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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Mar 27. 2024

시사(時事)가 역사(歷史)다

<한 권으로 읽는 대한민국 대통령실록>을 읽고

공부하는 모임에서 현대사를 대통령 위주로 공부해 보자고 누군가 제의해서 책을 고르다가 만장일치로 선택한 책이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대한민국 대통령실록'이다.

2022년 개정증보판은 문재인 대통령까지 다루고 있지만, 내가 도서관에서 빌렸던 책은 2014년 발간된 첫 번째 판본으로 이명박대통령까지만 다루고 있었다. 모임에서는 김대중대통령까지만 같이 읽고 공부를 했다.


분량의 상당한 부분이 이승만 대통령차지였다. 12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대통령을 하기도 해서이겠지만, 한국전쟁 후 격변의 시기에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었기에 다룰 내용도 많아서일 것이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 역사를 배우기로, 이승만은 '나쁜 대통령'이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도 여기에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록 독립운동을 하긴 했지만,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 부정부패, 독재를 자행했고 이 때문에 4.19 혁명이 일어나서 국민들이 쫓아낸, 국민들 손에 쫓겨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2월 초 이상한 영화가 개봉이 되었다. 이름하여 '건국전쟁'이란다. 이 영화 때문에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제대로 몰랐다'는 둥, '좋은 대통령이었다'는 둥 하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벌써 역사적 평가가 끝난 대통령으로, 그것도 이미 오래전에 확실히 평가가 끝난 인물로 알고 있었는데 새삼스러웠다.

내가 부정적으로 평가된 것만 기억하고 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갖고 '한 권으로 읽는 대통령실록' 이승만 편을 밑줄 그어 가며, 노트 필기해 가며 꼼꼼히 읽었다.


책을 읽기 전이나 책을 읽은 후나,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대한 내 평가는 다를 바 없다.

그는 동지들이 치열하게 현장에서 독립운동하고 있을 때 비교적 편안한 육신의 상태를 보존하며 덜 치열한 독립운동을 진행했다.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일 때는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후 대통령이 된 후는 더욱 실망스러웠다. 한국전쟁 당시의 무방비함, 전쟁 중임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정치 파동, 권력 연장을 위해 벌인 사사오입, 정적 살인, 수많은 양민 학살, 국민방위군, 국민보도연맹 등등. 책을 통해 그 시대를 다시 보아도 쫓겨날만한 나쁜 대통령이라는 생각이 강조될 뿐이었다.


이승만 이후에는 장면 총리가 있었고 윤보선대통령이 있었다.

장면과 윤보선은 낯설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인물이라서인지 이들은 내게 '역사'이다. 책이나 드라마에서나 접할 수 있는 글자 그대로 '역사(歷史)' 총리와 대통령을 한 기간이 짧고 이승만에 비해서 사건과 사고가 적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박정희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존재였다. 그가 부하의 총격으로 죽음을 맞이한 후 대통령이 죽었다고 엄마가 펑펑 울던 것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엄마가 서럽게 울었기에 나는 그가 착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때 나는 고작 9살이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80년대는 나의 청춘기였다. 중학을 보내고 고등학교엘 다녔다.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올림픽을 준비하길래, 우리가 잘 사는 줄 알았고, 전두환이 능력 있는 대통령인 줄 알았다. 87년에 들어섰어도 그해 여름이 되었어도 뉴스도, 학교 선생님도 부모님도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몰랐던 것일까? 모르는 척했던 걸일까?


내게 TV뉴스가 말해주지 않는 사실을 말해준 사람은 대학교를 다니던 친구 오빠였다.

"너거들, DDD가 뭔줄 아나?"

"모르겠는데?"

"두(D)환이 대(D)가리 돌(D) 대가리. 하하하하"


기분이 이상했다.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랐다. 대통령을 왜 저렇게 말하지? 이런 생각만 났다.

그 뒤 그 오빠한테서 들은 전두환에 대한 이야기는 순진한 시골 고등학생인 나에게는 경악과 충격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어른들은 뉴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 거지?

어른들이 말해주지 않는 사실은 가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  역사책을 보고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나서 알게 되었다. 세월이 가서 잊었던 디테일을 '한 권으로 읽는 대통령실록'을 통해서 되새김질하였다.


