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계문학 정복기 05. 시지프 신화 - 알베르 카뮈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물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몸짓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첫째 이유가 습관이다.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면, 살아야 할 깊은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 면 그리고 고통의 무용함을 본능적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낯선 세계로의 유배에는 구원이 없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도 약속된 땅의 희망도 다 빼앗기고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 장치의 절연,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죽음이라는 모험의 초보적이고도 결정적인 측면이 부조리의 감정의 내용을 이루며 이 숙명의 치명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무용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서 거기에 인간의 낙인을 찍는 것이다. '모든 사고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라는 자명한 이치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만약 이 세계도 인간처럼 사랑하고 괴로워할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게만 된다면 인간은 안심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참된 인식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다. 인간 사고의 유일하고 의미 있는 역사를 써야만 한다면 우리는 사고의 연속적인 후회와 무력의 역사를 기록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부조리의 인간은 자신이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다 분명하게 말하면 나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가짐으로써, 나만의 진리, 존재하는 방식 혹은 창조하는 방식에 부심함으로써, 그리고 끝으로 나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삶에 의미가 있다고 시인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나는 스스로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나의 삶을 가두는 것이다.
부조리는 나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부터 이것이 바로 나의 깊은 자유의 이유이다.
어느 이른 새벽 감옥의 문이 열릴 때 그 문 앞으로 끌려 나온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 삶의 순수한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야말로 단 하나의 온당한 자유의 원리, 즉 인간의 가슴이 경험하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임을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목적이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목적이다. 그가 무엇인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삶 속에서다.
남은 것은 운명이다. 오직 그 출구만이 숙명적인 운명이다. 죽음이라는 그 유일한 숙명을 제외하고는 기쁨이건 행복이건 모든 것이 자유다. 인간만이 유일한 주인인 세계가 남는다. 그의 사고가 가야 할 운명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로 재도약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부조리를 발견하면 우리는 모종의 행복의 안내서를 쓰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세계는 오직 하나뿐이다.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이 낳은 두 아들이다. 이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내가 판단하건대 모든 것이 좋다." 오이디푸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신성하다. 이 말은 인간의 사납고 한정된 세계 안에서 울린다. 이 한마디가 운명을 인간의 문제로, 인간들 사이에서 처리해야 할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