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서 하루만 자고 나가게 되면 참 번거롭다. 큰 가방을 다시 열고 전날 했던 자리배치를 새로 해야 한다. 큰 여행 가방은 작은 자취방 같다. 한 공간에 필요한 물건들이 거의 다 들어간다. 옷가지들, 화장품, 비상약 등등. 특히 열흘 이상 여행에서는 가져갈까, 말까 고민되는 물건도 부피가 너무 크지 않다면 넣는 게 좋다. 가서 사면 된다고 생각하다가 불편을 겪게 될 수 있다. 이번 여행 면세품은 여행지에서 필요한 것만 몇 가지 사서 유용하게 썼다.
난 마음을 먹어야 정리를 한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물품들(주로 돈 관련)만 바로바로 제자리에 넣어놓는다. 다른 것들은 눈에 보이는 곳에 던져두고는 정말 보기 싫어지면 한꺼번에 한다. 여행지에서는 미룰 수가 없다. 짐을 싸면서 블록 놀이하듯이 여러 경우의 수를 적용해본다. 요래조래 바꾸다가 지쳐서 '뭐하는 짓이지?' 하는 마음이 들면 마무리된다. 짐을 다시 싸고 보니 집에서는 빈자리가 꽤 있던 가방이 꽉 찬다. 면세품이 특별히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는데 희한하다. 매번 그런다. 어쩌면 마음이 느슨해져서 짐을 싸는 손도 꼼꼼하지 않을 수도 있다. "됐다. 모르겠다." 혼잣말을 하고서 남편을 따라 밖에 나가 보았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올드시티 쪽이긴 한데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강아지, 아니 강아지라고 하기엔 큰 개가 길에 늘어지게 누워있다. 편의점에 들려 간식거리를 사서 호텔로 오는 길에 아까 본 개가 차들이 쌩쌩 다니는 큰길을 건너가고 있다. 너무 놀라서 쳐다보고 있는데, 그 개는 늘 다니는 길인 양 알아서 차들을 피해 건너간다. 나중에 우리도 그 개처럼 '알아서' 길을 잘 건너 다녀야 했다.개들도 나라마다, 환경마다 성향이 다르다. 개들은 사람들이 빠르게 변화시키는 세상에서 알아서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린 왕자 속 여우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네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네가 장미를 위해 보낸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고 있어. 하지만 넌 잊지 마. 네가 길들인 것에 영원히 책임을 져야 해.
넌 네 장미에 책임이 있어."
최근에 어린 왕자를 다시 읽으면서 '길들여진다'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길들이고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가. 그런데 그것에 대한 '책임'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 사람의, 그 개의 상처는 누구 탓일까. 이미 내팽개쳐지고 공중분해된 '한때는 애썼던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씁쓸하다. 각자가 알아서 치료받고 적응하다 보면 단단해질까.
호텔로 돌아와서 익숙하게 슬리퍼를 벗어놓고 맨발로 올라갔다. 이 호텔은 조식이 따로 없는 대신, 2층에 간단히 먹을거리가 있다. 찰밥과 바나나를 하나씩 먹고 라테를 뽑아가지고 방으로 가서 나갈 채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