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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Feb 28. 2024

타짜가 돌아왔다

친정의 설 명절 풍경

"보래이, 내 났데이. 보자~  너거 뭐 날 게 있나? 없구나! 그라믄 고다!" 고!"


엄마가 '고'를 외치며 비 열 점짜리 화투패를 손목 스냅을 주며 신나게 내려치고 비 쌍피를 가져갔다.


"아이고 이거 큰일 났다. 우리 엄마가 고했다.  정여사 타짜 실력 나온다. 다들 맘 단디 무라"


오빠는 탄식을 하는지 함성을 지르는지 아리송한 말투로 타짜의 귀환을 우리에게 고지하였다.

이 판에서 나는 엄마에게 200원을 잃었다.


우리 엄마 정여사는 동네 10원 내기 화투판의 타짜였다!


오후가 되면 동네 마을회관에는 초로의 동네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자식은 다 키웠고 남편은 아직 귀가전인 50 중반부터 70 언저리의 부인네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회관에 모였다.

감자를 쪄서 나누기도 하고 어느 집에 경사가 있으면 음식을 나누기도 했다. 어느 집 남정네가 도마 위 횟감 쳐지듯 난도질을 당하기도 했고 동네 대소사가 의논되기도 했다. 마을화관은 동네부녀자들에게 이런 저런 역사가 스민 곳이었다.


그러다 화제가 떨어지면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화투판이 저절로 벌어지기도 했다. 어느 날은 소영이 엄마가 잔돈이 잔뜩 생겼다며 자랑을 하다 "소영이 집 잔돈 쓸어오자. 판 깔아라"는 왕언니의 지령이 떨어진 적도 있었다.

언제 한 번은 김주사댁 아줌마가 "내 오늘 스트레스를 좀 풀어야되겠심더. 모도 여 모이가 화투 한판 칩시더이"라며 화투패 짝짝하는 소리를 들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스스로 판을 모아 벌인 적도 있었다.


마을회관에 화투패가 벌어지면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 자주 정여사가 나타났다. 먼저 치자고 선두를 나서지는 않지만 정여사가 판에 나타나면 그날  그판의 10원짜리  50원짜리는 우리 엄마 차지가 될 확률이 거의 6할이었다.


엄마의 회투패 넘기는 소리는 아주 찰졌다.

짝! 짝!

가운데 놓인 공동의 패를 넘겼는데 마침 바닥에 깔린 화투와 짝이 딱 맞을 때 엄마의 세상 기쁜 얼굴은 화투의 '짝'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타내주었다. 조선시대 관아에서 죄인의 물을 끼얹은 엉덩이에 곤장이 내려칠 때의 소리가 이러할까.


한 번은 동네 부인네들이 '정여사 50원짜리를 탈환하자'며 달려든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우리 엄마는 '패만 잡으면 혈액 순환이 쫙~되는' 정마담 레벨의 전투력과 운이라는 외부 요소를 만나 이무기 승천의 실력을 뽐내며 동네 잔돈을 다 긁어버렸다는, 소소한 동네 전설만 남기게 되었다.


화투판에서 점수 계산을 할 때면 엄마는 머리는 암산 실력으로 빛이 난다. 그 누구보다 계산이 빠르고 정확하다. 내 것 남의 것 모두의 패를 계산한다. 내가 모든 곳에 같이 있진 않았지만, 계산이 틀린 적은 거의 없을 거다.

고, 설사, 폭탄, 광팔이까지 게임을 순식간에 복기해서 점수를 계산해 낸다. 나는 번번이 한 번씩 까먹는 더블 점수의 기회를 엄마는 귀신같이 기억하곤 했다


'이래서 고스톱이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하는구나~'

나는 애저녁에 알게 되었다.


동네 타짜 정여사는 나이 80을 넘기고는 서서히 계산이 느려졌다. 눈보다 빨랐던 손도 발보다 느려져 가고 있었다.

초기 치매를 진단받고 화투는 엄마에게서 멀어져 갔다. 마을회관의 멤버들도 세상을 뜨거나, 신도시로 이사를 가서 동네를 뜨거나, 노인주간보호 대상자가 되어가는 이유로 하나둘씩 회관을 떠났다. 엄마는 세 번째 이유로 더 이상 회관 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다.


친정 식구들은 명절에 모이면 가끔씩 화투판을 벌이곤 했다. 엄마도 참전하는 화투판이다. 사위와 딸과 아들과 며느리와 엄마가 점 100원짜리 전투에서 침을 튀기며 하는 전쟁은 박장대소의 시트콤이곤 했다.


세월이 가고 한 날 한 시에 딸 아들 며느리 사위가 명절이라고 모이기도 쉽지 않게 되어 화투는 어쩌다 간혹 즐기는 이벤트가 됐다. 이벤트가 벌어진다 해도 엄마는 참전하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번 설에 어쩌다 보니 많은 사람이 모였다. 나는 언니 오빠 형부에게 오랜만에 화투 한 게임하자고 건의했다. 말이 나오자마자 40년 먹은 나무 농짝에서 군용 색 화투 판이 등장한다. 색 바랜 화투가 군용 주머니에서 아직 나 살아있소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모두들 즐거워하며 거침없이 하이킥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시트콤을 찍어낸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아이들도 하나씩 둘씩 갤러리가 된다. 갤러리들 사이로 정여사가 흐뭇하게 자식들을 바라본다.

"엄마, 한 판 해볼래?"


엄마는 이번에는 웬일인지 슬그머니 판에 자리를 잡고 화투패를 쥐었다. 이때부터 이 화투판의 주인공은 왕년의 타짜 정여사였다. 비록 손은 눈보다 빠르진 않았고 특유의 '짝!' 하는 경쾌한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이날은 돌아온 타짜의 귀환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언니도 오빠도 나도 생기가 찾아온 엄마가 반가웠고 환한 큰 웃음을 웃는 엄마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기꺼이 정타짜의 빙다리 핫바지가 되었다.


나는 무려 3,300원을 엄마에게 잃었다. 작은  언니는 1,500원을 잃었고 큰 언니와 오빠는 믿을 수는 없지만(!) 거의 본전 치기라고 했다.

엄마 앞에는 천 원 백 원이 얼추 5.000은 되어 보였다. 저거 거의 다 내 돈이었다.


더 흥겨운 명절을 위해 우리는 화투를 접고 윷놀이를 했다. 정타짜는 윷놀이는 됐다며 돈을 챙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정타짜는 아직 살아 있었다.

그는 언젠가 또 돌아올 것이다.

타짜의 또 다른 귀환을 나는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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