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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Apr 22. 2024

MET에서 길을 잃다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고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뉴욕을 여행하게 되었다. 약 열흘동안의 뉴욕 여행동안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MoMA였고 또 하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었다. 별로 미술에 관심도 없고 조예는 커녕 일자무식인 나조차도 이 두 곳이 얼마나 많은 양질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지는 익히 알알기에, 기왕 뉴욕에 왔으니 여기는 가봐야 '아 내가 뉴욕 다녀왔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 계획을 잡고 여행을 앞둔 지 얼마 안 되던 어느 날, 아주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이 영상 썸네일 하나를 나한테 보여주었다. 썸네일에는 영화평론가 이동진 얼굴이 있었고 썸네일 카피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라는 글자가 써져 있었다. 평소 이동진 채널을 즐겨 본 것도 아니고 그의 영상을 본 적도 거의 없는데 유튜브는 어찌 알고 나에게 '메트로폴리탄' 썸네일을 띄워준 것인가?

아마도 내가 포털 검색창에 '뉴욕'이라는 글자를 몇 번 쳤더니 컴퓨터가 혹은 모바일이 지가 제 주인의 관심사를 알아채고 스스로 찾아서 추천해 준 것이리라. 섬뜩한 세상이라 생각했지만, 나는 이내 이동진과 메트로폴리탄을 연관 검색하였다.


검색 결과, 2023녀 연말쯤 책 한 권이 출간되었고 이동진이 이 책을 아주 극찬하며 추천하였다는 것이다.

책 제목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이었다. 홍보 문구를 보니, 잘 나가는 금융업 종사자가 형의 죽음으로 인하여 '폼 나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으로 취직하여 그 안에서 느꼈던 생각과 감상을 담담히 쓴 에세이라고 하였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다루고 있고, 작년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니 '아, 이건 뉴욕 가기 전에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은 인천에서 뉴어크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나와 함께 탑승하여 15시간의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15시간의 비행시간 중 식사 시간과 잠깐의 휴식 시간을 제외한 10시간 정도 책을 읽었는데 3/4을 읽었고 남은 분량은 밤에 호텔에서 틈틈이 읽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구경 가기 전까지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막대한 시차로 인하여 어차피 처음 며칠간은 밤에 잘 수도 없어서 책은 아주 좋은 날밤 새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저자는 미술관에서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미술관의 온갖 전시관에서 경비원 일을 하면서 온갖 미술품을 직관하였다. 그중 저자에게 인상 깊었던 몇 개의 전시관과 작품 그리고 관람객을 골라 손으로 스케치한 그림과 함께 실었다. 미술품의 사진을 싣지 않은 건 아주 잘한 일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은 미술품을 소개하는 책이라기보다 미술품을 대하는 관람객의 시선으로 그날의 느낌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카메라 렌즈로 찍은 분명한 작품의 사진보다는 아마도(?) 저자의 손으로 그린 단순한 터치의 묘사가 저자의 느낌을 더 잘 표현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Met에 입성하기 전에 적어도 이 책에 있는 작품 중 반이라도 보자는 생각이었다. (현지의 모든 사람들이 메트로폴리탄이라는 긴 단어를 쓰지 않고 메트라는 짧은 단어를 말하였다. 뉴욕에서 메트로폴리탄이라고 말하면 마치 서울이라고 하지 않고 서울특별시라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도전이었는지는 미술관에 가서 코트를 맡기는 10분 동안 벌써 판단이 되고 말았다.


금요일 점심 무렵, 코트를 맡기는 데만도 15분 정도가 걸릴 만큼 수많은 사람이 미술관에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미술관에 입장하자마자 당연한 것처럼 1층 이집트관부터 먼저 갔다.


몇 년 전 영국 대영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반나절을 보냈는데 1층부터 보다가 위의 층을 다 못 볼 수가 있으니 거꾸로 위에서부터 1층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모자라 우리는 1층에 있는 로제타스톤 같은 아주 중요한 이집트 유물을 못 보고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을 반추하여 이번에는 1층부터 보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집트관을 다 보고 나오니 거의 한 시간이 다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 메트의 1/10도 채 보지 못한 상태였었다.


순서대로 쓰윽 훑고 지나가자는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이대로라면 다 쓰윽 훑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우선순위를 두기로 했다. 이집트관을 뒤로하고 우리는 같은 층에 있는 유럽 조각상 방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이동하는 중간에도 무수한 책에서 본 듯한 작품들이 우리 옆을 지나갔다.

