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의 방식 1. 많이 보아라
나도 오타쿠였다.
물론 수익으로 크게 이어진 성공한 오타쿠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풀어낼 수 있는 마니아 혹은 오타쿠의 기준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몇 개의 카테고리들을 가지고 있다.
내 기억들 중 처음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나는 진짜 오타쿠였다. 코코마데다.
처음 무엇을 보고 그리 애니메이션에 빠졌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때까지 제대로 빠져있던 것 같다. 컴퓨터 하드드라이브엔 용량 가득 일본 애니메이션 파일들이 가득 차 늘 빨간 상태였다. 새로운 애니메이션이 나왔거나 다른 애니메이션을 시작하게 되면 무엇을 지워야 하나 정말 괴로운 고민이었다.
특히 스포츠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는데 테니스, 미식축구, 권투 등의 만화들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것들을 가리는 것도 아니었다. 해적 만화, 닌자 만화, 요리 만화, 연금술 만화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애니메이션을 즐겼다. 그 당시에는 오타쿠란 단어가 동네에 들어오기 전이라 딱히 나를 규정할 단어가 없어 다행이었지 아니었음 오타쿠란 별명이 크게 나를 괴롭힐 뻔했다.
단지 파일을 모으는 것 외에도 필기구나 공책등은 그 만화 캐릭터가 있는 것들을 선호했고 무지에는 따로 프린트해 붙이고 다니기도 했다. 특히 어느 만화에서 명대사가 나오면 그것을 교과서 처음이나 노트 어귀에 꼭 적어 놓았다.
그리고 그림들도 많이 그렸다. 낙서라 하면 낙서다. 책 이든 공책이든 공백에는 꼭 어떤 그림들을 채워 넣었다. 이런저런 만화를 보고 그림체들을 따라 그려가다 나름 고유의 그림체를 가지게 되었다. 애니메이션을 한창 좋아할 땐, 그림도 정말 많이 그렸다.
그랬던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랑은 어느 순간, 딱 끊겼다.
끊겼다기보다 옮겨졌다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나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2D에서 3D로 옮겨졌다. 정말 미친 듯이 영화를 봤다. 많이 보는 날은 하루에 5편씩 보는 날도 있었다.
한 영화를 보다 좋아하는 배우가 생기면, 그 배우가 나온 영화들을 볼 수 있는 한에서 다 봤다. 그러다 보면 같이 작업한 감독이 보통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그 감독의 영화들을 모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다 어떤 장르에 꽂히면 그 장르들의 영화들을 찾아봤다. 그렇게 연결고리를 이어 영화를 보다 보면, 훨씬 더 재밌고 배우의 매력을 여러 각도로 느낄 수 있고 감독의 스타일과 철학, 연대기에 따른 퀄리티의 변화도 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제임스 맥어 보이, 조쉬 하트넷, 라이언 레이놀즈, 견자단, 아만다 사이프리드 등의 배우들을 좋아했고 폴 멕기건, 크리스토퍼 놀런, 우디 알렌 등의 감독들을 좋아했다.
오덕의 방식 첫 번째.
일단, 많이 보는 것이다.
간혹 예외는 있겠지만 영화도 많이 본 놈이 잘 만들고, 노래도 많이 들어본 놈이 잘 만들고, 향도 많이 맡아본 놈이 잘 만들고, 요리도 많이 먹어본 놈이 잘 만든다.
호기심이 생기고 관심과 흥미가 생겼다면 많이 보거나 듣거나 먹거나 우리 감각에 매달려 많이 감상해보는 것이다. 절대 호기심을 그냥 두면 안 된다. 호기심은 인류를 먹이사슬의 정점으로 올린 가장 강하고 위대한 불의 씨다.
호기심이 생긴 카테고리가 있다면, 이 작은 불씨에 계속 감상할 것들을 장작으로 떼는 것이다. 세상엔 이미 천재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좋은 장작들이 많고 이 장작들을 잘 선별하고 추천해주는 곳도 많다. 좋은 장작들로 계속 불을 지피는 습관이 들다 보면 어느 순간 불은 더 커져있고 활활 타고 있다. 열정의 불꽃이 피었다. 이젠 그 불을 즐기면 된다. 더 할 것은 없다. 그 불이 이곳저곳에 온기와 열정을 보내며 알아서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해 줄 것이다. 핑계나 상황, 고민들도 불에 녹는다. 뭐, 주변에서 들리는 ‘뭘 그렇게 까지 해.’ 혹은 ‘미쳤다 미쳤어’ 정도의 소화기들만 신경 쓰지 않는다면.
몸에는 습관, 머리에는 무의식
이젠 무의식의 영역이다.
보는 것이 습관이 되면, 머릿속에 그것들이 맺히고 무의식이 알아서 나를 본격적으로 오타쿠로 만들어준다.
나의 호기심에 답을 찾는 과정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다시 또 다른 호기심을 불러온다. 그리고 또 이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무의식이 강화된다. 무의식이 강화되면 아이러니하게 다시 호기심들이 생긴다. 또 이를 채운다. 호기심들은 점점 깊어지고 넓어진다. 처음 배치기의 노래를 듣다 지금은 칸예웨스트의 노래에 눈물을 흘리고 버질 아블로의 패션을 구경하는 것이다.
보면 볼수록 볼 것이 늘어나고, 공부하면 할수록 공부할 것이 많아진다. 그런 과정 중에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쌓인다. 지식이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무의식은 관점이란 것을 만들어준다.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 만유인력의 법칙을 떠올렸다는 일화로 순간의 번뜩임 혹은 세상을 바꾼 사과라는 키워드에 세상은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뉴턴은 원래 물리학의 오타쿠로 끊임없이 물체의 운동과 자연현상들에 대해 미친 듯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생각했던 학자이다. 그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의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던 물리학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정립한 것이다. 무의식에 자리 잡은 그의 관점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과 대신 앵두가 떨어지는 것을 봤다면 세상을 바꾼 앵두가 되었을 것이고, 사과나 앵두가 아니더래도 어떤 것으로든 그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세상에 내놓았을 것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또한 목욕탕이 아닌 변기였을 수도 있다. 무의식은 어디서나 활동하니까.
그렇게 무의식을 쫓아 관점이 생기고 나면,
삶의 기준이 생긴다.
그렇게 내 무의식은 서울 4년제 상위권 대학 대충 점수 맞춰 가려던 문과생을 고3 2학기, 갑작스레 예술대학 연극과로 이끌었다.
“나는 내게 일어난 것들의 결과가 아닌, 내가 선택한 것들의 결과이다.”
I am not what happend to me, I am what I choose to become.
-Carl Gustav J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