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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Apr 08. 2024

이슬아 - <가녀장의 시대>

가녀장의 시대라길래, 처음에는 무당이나 무녀 혹은 신점 보는 샤먼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책 표지에 여자가 왕관 같은 걸 쓰고 있어서 더 그랬다. 표지에는 향도 피워져 있고 한자도 있었다. 나는 그 한자가 제사 때 쓰는 지방인가 했다. 


알고 보니 가녀장은 가부장(家父長)도 아니고 가모장(家母長)도 아닌 가녀장(家女長)이다. 

이 소설의 무대는 낮잠출판사이다. 낮잠출판사 사장은 이슬아이다.  이슬아 사장은 두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직원의 이름은 복희와 웅이다. 복희와 웅이는 슬아 사장의 모부(母父)이다. 딸 이슬아가 모부 두 명을 고용하여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니 이슬아는 집안의 가장이다. 딸(女)이 집안의 가장이라서 가녀장이다. 


어느 삐딱한 가부장들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이슬아는 천하의 후레자식이 될 것이다. 가녀장은 손가락에 물 한 방울도 안 튕긴 생활을 3년째 하고 있지만 직원들의 상사인 이유로 모부를 막 부려먹는다. 


복희는 출판사의 모든 식생활을 책임지고 있다. 하루 3식과 간식, 손님 접대용 음식까지. 아무나 대체할 수 없는 노동이기에 웅이의 두 배가 되는 급여를 받고 있다. 복희는 10년 넘게 시부모와 살면서 공짜 가사 노동을 제공해 왔다. 매번 11인분의 밥을 준비하다 낮잠출판사에서 준비하는 3인분의 식탁은 복희에게는 누워 떡 먹기였다. 3인분 식탁을 준비하면서 복희가 자신이 비로소 '흥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웅이는 집안팎 대소사를 맡고 있다. 예를 들어, 청소, 각종 수리와 수선, 운전 같은 것들이다. 가부장이 아닌 가족의 일원 혹은 가녀장의 직원으로 살다 보니 자신이 상당히 '깔끔'을 떠는 사람인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양팔에 청소기와 대걸레를 타투로 새겨 넣기도 했다. 오십 다섯의 웅이에게는 아직 갚아야 대출금이 남아 있다. 세상은 부를 타고나지 않은 서민이 빚을 지지 않을 도리가 없게끔 굴러간다. 그래서 웅이는 삼십 대에 받은 대출을 갚기 위해 주말에는 이벤트 장비 렌털 업자로 투잡을 뛴다. 


철이는 웅이가 투잡을 뛸 때 같이 일하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다. 별 생각은 없지만 물불 안 가리고 무언가를 하며 사는 친구다. 여름에는 물놀이 안전요원으로 가을 겨울에는 산불 감시 요원으로 그리고 웅이의 직원으로.


슬아의 거의 유일한 친구 미란도 남자친구랑 이유 없는 헤어짐을 한 뒤 슬아의 집을 방문하곤 한다. 

복희와 웅이와 철이와 미란 외에도 소설에는 슬아가 키우는 고양이, 스타일리스트, 카메라감독, PD, 인쇄소 사장, 슬아의 할아버지, 복희의 가족들이 출연하고 있다. 


소설은 독특하고 통통 튀고 맹랑하다.

조금만 읽어보면 소설은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주인공 이름도 이슬아, 소설의 작가도 이슬아. 이슬아의 부모 이름도 소설 속 복희와 웅이이다. 슬아가 운영하는 실제 출판사는 헤엄출판사. 소설 속에서는 낮잠출판사. 소설 속에 나오는 36개의 에피소드가 아마 대부분 실제 이슬아 작가의 생활일 것이라는 짐작을 못한다면 사람은 센스가 없는 사람이라고 밖에 없다. 


소설인지 수필인지 알쏭달쏭하기도 하다. 36개의 에피소드는 따로 분리해 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소설에 기승전결이 없다. 클라이맥스도 없다. 시트콤 드라마 같다. 요새는 이런 이야기도 소설이 되나 보다. 소설, 그 까이꺼 나도 쓸 수 있겠는데! 슬슬 근거 없는 자신감이 기어오른다. 좋은 건지, 위험 신호인지 모르겠다. 괜히 이런 소설을 읽어서 소설을 써보겠다고 팔랑대는 아닌지.  


문체도 낯설다. 무미건조하고 단조롭다. 복문이 거의 없고 거의 다 주어와 서술어 한 문장으로 된 단문이다. 읽기에 부담이 없다. 직유도 없고 비유와 은유는 보이지 않는다. 복선 따위도 없다. 독자가 마음 놓고 읽을 수 있다. 머리 따위 굴리지 않아도 된다. SNS와 MZ사이에서 히트를 구가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 일지도 모르겠다. 요새는 이런 게 트렌드라고 하니 말이다. 한번 따라 해 보려는데 이것도 쉽지 않은 것 같다. 


친구 현정이는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는 경북 경주 지독한 가부장제 가족에서 억눌린 며느리로 20년을 살아왔다. 현정이가 가부장이 찌질하고 가녀장이 대장인 이야기에 대리만족을 하고 감명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동네 후배 현주는 가볍고 말장난 같다고 했다. 소설인지 수다인지 모를 이 책이 공전의 히트를 했다니, MZ의 속을 모르겠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가벼워짐을 우려했다 


나는 가녀장의 시대의 도래를 예견한 작가가 대견하기도 했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모부'라는 단어였다. 

부모라는 단어가 몇 백 년 아니 쳔년이 넘게 잘 쓰고 이어져 오고 있는데 굳이 모부라고 엇박을 놓아야 했나?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정언이라고. 언어를 제대로 불러야 내용이 따라오면서 정착이 된다고.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부'든 '가녀장'이든 작가의 정언명령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지금의 어떤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해서 모든 것을 디비나사이 할 필요는 없다. 굳이 모부라고 하지 않아도 부모라도 해도 지금은 아버지의 시대가 저물고 어머니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의 시대는 기울고 부인의 시대가 차오르고 있다. 아직 대세는 아니더라도 기울기의 역전이 머지않았다, 고 생각한다.

말이 먼저이고 내용이 뒤따르기도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사회의 내용이 변하기도 한다. 잘 쓰고 있는 단어를 억지로 끼워 맞춰가면서까지 조어를 할 필요가 있을까. 


 소설 말미 작가의 말에서 이슬아는 말했다. 

"늠름한 아가씨와 아름다운 아저씨와 경이로운 아줌마가 서로에게 무엇을 배울지 궁금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TV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작은 책 한 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무수한 저항 중 하나의 사례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어렵겠지만, 이와 같은 드라마를 TV에서 본다면 아주 센세이셔널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 많은 이들이 호응하고 많은 이들이 피켓을 들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단 중립기어를 박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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