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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영 Jul 08. 2024

84. 내가 만난 100인

현주

연락처를 들여다보면 동명이인이 제법 많다.

그러다 어떤 날에는 전화를 잘못 걸어 서로 머쓱한  안부를 묻곤한다. 그리고는 ' 한번보자.' 라는 실현가능성이 없는 인사로 마무리한다.


내게있어 유독 '현주'라는 이름이 많다.

살아오면서 일곱명의 현주가 지나가고 머물렀다.


첫 번째 현주는 중학교 1학년때 같은 반 친구였다. 너무 예뻐서 내가 먼저 친해지고 싶었던 아이였다. 연예인 이승연을 닮았으며 항상 웃고 다녔다. 내게 있어 이 친구의 매력은 바로 김치를 좋아하는 식성이었다.

도시락을 싸서 다녔던 중학교시절, 자취생이었던 나는 소시지나 햄구이 아니면 동그랑땡 같은 메인메뉴옆에 항상 김치가 기본이었다. 영양소를 생각했다기보다 메인메뉴로 양껏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일주마다 자리 이동이 있었는데 그때 현주가 내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도시락을 같이 먹게 되었고 내 도시락 뚜껑을 열 때마다 진동해 오는 김치냄새에 다들 미간을 찌푸리는데 유독 그녀의 얼굴에서는 화색이 돌았다.

"어머! 김치다!"

그녀는 맨입에 김치를 떨어 넣으며 말했다.

"맛있다! 나 김치 진짜 좋아하는데... 이거 내가 다 먹어도 돼?"

매일 도시락 뚜껑 앞에서 소심했던 내게 그녀는 김치부심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집에 갈 때 또 한번 말했다.

"내일도 도시락 같이 먹자! 너 김치 많이 가지고 와! 알았지?"

그렇게 일 년 내내 우리는 절친이 되어 청소도 기다려주고, 방과 후 컵라면도 같이먹고, 주말엔 롤러장도  다녔다. 하지만 2, 3학년 동안 다른 반이 되면서 조금씩 소원해졌다.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다른 곳으로 배정받으면서 완전히 연락이 끊어졌다. 지금도 잊혀지 않는 것 중 하나는 그녀의 집에 놀러 간 적이 두어 번 있었다.

1층에는 조그만 가내수공업을 삼촌댁과 같이 운영하고 있었고, 2층에 그녀의 가족들 집이 있었다.

문 입구에 첫발을 내딘 순간 막냇동생이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깜짝 놀랐다. 그렇게 작고 하얀 요정같은 아이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권도 학원을 다녀오는 둘째 동생을 마주했다. 현주와 똑 닮은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아이였다. 마치 허쉬초콜릿 광고에 나올법한 외모였다. 그리고 집에 갈 때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언니가 하교를 다. 언니 또한 청순한 소녀미모를 이미 갖춘 상태였다. 그 집안에서는 누가 가장 예쁜지 우월을 가리기는 힘들 정도였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예쁜 딸 넷이 있는 집은 현주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듯하다.



두 번째 현주는 호주여행 때 만난 친구이다. 호주의 수도인 캔버라 투어를 갈 때였다. 우리 집 1번은 아침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도시락을 싸 주며 반복해서 말했다.


"투어를 가면 동양인은 한 명도 없어. 그리고 영어를 못하면 왕따가 돼. 그러니까 너는 마음 단단히 먹고 가."


그래도 기죽지 말라며 싱싱한 청포도와 체리를 깨끗하게 씻어 간식통에 담아주었다.

집합장소에 도착한 나는 캔버라 표지판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발견하고 맨 끝에 섰다.

'췟! 동양인이 없다더니 바로 앞에 동양인이 있구먼.'

나는 예상이 빗나간 1번을 살짝 원망하며 갈색 쇼커트머리에 오렌지 색 반바지를 입은 여자아이 뒤에 서있다. 웃는 강아지상을 한 그녀가 뒤돌아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녀는 서부에서 1년 동안 유학 중이었고 나와 같은 대구출신이었다. 그녀는 다음 주에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인데 마지막으로 동부로 여행 온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주와의 인연은 몇 년을 걸쳐 두바이까지 이어졌다. 앞서 말한 (83.내가만난 100인 )두바이로 나를 부른 아이가 바로 이 친구이다. 우리는 몇 년을 함께 해왔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현주는 두바이 항공사를 퇴사하면서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이었다. 귀국 준비를 하던 찰나 '좋은 기업'에 근무하는 직원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우리 회사 두바이 현지 인턴을 찾고 있는데 현주 씨 한번 지원해 보세요."

"음... 저는 지금껏 한국상사들과 일을 같이 해본 적이 없어서요.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현주 씨 정도면 우리 부장님도 흔쾌히 승낙하실 거예요. 꼭 좀 생각해봐 주세요. 우리는 인력이 부족하답니다."


당시 나를 비롯한 두바이무리들은 망설이는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들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내뱉은 것 같기도 했다. 한국 가면 더 꼰대인 상사 밑에서 일해야 한다는 둥, 여기가 더 비전이 있다는 둥, 이건 너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둥, 그녀를 떠나보내기 싫어 온갖 말. 말. 말로 덕지덕지 포장해 댔다. 우리의 설득 끝에 현주는 못 이기는 척 면접을 보러 갔다. 그날 또 스타일리스트 언니에게 부탁해 단정한 케리우먼 메이컵까지 받게 했다. 덕분인지 현주는 단번에 인턴으로 뽑혔고 다음 달부터 출근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2주 정도의 텀이 생긴 현주는 잠깐 한국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더 이상의 취업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 그녀는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잔뜩 구매해서 케리어에 꾹꾹 눌러 한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그런데 그녀가 한국에서 머문 일주일 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야~ 이렇게 황당한 경우가 세상에 다 있냐?"

"뭔데 그래?"

"좋은 기업에서 인턴채용을 취소한대. 본사에서 더 이상 인원증축은 불가능하다고 했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그녀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어떠한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같이 욕을 해도 하루이틀이지 정작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주는 서둘러 부동산 계약을 취소하고 모든 걸 정리하는 가운데 우리들까지  정리  대상이 되어버렸다.


첫번째, 두번째 현주였던 자.

첫번째 기영이었던 자.

좋았던 일들만  간직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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