불성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술에 취하는 것은 권장할만한 것이 아니고 도를 얻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둘 다 도를 따라 사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 차이는 이성의 유무에 있다. 자연스러운 이치, 즉 도라는 것은 모든 자연 속 존재에 내재해 있다. 강물과 식물, 동물은 물론 인간 속에도 내재해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고 의식이 있어 무작정 도를 따라 사는 대신 자의적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말하자면 야생 동물처럼 살지 않고 합리적 선택을 하고, 과거와 미래를 고려해 계획적으로 행동하며, 사회적인 규범과 도덕을 고려한다. 그러나 이 자의적 선택이라는 것은 걱정과 불안, 부자연스러운 고통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요소의 일부는 설령 완벽한 계획에 따라 성공가도를 밟으며 살더라도 완전히 떨칠 수 없는 자의식의 본질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인간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 자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스러운 삶을 되찾고 싶어한다. 그리고 여기서 알코올 중독자와 성현이 나누어진다. 술과 마약을 통해 자연스러운 삶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은 이성을 아예 포기해버린다. 취한 상태에서는 명료한 사고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즉 사회인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물론, 취한 상태에서 자신을 조절할 수는 없어도 복용량과 빈도를 조절할 수만 있다면 하나의 취미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선 일상을 유지하고 새로운 영감을 받는 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반면, 성현들은 이성을 자연스러운 삶에 통합한다. 성현들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제대로된 판단을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술이 깼을 때 고통 받고 술에 취했을 때 해소하는 식으로 분열되있지 않다. 말하자면, 건강을 해치지도 않고 자신이나 사회에 파괴적인 행보를 보이지도 않으면서 영원히 깨지 않는 술에 취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복이라는 것이 어느정도 과장된 면은 있을 지언정 완전히 허황된 소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노자식 표현으로 하면 도에 따라 사는 것이고, 불교식 표현으로 하면 해탈해 지복을 누리는 것이고, 기독교식으로는 약간의 의미 차이는 있으나 신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서 자의식을 가지고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할 필요가 있으나 그것은 어느정도 필연적으로 불안, 외로움, 방황의 가능성을 수반한다.
또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흔히 욕망과 감정, 직관과 예술성을 배재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 때문에 합리적인 판단의 한계에 부딪히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교육의 부재나 개인적 약점의 문제로 합리적인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고, 감당해야 할 상황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아 합리적으로 판단 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제대로된 교육을 못 받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판단을 내리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도시 빈민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은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과 평균 이상의 사회적 성취를 했지만 삶의 만족도는 낮은 사람들은 자의식을 기반으로 한 판단으로는 삶을 개선하지 못한다는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은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교육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알게 됨으로서 삶을 개선하거나, 합리성만 고려하던 의식에 욕망과 감정을 고려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이식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지식을 배움으로서, 현명한 사람들의 말을 이해함으로서,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한 사람을 참고함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해 당당한 확신을 가짐으로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