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1년 4개월을 투병하셨다.
엄마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중 1년 정도는 건강한 편으로 생활하셨으니 이제 와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언니 집에서 1년 이상을 지내며 통원치료를 했고, 나머지 3개월은 동생네 집에서 식단 조절과 투약을 하면서 지내셨다. 마지막엔 다리 마비가 와서 거동이 불편해졌고, 기침도 심해지는 증상이 있었다.
암세포는 마지막엔 두개골까지 번져서 엄마를 괴롭혔다.
임상실험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치료를 다 시도해보고 마지막 항암치료를 1차로 마치고 경과를 보던 중 엄마는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돌아가셨다. 이미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몸에 세균 감염이 되어 열이 났고, 열이 잡힐 듯 잡히지 않더니 결국 발병 후 처음으로 입원을 한지 1주일 만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마지막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질 것이라는 예고를 들었는데도, 엄마는 의외로 머리가 많이 빠지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셨다. 머리가 다 빠지는 경험을 한 번 해봤기 때문에, 엄마가 너무나 원하지 않는 것을 알고 신이 도와주신 것인가보다 했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인사하도록 면회를 허락해주었을 때, 1시간 거리의 병원을 무거운 마음으로 향했다. 코로나 때문에 1:1 면회는 직계 가족만 잠깐 가능했다.
언니와 동생이 차례로 면회를 마치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고통으로 헐떡이는 엄마를 안고 엉엉 울었다. 그리고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엄마를 혼자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손을 잡고 그저 울었다. 이후엔 지방에서 올라오고 있는 남동생의 전화를 연결해주었다.
엄마는 나와 눈을 맞추거나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언니와 동생이 이야기 할 때는 눈물을 흘린다던가, 무언가 끙하는 대답같은 것이라도 있었다고 했는데, 나와 얘기를 나눌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내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오직 소리로라도 내 말을 들을 수 있었길 바랄 뿐이다.
다만 면회 끝까지 손을 꼭 잡아주었다.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면회를 마치고 병원 커튼 뒤로 돌아서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머리가 핑 돌고 온 몸에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감당하지 못할 슬픔이 밀려와 온 몸을 휘감았다.
병원 1층 로비로 천천히 내려와 남편과 한 참을 멍하니 앉았다가 겨우 언니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섯시간쯤 뒤에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서울에서 장례를 3일 동안 치르고, 2주 후 수목장을 고향의 선산에서 또 치렀다.
양지바른 곳에 있는 나무를 골라서 명패를 걸고 나무 밑에 나무로 된 분골함을 묻었다.
이제 두 달 뒤면 거의 1주기가 다 되어간다.
다른 가족들은 몇 달 후 어느 정도 새로운 삶을 시작했거나 적응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아주 천천히, 내 속도대로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아직도 속 시원히 풀리지 않은 나의 고민과 감정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