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치 Nov 15. 2024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

나는 나와 결혼하겠다 16화


"당신은 내 곁에 있어야 해."
"당신이 떠나면 난 불행해질 거야."
어떻게든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하는 이런 말들은 다 부질없습니다. 이 세상에 불행이 존재한다는 당신의 이야기에 상대가 동의하기를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다릅니다. 진실은, 우리 모두의 진정한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진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진정한 사랑에서 멀어지고 관계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뿐입니다.

나 스스로를 해방시키십시오.
내 연인이, 내 친구가 나를 자유롭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나 자신만이 나를 놓아줄 수 있습니다.

나는 나와 결혼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 사랑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유일한 사랑입니다. 나는 내 안에서 나와 결혼하고,  나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투사합니다.


바이런 케이티의  「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을 읽으며 문단마다 여백의 묵상을 하게 된다. 적토마를 타고 문단을 훌쩍 뛰어넘을 수 없이, 의미를 곱씹어 나이테로 맴돌이하며 읽는다.


돌이켜 보면 나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그 관계의 실마리가 되는 애착태를 가늠하는 과거 성인애착유형 테스트에서 자기긍정 타인부정의 회피형이 다.





결과처럼 나는 학습된 친절함으로 살뜰하게 대하지만 감정이 초밀착되면 한 발짝 흠칫 물러나 바라보는 움찔함이 있다.

황량한 우주 세파의 중력에도 힘겨워 자신을 운신하기도 힘든데 하물며 남이 나를 의지함에 있어서랴!





솔직히 마치 남의 뒤를 닦아주는 듯 귀찮음과 짜증이 교차되는 심정이다.


그러나 내면의 시니컬함과는 반대로 꽤 온기도는 청춘을 보냈다.  아픈 사람이 줄줄이로 꿰인 가족사에서 소위 간병하랴 절전모드 없이 불사른 셈이다. 후회는 없다.

비록 속은 기계처럼 선뜻하지만 내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 한에서  너트를 볼트에 끼우고, 드라이버 사용하여 너트를 돌려 볼트를 조여 주는 밀착형 관계를 는 수고로움에 나름 이과적 갬성이 있었던 것이다.

한 번씩 가족들이 나를 사랑 가득 희생했다며 말을 거들 때면 나는 마치 양심이 찔린 듯 불편했다. 나는 그리 사랑으로 가득 부푼 애드벌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 곁에 있어야 해."

"당신이 떠나면 난 불행해질 거야."


태어나서 이런 압박적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기에 이런 말들이 생소하다.

물론 세상에 불행이 존재한다는 당신의 이야기에 상대가 동의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인,  혁실직시적인 말에는 동의한다.

나 또한 이 진실에 제외되지 않는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에서 멀어져 관계의 볼트를 조이는데만 집착했기에 나는 마모되어 조현병과 공황장애가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적이 있었 때문이다.







이런 인간에 대집착 없는 데에 집착하는 회피형인 나에게도 연인이 있어 내 골방에 출몰한다.

몇 년을 마음을 받지 않고 시큰둥 무뚝뚝한 무표정의  기계인간에게 무던히도 곁을 지켜준 사람이다.


그런데 낙엽이 물들기 전에 시드는 가을녁에 나는 그만 가을병에 싯노래졌다.

어깨뼈가 튀어나올듯한 통증이 팔에까지 뻗히고 물조차 마시지 못하고 몸져누웠다.

아플수록 혼자일 때 맘껏 아파할 수 있는  성정 탓에 그를 내쳐 버리고 며칠 전화통화만 한 채 소파에 붙박이로 웅크려 지냈다. 한 켠으로는 챙겨주는 사이사이 폰만 바라보는 그가 무심하다는 생각 한몫 만사가 귀찮은 내면이 시무룩 무심해진 탓도 있었다.


런데 아픈 와중에 되돌려 환기해 보니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함께 고통스러워한다면 둘 다 비틀비틀 휘청댈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건강히 깨어 있어야 타인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돌봄 중간 쉬는 시간에 폰을 봤을 뿐이다.

마음은 에너지기 때문에 사용하면 쉬어줘야 하듯,  그는 할 일을 하고 폰을  것이다.

어쩜 내가 아픈데 폰을 볼 수 있담, 하고 비정한 이야기를 짓는데 몰두하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타인은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반려자를 '배우자'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자적 해석(配偶者)'을 제치고 순우리말로 '배우자'.

상대를 통해 투사되는 내 왜곡된 해석을 바로잡을 수 있어 서로를 '배울 수 ' 거울의 사이.

또 '자기'야~라고 부르는 호칭에서 '자기'자신을 사랑하듯 상대를 나 자신처럼 오롯이 사랑하는 형태를 언어에서 발견하게 된다.


다시 한 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상처받을 수 있는 비련의 주인공으로 전락시킨다면 내면 고요히 바라보는 주시자인 온전한 존재인 자신을 만날 수 없음을 자각했다.

어떻게 완벽하지 않은 자신과 사랑에 빠질 수 있겠는가.


바이런 케이티는 말한다.


'나 자신'을 필요로 하라.

평생을 함께 할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까?
거울을 들여다 보십시오. 당신은 내내 당신 자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허기진 결핍이 이번 가을병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을 안다.

완벽한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것이 아니라, 남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사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채워줄 수 없음을.


하여 나는 나 자신과 결혼하겠다.

반쪽이 아닌 온쪽으로서의 나 자신을 사랑하겠다.

그리고 그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투사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