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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더 Mar 06. 2020

화폐는 권력이다

권력에 군침 흘리지 않는 인간은 없다.

화폐는 권력이다. 국가는 이 권력을 가장 많이 쥐고 싶어 하는 주체 중 하나다. 화폐의 생산, 분배, 유통에 깊이 개입할수록 국민경제를 이상적인 방향으로 일궈나가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물론 화폐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모든 국가가 경제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국가는 화폐가 곧 권력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으며, 자국 화폐의 용처가 국경 너머로 확장될수록 대외적 영향력도 커진다는 걸 알고 있다. 이를 블록체인 업계 용어로는 매스 어답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현대 사회의 화폐는 중립적이거나 초국가적일 수 없다. 대부분의 국가는 발권은행의 화폐 발행과 유통에 개입하고 싶어 하므로 화폐는 늘 권력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 있다. 국민 또한 다른 이들보다 화폐를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 한다. 금속화폐에서 지폐로, 그리고 가상의 디지털 숫자로 형태는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화폐가 권력의 징표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화폐를 축적해 더 큰 권력과 우위를 갖고 싶어 한다. 다시 말해 화폐는 권력적이며 불평등한 관계가 매개된 창조물이다.

화폐마다 통화공간이 존재한다.

국가는 권력을 확대하기 위해 자국의 화폐가 단일하게 사용될 수 있는 범위를 넓히고 싶어 한다. <돈의 본성>을 쓴 케임브리지 대학의 제프리 잉햄 교수는 이 범위를 통화공간(monetary space)라고 표현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은 원화가 거래되는 통화공간이다. 한국인들은 한국 내에서는 원화를 거래의 매개이자 계산수단으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원화는 한국을 벗어나면 환전하지 않는 한 그 자체로는 외국에서 거래되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 원화는 한국이라는 통화공간 안에서 유통될 때 가장 큰 힘을 가질 수 있다. 잉햄 교수는 그런 이유로 통화공간은 곧 주권적 공간이라고 말한다.


전 세계 각국은 서로 더 큰 권력과 이익을 얻기 위해 저마다 독자적인 통화공간을 만들어 넓히려고 한다. 하지만 통화공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만큼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화폐 간 거래 비용이 증가할 뿐 아니라 환율 리스크도 커진다. 또 특정 국가가 중앙은행을 통해 환율 조작을 감행해 과도한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펼치는 등 반칙 행위를 일삼을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한 논문에서 화폐의 탈국민국가화를 주장했다. 특정 국가에 얽매이지 않는 시중의 여러 민간화폐 중에서 자유 경쟁을 거쳐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을 단일한 교환 매개체로 쓰자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돈이 통화공간이나 국가의 권력 확보 수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전 세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면서 많은 장점이 발생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하이에크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의 등장을 염두에 두고 그런 주장을 했을 리는 없지만, 언뜻 보면 몇몇 암호화폐는 하이에크가 생각한 민간화폐와 몇 가지 지점에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인터넷이라는 무국경 지대 위에서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다. 또 그것의 발행에 정부 당국과 중앙은행이 개입하지 못하니 국가 권력을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더해 작업증명(PoW) 암호화폐의 경우 반감기 메커니즘 덕분에 점차 디플레이션 화폐가 되도록 설계돼 있으니 적어도 현재로선 유동성 과잉으로 인한 문제가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암호화폐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까?


‘탈블’ 후 민간인으로 되돌아간 지 4개월이 된 현재, 나는 그 질문에 대해 여전히 그렇다고 답하지 못하겠다. 암호화폐가 대중화될(지는 모르겠지만) 먼 미래에 권력의 중심이 국가에서 민간으로 이동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화폐의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화폐를 사용하는 인간의 권력 지향적 속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다수의 국가, 민간 주체, 개인들은 법정화폐든 암호화폐든 그것을 발행하고 소유하고 이용함으로써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이밖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암호화폐가 존재한다.


암호화폐의 경우 자체 블록체인이 바로 통화공간의 역할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중에 난립하는 몇천여 종의 암호화폐는 대부분 자체 블록체인 생태계 위에서 동작하며, 다른 블록체인과 연합하려 하지 않는다. 혹자는 블록체인들이 연합하지 못하는 이유가 기술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블록체인 기업들이 권력을 중심을 놓치지 않으려는 게 근본적인 이유라고 본다 (어떤 암호화폐는 블록체인의 허브를 표방하기도 하지만, 일반인이 보기에는 사실상 여러 블록체인을 자신에게 모아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하기 위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암호화폐를 발행한 주체는 마음만 먹으면 블록체인이라는 통화공간 속에서 언제든지 화폐를 추가 발행하거나 소각할 수 있다. 또 초기 개발자들과 운영진들은 여전히 암호화폐의 상당 부분을 쥐고 있으며, 작업증명의 대안이라며 등장한 여러 알고리즘도 면밀히 따져보면 어딘가에 권력의 중심이 몰려있다.


결국, 암호화폐는 인터넷이라는 무국경 지대에서 다시금 국경을 세우고 통화공간을 창출하고 있는 셈이다. 이 통화공간을 넓히면서 주권을 잡으려 하고 있고, 그 누구도 탈중앙화가 가능하다는 순진한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것을 믿는 것은 곧 권력을 포기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에 군침 흘리지 않는 인간은 없다. 고로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 암호화폐는 결코 평등하지도, 탈권력적이지도, 탈중앙화되어 있지도 않다. 암호화폐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다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역사가 그걸 보여준다. 



본 콘텐츠는 블록체인 인사이트 미디어 '노더'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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