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기영 Mar 24. 2024

71 내가 만난 100인

 분명 나도 당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꽃 자전거 아저씨


20대 중반, 한 달 동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당시 싱가포르의 첫인상은 깨끗하지만 어마무시한 물가로  나도 모르게 기가 죽어있었다.


첫째 날 아침은 숙소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시리얼과 잼 바른 토스트를 먹고 거리로 나왔다. 여행 전 검색했던 싱가포르의  청량한 이미지들은 실제로 마주하는 높은 습도를 담아내지 못했다. 5분만 걸어도 땀이 절로 났다. 하지만 청결한 대중교통 덕분에 어디든 쉽게 갈 수가 있었고 둘째 날은 주롱새를 그리고 다음날은 센토사섬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그날은 첫째 날이니 만큼 중심가를 돌며 현지적응의 시간을 가졌다. 싱가포르의 상징인 머라이언파크를 따라 앤더슨 다리를 건너 엘리자베스로드 주변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내 계획은 걸어 다닌 지 10분 만에 땀에 절어 무너졌고 그때 시야에 들어오는 휘황찬란한 뭔가가 있었다.

그건 바로 화려하게 장식된 꽃 자전거였다. 말이 꽃 자전거이지 한마디로 리어카에 자전거를 부착해 꽃으로 장식한 자전거였다. 몇몇 외국인들이 꽃 자전거 뒤에 타고 여유롭게 시내를 돌아다녔다. 일단 택시보다는 저렴할 것이고 더운 날씨에 땀 흘리지 않고 뽀송뽀송한 피부를 유지하며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빠른 판단을 내린 나는  사진이 제일 잘 나올 것 같은 꽃자전거에 다가갔다.


"엘리자베스 로드까지 도는데 얼마예요?"

"일단 타!"

"네? 가격이 중요해요. 얼마예요?"

"택시비보다 싸요. 걱정 말고 타기나 해요."


나의 이과적인 질문에 그는 문과적인 대답을 했다.

그래도 꽃자전거의 감성은 문과적인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렸기에 일단 타 보았다.

하지만 자전거에 타고 달리는 상쾌한 기분은 1분도 채 가지 못했다. 제대로 보니 기사님이 너무 마른 체구였고, 심지어 나이도 제법 들어 보였다. 잠시 후 다른 힘 좋은 기사들이 하나, 둘 우리 자전거를 추월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불편해진 자전거 투어의 시작을 알렸지만 애써 이 상황을 외면했다. 그저 눈앞에서 속절없이 뱅그르르 돌아가는 빨강 바람개비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그냥 내일부터 웬만해서는  걸어 다니자!'


그런데 갑자기 나의 꽃자전거가 멈칫하더니 후진을 하는 것이었다. 앞을 보니 오르막길 입구였다.

오르막을 열심히 오르려는 그의 허벅지는 뒤에 앉아 가만히 있는 나의 것보다 훨씬 가늘었다.

나는 다급함에 입을 열었다.

"내릴까?"

그는 나보다 더 다급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냐!! 아냐!! 괜찮아! 넌 그대로 있어!"

그는 재빠르게  자전거에서 내리더니 힘겹게 나를 태운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끙끙 앓는 소리 뒤 처음 듣는 구시렁거리는 낯선 언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죽인 채 그의 정상정복을 응원했다. 드디어 정상을 지나 바로 내리막 길로 접어들면서 바람개비상쾌한 바람의 화합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한  뒤 정산의 시간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얼마 드리면 될까요?"

"잠깐만!"

그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꽃자전거 운전기자 자격증을 내밀며 밑에 적힌 숫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38불?"

"38불!"

"이거 봐! 택시비가 20불이야. 분명 네가 말했잖아! 택시비보다 싸다고! 그럼 이 가격이면 안 되는 거잖아!"

"그건 모르겠고 이건 정찰제야! 넌 38불을 내야 해. 이 자전거는 38불이라고 이렇게 써 져 있잖아!"

"난 38불이 없어!"

"그럼 넌 경찰에 잡혀가야 해!"


'아뿔싸 싱가포르에 온 첫날부터 무임승차로 경찰에 잡혀가야 한다니 또 엄청난 범칙금으로 유명한 이 나라에서 과연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 머릿속은 온통 하얗게 질려있었다.

일단 나는 지갑에 있는 모든 돈을 다 꺼냈다. 23불이 전부였다.

그는  탈탈 턴 내 지갑을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 돈 다 줘! 그리고 꺼져!"

"미안해!"


그리고 텅 빈 꽃자전거 페달을 거세게 밟으며 쌩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가 저 멀리 수많은 꽃자전거의 인파에 섞이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헛헛한 숨의 쉬면서 생각했다.


'내가 오늘 당신의 호구였군요. 하지만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랍니다.'


평소 나는 여행을 할 때   지갑에 그때 꼭 필요한 돈만 가지고 다닌다.  나머지는  나의 티셔츠 안 얇은 복대에 여권과 함께 숨겨져 있다. 사실 그 복대에는 38불의 50배쯤 되는 돈이있었다. 비록 첫날부터 사기는 당했지만 38불 모두를 그에게 주지 않은 덕분에 점심값 15불은 건진샘이었.

나름의 위안에 찬 기쁨으로  왔던 길을 돌아 나왔다.


그렇게 오는 길에 또 다른 꽃자전거를 만났다. 어김없이 호객행위를 하는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래! 도대체 얼마인데!"

"일단 타!"

"아니, 확실한 금액을 알고 싶어! 얼마야?"

"20불"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꽃자전거의 호객행위를 매일 같이 마주 할 수 있었다.

어떤 날엔 40불까지 올라가고 어떤 날엔 15불까지 내려갔다.


과적인 산을  원했던 자.

과적인 산을  원했던  자.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속였다고 안도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70. 내가 만난 100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