보통사람 노태우를 나는 뽑지는 못했지만 그가 대통령노릇을 할 때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TV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들은 더 이상 TV속 세상이 아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매일 신문을 챙겨보았다. 사설도 읽고, 기사도 보고, 분석도 챙겼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 권으로 읽는 대한민국 대통령실록'에 1990년 민자당 합당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씁쓸한 역사이지만 반가웠다. 내가 겪고 느꼈던 바로 그 뉴스였다. 책에서 '민자당 합당'은 원인과 경과와 결과까지 단 몇 줄 겨우 한 단락짜리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나에게는 일 년을 아니 이후 몇 년 동안 지속된 뉴스였었다.

나의 뉴스가 이제 역사가 된 것이다.


1992년부터 나는 대통령선거에 참여하였다. 그해 대통령은 김영삼이 되었다.

김영삼대통령 때 있었던 많은 사건과 사고들 - 서해 페리호 침몰, 삼풍백화점 붕괴, 구포철도 탈선, 대구지하철 화재, 비행기 추락 그리고 IMF구제금융 - 이 발생하는 동안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였다. 매일 보는 뉴스, 툭하면 내뱉던 한숨과 걱정이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IMF 구제금융은 내게서 직장도 빼어갔다.

이 일들이 이 책에 빼곡히 적혀있었다. 이전 시대 대통령들의 기록을 대할 때와는 마음이 달랐다.

글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고, 한 줄 한 줄이 영화처럼 촤르르르 머릿속에 흘러갔다.


'DJP연합, 이회창/김영삼 간의 갈등, 이인제의 출마, IMF 금융 위기' 덕에(?) 김대중이 97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IMF 금유위기로 퇴사를 권유당했던 나는 김대중대통령이 취임하고 얼마 있지 않아 재취업하였다. 우리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을 자발적으로 벌여 우리의 저력을 세계에 알렸다. 비록 나는 모아둔 금이 없어서 내진 못했지만.

2002년에는 월드컵에서 4강에도 들어가 봤다. 공장을 돌리다가 일을 멈추고 다 같이 축구 경기를 봤던 시절이다. 아파트 여기저기서 "대~한민국!!!" 하고 손뼉 치던 시절이다. 우리가 살아낸 바로 그 시절이었다.

그때는 희망이 있었다. 이대로 쭉 다 잘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노태우대통령을 읽을 때부터, 책의 내용은 더 이상 역사책이 아니었다. 나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를 복기하는 중이었다. 당시 관심을 가지고 읽던 뉴스기사가 모이고 모여 책에 기술되어 있었다.

그렇게 어제 나의 뉴스(시사)는 오늘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는데도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전혀 몰랐던 내용도 많다고 했다. 금융실명제가 언제 실행됐는지 기억하지 못했고 IMF가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3당 합당이 우리 삶에 아무 상관이 없다고 느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조선의 역사나 고려의 역사를 책으로만 배운다. 어쩔 수 없다. 그 당시 과거와 소통하는 길은 기록과 유물뿐이니까. 하지만 미디어가 생기고 발달한 현대에 와서는 사진도 있고 신문도 있고 책도 있고 TV도 있었다. 그런데도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실감 나게 아는 사람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뉴스를 가까이 두었느냐 아니냐였다.

특히 정치 뉴스는 복잡하고 꼬여서 하루 만에 끝나는 적이 없고 시일을 두고 쌓이고 쌓여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골치 아프고 어렵다고 뉴스를 멀리한다.


그런데, 뉴스를 멀리하는 것은 역사를 멀리하는 것과 같다.

대학생이 되어 뉴스를 자주 보고 좀 더 챙겨본 덕에 지금 적어도 1990년 이후 현대사는 친근하게 생각된다. 역사책을 네 번 다섯 번 들춰볼 것을, 두 번 세 번만 펼쳐보아도 될 것 같다.


지금도 정치는 복잡하고 어렵고 골치 아프다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어쩌면 이런 무관심과 경시를 어느 정치인과 권력자가 노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오늘의 뉴스를 멀리하지 말자. 지금 시사를 가까이하는 습관을 들이자. 그것이 머지않아 우리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줄 내일의 역사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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