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관점이 있다. 이런 관점은 자신의 경험과 처한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고, 자신의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소신 있게 세상을 본다는 뜻이기도 하니 중요하다. 하지만 요즘 나의 ‘엄마’라는 정체성에서 오는 ‘엄마의 시각과 관점’을 가끔 벗어두고 타인과 세상을 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여기서 ‘벗어둔다’고 표현을 한 것은 ‘다시 입어야할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며칠 전 TV에서 갤 가돗 (Gal Gadot) 주연의 2017년 영화 <원더우먼>을 봤다. 갤 가돗이라는 배우의 얼굴과 그녀가 이스라엘 국적을 갖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전에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본적이 없었다. (있어도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영화가 끝나고 어떤 배우인지 궁금해서 검색을 했는데, 이럴 수가! 아이가 둘 있는 ‘애엄마’였다.
“애 둘 있는 엄마의 몸매가 저렇게 비현실적일 수 있어?”
물론, 저런 비현실적인 몸매를 갖고 있기 때문에 헐리우드 스타가 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갤 가돗이 애 둘 있는 아줌마(?)라는 것을 알았다면 영화 자체에 몰입을 못하고 보는 내내 “애 둘 낳고 저 몸매가 가능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책을 읽으면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코로나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요즘, <모네는 런던의 겨울을 좋아했다는데>라는 책을 읽게 됐다. 비록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때가 아니지만 이 책을 통해 작가의 런던 생활을 간접 경험이라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 책의 저자인 조민진 씨는 14년간 기자생활을 하다가 1년의 영국 연수 기회를 얻었고, 본인이 좋아하는 그림들을 실컷 보면서 ‘좋은 걸 모아 더 행복해지는데 총력을 기울이리라’ 다짐하며 보낸 런던 생활의 이야기를 이 책으로 풀어냈다. 작가님은 여자였고, 나와 비슷한 또래였다.
“결혼은 했을까? 아이가 있으면 혼자 1년 동안 영국에 어떻게 가있지?”
라는 질문이 자동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책 속에 답이 있었다. 내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는 저자는, 딸을 지방에 있는 친정에 아예 맡겨두고 일을 했고 그래서 홀로 일 년 간의 연수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보들을 모르고 읽었다면 더 재미있게 몰입해서 읽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해외연수의 호사는 ‘보통의 아줌마’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보통 아줌마’가 아니지만 말이다.
코로나 때문에 거의 종일 아이와 함께 자발적 자가격리(self-isolation)를 하고 있다 보니, 나는 더욱 이런 ‘특별한 아줌마’들을 보며 공감을 못하게 된다. 아이가 학교도, 학원도 못가고 있어서 집에서 종일 지지고 볶아야하는 코로나 시대의 보통 엄마로서, 이런 특별한 엄마를 보면 왠지 모르게 내가 더 작아지는 느낌이다.
갤 가돗, 조민진 씨와 나는 여자라는 성별과 아이가 있는 기혼자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그 외에 다른 점이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아이가 있는 기혼 여성’이라는, ‘엄마’라는 카테고리에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넣고 비교를 하게 된다. 이래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는 걸까?
그래서 요즘 이런 ‘엄마’, ‘아줌마’라는 관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정체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즘 유독 이 ‘엄마’ 카테고리에 함몰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로서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로서의 존재가 내 전부는 아님이 분명하다.
문득 아주 당연한 진리가 떠올랐다. 세상의 그 누구도 나와 똑같은 상황의 사람은 없다는 것. 어쩌면 그 누군가에게는 내가 ‘특별한 엄마’이고, 그녀는 ‘보통 엄마’로서 괜히 나 때문에 본인이 작아지는 느낌을 가질지도 모른다. 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읽다 잠시 옆에 치워뒀던 <모네는 런던의 겨울을 좋아했다는데>를 다시 집어 든다. 내가 미혼이거나, 결혼을 했더라도 육아에 지치기 전에 읽었더라면 분명히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책이다. 그래서 모든 걸 엄마라는 관점에서 보는 ‘전지적 엄마 관점’을 잠시 옆에 치워두고, 그냥 저자와 함께 동행을 해보려고 한다. 그 여행이 끝났을 때는 저자의 행복한 경험과 함께 나도 뭔가 반짝이는 것을 찾아서 돌아올 것이다. 나를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발전시킬 그 무언가를 찾아올 것이다. 만약 그런 게 없더라도 그 여행 자체를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게 시간과 공간, 나의 정체성과 좁은 관점도 잠시 초월할 수 있는 책의 매력이니까. 그리고 때로는 '엄마'말고 그냥 '나'일 필요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