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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Jan 05. 2024

아메리칸 드리머가 바라본, 코리안 드림

20여 년 전에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은,


하나의 고유단어로 누구나 그 말의 뜻을 알고 그 단어에 대한 로망이 있어 그렇게 하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또한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디디기까지 용기를 내야 했었다. 부러운 미지의 세계이긴 하지만 이 땅에 내 피붙이 하나 없었고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 되지 않아서 실은 내가 도착한 메릴랜드라는 주가 미국 어디에 붙어 있는지조차 몰랐던 무식쟁이에 지나지 않았다. 두 눈을 꼭 감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깃발을 내리꽂았다는 인식을 하기도 전에 닥친 내 조국에 대한 향수병에서 오는 외로움과 헛헛한 고립감은 어린아이의 지렛대가 되기에는 나와 남편의 깃대가 견고하지 않았음을 시인해야 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게나마 그 꿈을 이루지 않았나 싶다. 건강한 가족을 이루었고 가족 모두 이루고자 하는 꿈에 열심히 도전하고 있고 미국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어디에서든 원하는 일과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지 않았나 싶다.


그 시절로 잠깐 돌아가 보면,


미국 대사관에 방문할 일이 있는 사람은 긴 줄을 서야 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다. 대사관 담벼락 밑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기다란 줄은 그 시대의 한국은 나약한 나라임을 대변했고 대국에 대한 경외심과 천조국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되었다. 줄이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그들이 만들어 놓은 높고 높은 규율에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을 뿐 우리는 별다른 저항이나 요구를 꿈도 꾸지 못했었다.     


어떤 이는 새벽 찬 바람을 맞으며 줄을 서서 들어갔는데 두터운 서류는 쳐다보지도 않고 통장잔고가 모자라 그냥 나온 이도 있었고 왜 하필 그리 추운 겨울에만 그곳에서 줄을 서게 되는 건지 손이 얼어붙도록 줄을 서서 기다리다 들어갔는데 영어를 한마디로 못 알아들어 그대로 쫓겨난 이도 있었다. 그때는 그저 유머스러운 에피소드였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미국은 하늘처럼 높아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인식으로 두터운 벽을 쳐놓고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미국에 와서 하는 일이란 공항에 마중을 나온 사람의 직업을 그대로 따라 하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세탁소를 운영하는 지인이 공항에 데리러 갔다면 세탁소에 취직을 해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미국의 적응 기간을 거치게 된다. 열심히 일해 세탁소 주인이 되는 꿈을 꾸고 그렇게 어렵게 번 돈으로 아이들의 학업에 힘을 쏟으며 그것이 바로 아메리칸 드림으로 이어지는 성공의 길이었다.      


그랬던 아메리칸 드림이 이제는 그 시작점을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있다.


한국 속 미국 대사관의 모습을 베트남 그리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 속 한국 대사관 풍경이 그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베트남에서만 7만 5천 명이 한국어 능력 시험(TOPIK)을 보았다는 말로 그 놀라움의 시작을 알렸다. 해마다 응시생이 늘면서 K한류가 터지자 지난해에는 83개국에서 거의 70만 명이 TOPIK 시험을 보았다. 세계에는 오직 토익(TOEIC)이나 토플(TOEFL)만 존재하는 줄 알고 살아왔다면 나의 무지함이 드러나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 언어는 나라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TOPIK을 보기 위해 한국 대사관이 '미어터져라' 그 나라 사람들에 의해 둘러 쌓여있다. 우리가 미국 대사관 주위를 빙 둘러 줄을 섰던 것처럼 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시험을 보기 위해 부모와 친척들의 응원을 받으며 시험장에 들어간다. 어떤 이는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해 울먹이는 이는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새 가방을 도난당해 시험번호를 잃어버려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 얼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사생결단으로 시험에 통과한 이들은 천국행 티켓을 손에 쥔듯한 표정과 한쪽 가슴에는 빛나는 태극 마크를 다른 쪽에는 대기업의 마크가 새긴 옷을 입었다. 젊은이들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며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자들의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손을 흔든다. 마치 우리의 60년대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의 모습이 보이고 70, 80년대 중동과 사우디아라비아로 파견되어 떠나는 젊은이와 오버랩되었다.    


분명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그 꿈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외국인들이 한국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다양할 것이다. 집을 떠나 남의집살이를 하는 것과 비교하면 딱 맞을성싶다. 남의집살이를 한다는 건 내 집보다는 나은 집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이고 내가 생활하는 곳보다 나은 환경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아픔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남의 집이 결코 내 집은 될 수 없는 섞이지 못하는 그 서러움이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간호사와 광부의 서러움이 그것이었을 것이고 세탁소 주인이 되는 꿈이 아메리칸 드림이었을 그들의 서글픔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리안 드림은 우리의 지난 자화상이 될 수도 있겠다.


선진국의 반열에 올려지기까지 반석의  이상은 그때의 파견된 젊은이들이 흘린 노력의 결과고, 코리안 드림을 안고 도착한 그들 또한 자국에서 보면 반석이 되는 이들일 것이다. 훗날 우리가 기억하는 간호사 광부가 겪었던  나라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고스란히 그들의 한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미국  한인들이 겪는 영원한 이방인의  또한 코리안 드림을 꾸는 이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국 속에 다양한 인종이 건너왔고 그들끼리 앞다투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근면성과 영특함이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인에게 간곡히 당부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특정부류가 전체를 흐린다는 것을 전제하고) 한국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보이는 시선을 최소한 같은 인간으로 대해 달라는 것이다. 미국 속에서 아시안으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미국인들이 우리 같은 이민자들에게 보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다는 사실이다. (트럼프가 피를 오염시킨다는 막말은 이민자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을 만들었다)     


앞에서는 정중한 인종차별로 뒤에서는 무례함을 일삼는 비열한 뒷모습이지만  또한, 처음에는 알지 못할 정도로 겉으로는 친절함으로 무장되어 있다. 물론 100% 모든 미국인이 그렇다고 보지는 않는다. 미국 사람 대부분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백인 우월주의는 한국인으로서 동남아인을 보는 한국인 우월주의와 비슷하다고 본다. 잠시만 뒤돌아보면  가족 누군가가 외국에 살고 있고 미래의  아들, 딸이 외국에서  수도 있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부디 따뜻한  이웃으로 보듬어 주길 길을 걷고 있는 아케리칸 드리머가 간절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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