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안녕하시죠. 큰아들입니다. 보통 형제들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고 하는데 우리 형제는 다른가 봅니다. 동생이 군대 갔다고 이렇게 제가 글을 쓰는 날이 올 줄은 몰랐거든요. 군대 간 동생 녀석이 걱정되지는 않지만, 군대를 보낸 자식 걱정하는 부모 마음은 큰아들인 저를 보낼 때나, 막내인 동생을 보낼 때나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런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고자 편지 형식으로 글을 적습니다.
2016년 2월 말. 아직은 추워서 패딩을 입고 저는 논산훈련소로 입대했습니다. 아버지와 막내까지 같이 데려다주셨죠. 사실 그때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무척 고마웠습니다. 다들 바쁘실 텐데도 불구하고 저 하나 데려다주겠다고 새벽부터 고속도로를 달렸으니까요.
논산훈련소 근방에는 가게들이 가득 차서, 우리 가족은 낡은 식당에 들어가서 끼니를 때웠습니다. 된짱 찌개가 어쩜 그렇게 맛이 없던지. 나중에 와서 다시 확인해 보고 싶은 맛이었어요. (진짜 이렇게 맛없는데 장사를 한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식사 후에는 어머니는 노점상에서 파는 물건들을 눈여겨서 지켜보셨죠. 그때는 저 군대 가느라 그런 게 안 보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장사꾼 속인 것을 알면서도 '우리 아들 고생하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셨을 거예요. 그 마음을 이제야 생각하게 됩니다.
논산훈련소에서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군생활은 둘째치고 그 한 달이 안 지나가는 줄 알았어요.) 원래 군대 가기 전에도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어서 무탈하게 지나갈 줄 알았는데,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들은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첫 불침번을 섰던 날도 기억나고요, 재식 훈련을 처음 받는다고 하루 종일 운동장을 돌았던 것도 생각납니다.
3월 27일. 제 동생 생일이죠. 그런데 16년 3월 27일 저는 군장을 메고 행군 중에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하늘을 보면서 '동생 생일인데..'하고 생각했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릴 적 태권도 프로그램 중 행군을 하는 프로그램에 우리 형제가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저랑 동생은 과체중이어서 무리에서 많이 뒤처지고 있었습니다. 너무 뒤처진 나머지 대열 마지막에서 동생은 나지막하게 제 팔을 붙잡고 말을 했었죠 "형. 나 놓고 가면 안돼.. 알았지..?" 그 날 이후로 동생 손은 절대 놓지 말아야지. 놓지 말아야지 하고 되뇌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늘 제 뒤에서 팔을 붙잡을 것 같았던 동생이랑 저는 각자의 길을, 각자의 방법대로, 각자의 동료들과 묵묵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동생을 걱정할 때보다 믿어줘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때인 것 같습니다.
제 경험을 비추어보았을 때 '군대에 가면 철든다'는 말은 절반은 맞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군대 가서도 여전한 친구들도 많이 보았지만, 군대 가기 전에 멋있었던 사람은 군대 전역 후 정말 더 멋진 사람으로 변해있더라고요. 전 제 동생이 정말 멋진 녀석이기 때문에 전역 후에 멋진 모습을 기대하셔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맏아들을 보내셨을 때보다는 더 편안하게 믿고 기다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께도 한 말씀 올립니다.
이 편지를 아버지한테 보여드리는 날이 올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겁한 행동이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글로 남긴다면, 우연히라도 아버지가 이 글을 보시고 아버지 상처가 회복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 용기 내어 몇 자 적어봅니다.
군대에서 복무 중일 때 "아빠 차가 창피해서, 아빠가 차를 바꾸어서 왔으면 좋겠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죠? 그리고 그 말이 아버지께 엄청나게 상처가 되셨으리라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차는 16년식 suv지만, 당시 아버지 차는 2000년도 초반의 '매그너스 클래식'이었습니다. 차 기어를 넣는 클러치가 몇 번을 빠졌는지 셀 수도 없고요. 그런데 그런 차를 끌고 아버지가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는 군부대로 면회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돼서 며칠 밤낮을 걱정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아버지가 차를 바꾸실까, 말까 하시는데 아무래도 새 거를 뽑으시자니 아까우신가 보다"라고 전화로 말씀해주셨는데, 그때 머릿속에 두 가지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나는 '아버지가 안전하게 오실 수 있겠구나.', 나머지 하나는'아빠가 처음으로 아빠 거를 살 수 있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전화로 차를 바꾸자고 몇 번을 제안드렸지만, 그때마다 아버지가 확답을 안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친구 아버지 차는 어떤 차라더라~.. 아빠 차는 너무 옛날차여서 부끄럽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한테는 속상한 한마디였겠죠..
면회 당일. 아버지는 차를 바꾸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최신형 suv 자동차로 바꾸셔서 저를 데리러 오셨죠.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그 낡은 자동차를... 브레이크도 가끔 말썽인 자동차, 클러치가 안 먹어서 기어 변속을 몇 번을 시도해야 하는 자동차를 안 끌으셔도 되니까요.
면회 당일 차 안에서 아버지랑 했던 이야기 또한 다 기억이 납니다. 차가 정차하면 시동이 꺼지는 시스템부터 시작해서, 크루즈 자동운행 기능까지.. 아버지가 자동차 신기능 자랑만 4~50 분하셨었죠.
여태까지 당신의 것을 새거로 욕심내신적 없는 분이셨던 만큼 아빠의 웃음은 밝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툭 오간 한마디가 얼마나 아빠가 아프게 다가왔을지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아빠가 차를 바꾸었으니 아들이 안창피해도 되겠네?"
세상 어떤 아들이 군대 면회 온 아버지의 차를 가지고 왈가왈부할까요. 그때도, 지금도 아버지가 외제차를 끌고 오시던, 버스를 타고 오시던 저에게는 정말 단 하나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안 했다면, 오늘도 제 동생을 '매그너스 클래식'으로 데려다주시면서 힘들어하셨을 아버지가 눈에 그려집니다. 그걸 알기 때문에 그저 철없는 아들에 심술 정도로 아버지의 안전이 확보된다면 '철없는 아들'로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근데, 아빠.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아마 그 말이 엄청나게 아프게 다가가셨을 거예요. 그걸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생각하게 되네요. 내뱉은 말 주어 담을 수 없듯이, 그 상처를 없었던 일로 돌릴 방법은 없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