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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짜오 베트남 Feb 04. 2020

엄마에 관한 오래된 단상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보낸 명절을 추억하며...  

열흘간의 짧은 시간을 끝내고 바이러스 공포와 함께 다시 하노이로 돌아왔다. 한국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 집에만 누워있어 답답했을 엄마를 겨우 꼬셔 가족들과 겨울바다를 보고 왔고, 밀린 업무와 아이 친구를 한 두 명 만나니 예정된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해외에 살거나 지방에 사느라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사는 내 또래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은 나이 드신 부모님일 것이다. 나의 경우는 특히 더했다. 어릴 적부터 아픈 엄마를 보고 자란 탓에 해외 생활을 결정하는 데 무엇보다 큰 걱정이 엄마의 건강이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베트남행을 일 년이나 미룬 것도 사실 그 때문이었다. (결국 아이들에게 아빠의 빈자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아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6개월 만에 만난 가족들. 엄마의 상태는 통화했을 때보다는 조금 나아 보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며, 혼자 생각했던 것보단 괜찮아 보여 다행이다.

여러 번의 자연 유산으로 지금이나 당시나 꽤 늦은 나이에 나를 낳은 데다 젊은 나이에 발병한 당뇨, 게다가 이래저래 집안에 나쁜 일들까지 겹치며 몸과 마음이 약해진 엄마. 내 기억 속에 엄마는 늘 아픈 모습이었다.  

하지만 몸보다 큰 문제는 정신이었다. 많은 시간 우울함과 무기력한 기운을 달고 살았으니까.


덕분에 나와 내 동생은 (내 기준에서) 꽤 빨리 철이 들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임원을 했던 나는, 당시만 해도 엄마가 학교에 와야 하는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웬만하면 엄마에게 이를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오지 못했을 것 같았으니까. 대학을 가고, 직업을 결정하고 크고 작은 결정의 순간에 나는 대부분 아빠와 말하거나 혼자 결정했다. 그렇다고 엄마가 우리에게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먹이겠다며 된장, 고추장, 두부를 직접 만들고 콩나물까지 직접 키워서 우리에게 해 줬으니,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오랜 병자가 있는 집안에 깃든 우울감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니 큰 딸인 난, 어렸을 때부터 내 일은 물론 아픈 엄마를 다독이고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것 또한 당연히 내 몫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안 좋은 일들까지 많이 겪으면서 엄마가 큰딸인 나에게 기대는 마음도 커갔는데, 때때로 나는 그것들이 많이 버겁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고등학교나 대학에 가서 간혹 친구들이 내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면 겉으로는 맞장구를 치며 그들을 위로했지만 속으로는 '저게 그리 고민하고 속상해할 일인가'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혼자 다 큰 어른인 척하는 것이 몸에 베여 있었던 것 같다. 고민의 크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데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 바다 앞에서 가족들과 먹었던 포장마차 어묵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결혼을 하고 애를 낳으면 엄마를 이해한다고. 하지만 나는 애 둘을 낳고도 엄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반감이 들 때도 많았다. 지방에 가서 혼자 애를 키워야 할 때도,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늘 바쁜 나와는 달리, 일하는 나에게 수시로 전화하는 엄마. 엄마의 첫마디는 '늘 아프다'였고 끝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였다. 그래서 난 전화통화를 할 때면 그런 엄마에게 짜증을 내지 않도록 큰 한숨을 쉰 후에 전화를 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엄마를 병원에 데리고 가고, 몇 달에 한번 꼴로 입원을 하는 엄마의 병문안을 매일 가야 했고, 수시로 좋아하는 것을 사다 주고, 무기력증에 빠지지 않도록 이것저것 하도록 독려하고 알아봐 주고, 여행을 갈 때도 함께 하는 등, 나와 동생은 할 만큼 하는데도 부정적인 기분에 빠지는 엄마를 다독이며 우리 가족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점점, '오래된 병과 무기력한 마음은 가족의 힘으로 이겨내는데 한계가 있다' 고 느끼며 엄마의 아프다는 말에도 어느새 걱정을 넘어 '엄만 매일 아프니까'로 넘길 때도 많았으니 말이다.


그런 내가 베트남에 와서 엄마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일의 특성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늘 바쁘게 지내던 한국에서  달리, 남편과 아이들을 보내고 하루하루 내 할 일을 찾지 않으면 무기력에 빠지기 쉬운 환경이다 보니 혼자 멍하니 있을 때면 문득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오랜 병치레 탓도 컸겠지만, 엄마가 그간 많이 외로웠음을 말이다.  

우리는 아픈 엄마를 배려한다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없어도 알아서 다 하는 딸들과 무뚝뚝한 남편, 늘 바쁘게 지내는 가족들과 달리 본인은 집에만 있다 보니 그나마 아프다고 해야 가족들이 자신에게 신경을 써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다.  

우리가 베트남에 온 뒤로 그 허한 마음은 더 컸을 테다. 가까이 살면서 가장 크게 믿고 의지하던 큰 딸과 매일매일 와서 종알종알 떠들던 손자들의 빈자리. 티를 안 내려고 했겠지만, 엄마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혼자서 감내하고 있는 아빠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 나 또한, 멀리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지만 엄마랑 전화를 하고 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같이 무기력에 빠지니, 유선상이라도 그런 기운이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엄마는 혼자 점점 더 외로웠으리라.


물론 그 마음을 조금 이해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나는 또다시 베트남으로 와야 했고, 여전히 엄마에게 전화를 걸기 전 큰 심호흡을 하는 것도 똑같다. 다만, 그간 엄마에게 품었던 부정적인 마음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다. 또한, 이렇게 부끄럽고 지극히 개인적인 일들을 쭉~ 적다 보니 마음이 조금은 후련하기도 하다.

말로는 '나는 쉽게 잊어 버리는 성격이니까 괜찮아'라는 말로 넘기고 있었지만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선 '감정의 쓰레기통'이 필요했었나 보다.  


엄마에게 전화나 해야겠다. 이번엔 좀 더 다정하게 말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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