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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잉 Jun 26. 2024

왕자와 거지

요즘 트렌드는 자기개발이다. 자기개발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자기개발의 근본 철학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마음 속에는 알게 모르게 새겨진 메세지가 있는데. 그것은 '청빈은 존경할만한 것이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어렵다.' 같은 말들이다. 


당신은 어떤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가? 어쩌면 당신은 의식적으로는 '돈 많이 벌면 좋지' 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돈을 대놓고 쫓는 건 좋지 않다' 던가 '돈이 많은 사람들은 뒤가 구리다' 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문제의 결론을 내기 전에 우선 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돈은 나의 소유물이다. 예전 같았으면 쌀로 가지고 있고 소로 가지고 있었을 것들이 교환의 용이함을 위해 엽전이 되고 지폐가 되고 화면 속 숫자가 된 것이다. 그뿐이다. 돈은 내가 가진 것 그 자체다. 


농사가 잘되면 그 해엔 가진 것이 많아지고. 사냥이 잘 되면 그 날은 가진 것이 많아지는 것이다. 


농사가 잘 되고 사냥이 잘 된다고 누구도 손해볼 것이 없는데, 왜 많이 가진다는 것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게 됐을까?


탐욕 때문이다. 욕망이 조화를 깨트릴만큼 오버하는 것 때문이다. 농사가 잘 돼서 가진 것이 많아지는 것에는 나쁠 것이 없다. 하지만 좀 더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더 넓은 땅을 개간하고 참새나 들짐승을 부지런히 쫓아내며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과도한 노동으로 건강을 잃는다거나, 가정이나 주변 대소사를 챙기지 못하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사소한 문제라고 볼 만하다. 


허나 탐욕이 더 커지기 시작하면 남의 수확물을 훔쳐온다거나, 땅을 빼앗는다거나, 강제 노역을 시키는 식으로 가진 것을 늘려나가게 된다. 이쯤 되면 무언가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쌀 몇 가마니는 당신의 창고에 더 쌓이지만 동시에 굶어 죽는 사람이 더 많이 생긴다.  땅의 주인을 가리기 위해 다투다가 사람이 죽는다. 당신은 창고 가득히 쌀을 쌓아놓은 채 화난 이웃에게 곡괭이를 맞아 요절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가진 것을 늘리고 싶어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가질 수 있는 것은 끝이 없고 사람의 욕망도 마찬가지로 끝없이 커질 수 있다.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는 탐욕이 되고 해악이 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이 있다. 어디까지가 자연스럽고 권장될만한 욕망이고, 어디서부터 해악을 만드는 탐욕이 시작되는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밖에 모른다. 이 사람이 배부른지 배고픈지 남이 봐서는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덩치 좋은 사람이 1일 1식을 하기도 하고 아담한 여자아이가 보통 사람의 다섯배를 먹고서야 배부름을 느끼기도 한다. 이미 충분히 배부른 사람에게 더 먹으라고 할 필요도 없고 아직 배고픈 사람에게 그만 먹으라고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옛 성현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탐욕을 경계하라고 분명히 말했고. 때로는 구하고 얻으라고 분명히 말했다. 왜 그럴 수 있었을까? 우선 그것은 배부름의 비유로 다시 돌아가자면 모든 사람이 자기 양에 맞게 먹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누군가는 배가 고픈데도 단식을 하고 있고 누군가는 배가 부른데도 억지로 더 먹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집단의 특성에 따라 하나의 보편적 현상이 되기도 했다.


명분이 중요하고 권위적인 체제가 확립된 사회에서는 먹을 게 충분히 있는데도 배고픔을 참아가며 사는 사람들이 많았고. 온갖 규율과 권위가 무너지고 폭력이 난립하는 곳에서는 지금 배가 부르더라도 먹을 것을 더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회를 꿰뚫어 보고 그 사회에 필요한 말을 했을 것이다. 욕망이 죄악처럼 되어 고통받는 사회에서는 '원하면 이룰 것이다. 구하면 얻을 것이다. 자신을 믿고 욕망에 집중하라.' 고 말하고. 그 옆의 잠시의 여유도 없이 욕망에 쫓기든 사는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에서는 '자신을 바로잡고 올바르게 행동하라. 올바름은 당신의 욕망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궁금한 것인 이것일 것이다. '그럼 나에게 필요한 말은 무엇일까?' 조금 뜬구름 잡는 말처럼 들릴 수는 있지만 당신의 마음에 와닿는 말이 곧 당신에게 필요한 말이다. 당신을 더 활기차게 하고 더 편안하게 하는 말이 곧 당신에게 필요한 말이다.


이런 말이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을 위해 옛 성현이 지금 한국에 재림해서 말한다고 한 번 생각해보자. 나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당신의 욕망을 존중해라. 하고 싶은 모든 일에 도전하라. 돈, 섹스, 여행, 사업, 권력, 예술 뭐가 됐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라.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을 잊지 말라.


당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말, 무기력하게 만드는 말 두렵고 위축되게 만드는 것들, 당신의 욕망을 그 모든 것들보다 위에 두어라. 당신이 원하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한치 의심 없이 믿어라. 그로써 당신은 당신을 구하고 세상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보자. '부자는 좋은 것이다. 섹스는 좋은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하는 소리에 귀기울이지 마라. 젊은 꼰대나 위선적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신은 한 번 뿐인 인생을 실체도 없는 것들에 억눌려 쓸데없이 고통 받으면서 살고 있다. 당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라. 즐거운 것을 하라. 당신에게 즐거운 것이 곧 세상이 즐거운 것이며 당신이 원하는 것이 곧 당신을 원하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하나로 통일시켜라. 무언가를 억눌러놨다가 충동적으로 하지 말라. 두려움이나 망설임 죄책감을 안고 행동하지 말라.' 


대부분의 한국인은 욕망을 불필요하게 제약당하면서 살아왔다. 이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 역시 많다. 그러니 욕망을 따라 살아보라고 성현은 조언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당신은 자연스럽게 욕망과 미덕의 균형을 찾게 될 수도 있고. 설령 욕망이 너무 오버해서 탐욕스러워지더라도 그것은 욕망의 절제만 알던 당신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내가 욕망이 불필요하게 제약되어왔다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물질적 환경 자체의 변화이다. 지금은 흉년이 들면 다같이 굶어야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런 시대에는 욕망이 조금만 커져도 균형을 깨는 탐욕이 될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더 욕망을 절제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넘치는 생산량으로 전 인류가 배부르게 먹을 양의 몇 배의 음식이 매일 같이 생산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음식의 문제 만이 아니다. 당신이 무엇을 욕망하든 그것은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 많이 남아 문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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