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나는 보디빌딩부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역도부로 불리던 동아리였으나, 내가 입학할 즈음에 보디빌딩부가 되었다. 보디빌딩부의 위상은 갈수록 추락해 그다지 인기 있는 부활동은 아니었고, 그 때문에 MZ감성에 맞춰보기 위해 보디빌딩부로 창씨개명을 당한 것이 아닌가 싶다.
보디빌딩부 (전 역도부)는 나름대로 역사가 깊은 동아리로 보디빌딩부 소속이었던 선배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액자를 부실에 걸어놓았었다. 전 국무총리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나는 보디빌딩부에 가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원하던 부활동에 떨어지고 보니, 딱히 하고 싶은 부활동이 없었고 그냥 주변 친구 몇 명이 보디빌딩부에 가입한다길래 어쩌다가 따라 가입해버리게 됐다.
역도부의 부활동은 자율적이었고 성과를 내야 하는 것도 없었다. 그렇게 편한 부활동을 반 년정도 이어가다가 어느 날 날벼락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은 매년 학교 축제에 보디빌딩부는 팬티만 입고 몸에 기름을 바른채 무대에 올라가 보디빌딩 포즈를 취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축제 몇 주 전쯤, 갑자기 현직 트레이너라는 졸업한 선배가 찾아와 축제 준비를 해야 한다며 말해준 사실이었다. 보디빌딩부에는 보디빌더가 없었다. 부원은 대부분 당시의 나처럼 앙상한 팔뚝이 두드러지는 저체중이거나 근육보다 뱃살이 잘 보이는 과체중이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지원자를 받았으나, 지원자는 부장과 부부장 두 명 뿐이었다. 어떻게든 축제를 진행하려는 트레이너 선배는 부원들을 세워놓고 나름의 기준으로 몇 명을 뽑았는데 재수없게도 나도 그 몇명에 포함되었다. 잘못하면 전교생 + 선생님 + 구경하러온 타교생 앞에서 팬티 차림으로 앙상한 몸매를 뽐내고 자칫 졸업앨범에 박제까지 당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야겠다는 생각에 몸이 아파 참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핑계를 댔다. 얼마전에 발표되어 나름의 이슈가 되었던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학생인권조례의 효과인지 다행히 별 말 없이 나를 목록에서 빼주었다.
결국 축제 라인업은 미쳐 빠져나오지 못한 저체중과 과체중 학생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막상 내가 빠져 나오고 보니 축제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슈퍼스타K2를 찍으면서 힙통령이 이승철 앞에 서는 모습을 기대하는 엠넷 제작진의 마음과 비슷했을 것이다. 보디빌딩부에는 보디빌딩을 조금이라도 했다고 할 만한 학생은 두 명 남짓이었고 나머지 열 명 쯤은 일반인 혹은 그 이하의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 중에서는 내가 평소에 전교에서 제일 마른 학생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친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친구가 보디빌더로 온 몸에 기름을 바르고 팬티만 입은 채로 무대에 서는 것은 정말 힙통령 이상의 부조화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축제 당일 반응은 기대했던 대로였다. 그 친구가 무대에 서서 포즈를 잡자마자 옆에 앉아있던 애들은 모두 뒤집어졌다. 강당 전체가 술렁였다. 선생님들도 넋을 잃은 듯한 반응이었다.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프리카 기아가 보디빌딩을 하고 있어."
"외계인이다."
"노예 시장인가?"
만약 남녀공학이었거나 학생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었다면 후폭풍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객석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보디빌딩쇼를 하고 내려온 부원들은 나름대로 만족했거나 만족하진 않았어도 그냥 무던한 반응이었다.
얼마 뒤 나를 포함한 2학년 부원들은 3학년이 되며 부를 그만둘 시기가 됐고, 그 날도 평소처럼 부활동 시간에 부실에 모여 별 거 아닌 얘기를 하거나 누워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평소에 부부장을 놀리길 좋아하던 부장이 그날따라 좀 지나쳤는지 난데없이 싸움판이 벌어졌다. 단단한 체형이던 부부장이 부장의 머리를 팔로 감싸고 몇 번 주먹질을 하다가 주변에서 말려서 마무리 됐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1학년 들은 '이 부는 답이 없다'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결국 다음 해에 모두 그만두었다. 당연히 새로운 부원이 모집되지도 않았고, 4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보디빌딩부는 그렇게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