"아, 이거 난 어디서 봤는데..." 누군가 이야기하면, "됐다. 여기 있는 거 거의 다 어디서 본 것들이다. 집중하자. 이러다 반도 못 본다."라고 환기를 시켰다.


유럽 조각상 방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답고 섬세한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즐비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가운데 제일 좋은 자리에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조각상이 있었다. 다른 작품은 눈으로 흘려 보았지만 이 작품은 -남들이 유명하다고 하니- 꼼꼼히 앞뒤로 둘러보았다. 조각인데 피부 밑에 피가 흐르고 있을 것 같다. 대리석이 무른돌이라고 하지만, 이리도 정교할 수가.

돌을 잘 다루는 민족들이 문화적으로 번성하고 우수하다고 하던데, 그런 측면에서는 로마나 한민족이나 천 년을 간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국뽕에 혼자 차올라 보았다.


겨우 1층에 방 두세 개 보았는데 일부는 지친다고 떨어져 나갔다. 앉아서 쉬고 있겠단다.

남은 우리는 다른 것들을 포기하고 2층 유럽 회화와 모던 현대 미술방만 보기로 취사선택을 하였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한다. 4시간은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인간은 왜 같은 시행착오를 하고도 매번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인지. 4시간은 절대적으로 모자란 시간이었다. 방 하나만 본다고 해도 충분하기나 했을까?


유럽 회화방은 미술 교과서의 교과서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있던 그림들이 전부 다 있었다. 고호, 고갱, 세잔, 드가, 모네, 마네, 르느와르, 클림트, 렘브란트, 쇠라, 피카소, 달리, 앤디 워홀...... 아주 유명하지만 미처 내가 이름을 모르는 화가들, 작품들이 전부 다 그곳에 있었다. 뉴욕은 이 미술관에 있는 그림들만 팔아도 시 전체의 인구가 몇 년을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융의 도시 뉴욕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도시 중 하나인 이유가 바로 메트 때문이 아닐까?

자랑스럽고 우수한 문화를 보유했지만 이리저리 많이 뺏기고 훼손당한 우리 입장에서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작품 하나하나 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방 하나도 다 못 돌 것이 뻔했다. 애석하게도 메트에서는 이 모든 귀한 작품을 눈으로만 담아야 했다. 거의 훑듯이 보았지만, 내 눈에 꼭꼭 잘 담아두려고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미술관에서 나왔을 땐 머리가 지끈거리긴 했지만.

다음에 또 뉴욕에 온다면, 메트와 모마만 일주일을 두고 보야도 되겠다. 이런 건 매번 해외여행 갈 때마다 하는 다짐이자 아직 한 번도 지켜지지 못한 결심이다.



이름난 작품을 찾아다니느라 정작 비행기에서 불면의 호텔에서의 밤을 함께 지새운 '메트로미술관 경비원'이 남긴 작품을 그와 함께 감상하지는 못했다. 뭐 꼭 누군가가 보고 느낀 작품을 똑같이 보고 느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브링리의 책 덕분에 사람이 잘 찾지 않는 메트의 방 이야기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고, 메트에 직접 와서 걸작들을 현피하게 됐으니까, 감사하게 생각한다.


브링리가 지목한 작품을 그처럼 감상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방방마다 서 있는 파란 옷의 경비원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들은 방 어디든지 서 있었다. 혹자는 정자세로 혹자는 짝다리로 혹자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책에 따르면, 메트의 경비원들은 두 시간마다 방을 바꾼다고 한다. 지겨움과 단조로움과 오래 서있는 불편함을 경감시켜 주려는 의도에서 일 것이다. 책에 쓰인 대로, 대부분의 경비원들은 유색 인종이었다. 오래 살고 있는 백인들은 다른 화이트컬러의 일을 할 것 같고, 이런 일은 유색 인종이 많이 하는 것 같다. 책에도 이런 언급이 있었다.


전에는 일이 단순하고 편해 보인다, 편히 일하면서 월급 받는다, 좋은 작품을 실컷 보고 꿀 빠는 직업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책을 읽고 나니, 미술관 경비원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미술관 속에 있는 '사람'에게도 관심을 두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덕분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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