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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Nov 11. 2024

사 년 묵은 보리쌀과 홈메이드 보리-무채나물 비빔밥

우리 남편은 쇼핑 중독에다 할인 중독자이다. 폰에다 온갖 쇼핑 앱을 깔아놓고 대폭 할인, 특가 할인, 신상 할인에 대한 알람이 뜨면 자신도 모르는 새 손가락이 움직이는 사람이다. 할인 쇼핑 중독자인 남편 덕에 꽤 괜찮은 식품을(남편의 쇼핑은 주로 식품류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저렴하게 먹기도 하고, 싸다는 이유로 맛도 모르는 음식을 잔뜩 사서 꾸역꾸역 먹어치운 적도 있다. 대폭 할인에는 대량 구매가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까.


사 년 전 겨울 그러니까 2020년 겨울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우리 집에 잡곡 바람이 불었었다. 보리쌀을 비롯 온갖 잡곡을 섞어 밥을 지어먹었다. 남편은 쇼핑사이트에서 잡곡을 검색하였다. 그러다 주문하여 우리 집에 배달되어 온 건 보리쌀 10kg들이 2포대였다.


이미 잡곡의 재고가 넘칠 정도로 있었기에 나는 보리쌀 20kg를 보고 기함을 하였다.

-이걸 다 언제 먹을라고! 내한테 물어봤었어야지!


내 말에 먹을 줄만 알았지 만드는 덴 젬병인 남편 왈,

되게 싸길래. 저거 금방 먹을 수 있다 아이가?


2020년에 수확하고 도정한 보리쌀 두 포대는 먹던 잡곡을 다 소진하고서야 개봉을 하였는데, 그때가 만 일 년 하고도 사오 개월이 꼬박 지난 2022년 초봄이었다. 2022년 가을에 이사 계획이 있었기에 기왕 개봉한 보리쌀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정말 가열차게 보리쌀을 섞어서 밥을 지었다. 어찌어찌하여 가을 이사 전에 10kg들이 한 포대의 보리쌀을 다 소진하게 되었다. 정말 각고의 노력이었다.


남은 10kg들이 한 포대는 이삿짐에 딸려 와서 부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소진에 대한 동기가 사라지니 우리는 굳이 보리쌀 포대를 개봉하려는 의지가 박약했고 보리쌀 포대는 그렇게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2년을 넘게 숨 죽이고 살았다.


어느 날 숨어있는 보리쌀 포대가 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려서부터 '쌀 한 톨을 얻으려면 여름 뙤약볕에서 농부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고 일을 해야 되는지 아나?'며 밥그릇에 밥풀이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밥상 위에 어쩌다 밥알이 떨어져 있기라도 하면 '어서 주워 먹으라'는 교육을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가며 인생의 절반을 살았던 나는, 구석탱이에서 몸을 파르르 떨며 지내고 있는 보리쌀을 누구든 살아있는 생물체의 입에 넣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은 같았다. 버린다는 것은, 보리쌀 포대에 담긴 수억 개의 낱알 보리쌀의 목숨을 내가 꺾는 것과 같다고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당근마켓에 내어볼까? 주변에 가축 키우는 사람 없나? 그냥 먹어도 될까?

내가 구석에 처박혀 있던 보리쌀을 보고야 만 순간부터 나의 이런 고민은 시작되었고 해결책이 나오기 전까지 고민은 멈추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는 언니에게 물어보았다. 어찌하오리오?

그 언니 왈, 일단 개봉해서 상태를 봐야 되지 않을까? 공짜로 주든, 당근에서 팔든, 아님 그냥 먹든, 상태에 따라 달라질 거니까.


나는 숨 죽이며 늘 나의 동태를 살피던 보리쌀 포대를 꺼내어 과감히 가위질을 하였다. 쓱-. 찍-.

육안으로 보기에 나의 보리쌀은 벌레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았으며 보기에 아주 멀쩡해 보였다. 오케이! 그럼 보리밥을 하면 지어볼까?


그렇게 쌀 4 보리쌀 6의 비율로 섞은 후 물에 아주 뽀득뽀득 씻었다. 3년 묵은 때 벗기 듯 아주 빡빡 문질러 씻었다. 영양소가 벗겨지든 말든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밥물을 적당히 담가서 쿠쿠 전자밥솥에 집어넣은 것으로 할 일은 끝났다.

20분 후 쿠쿠가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밥솥 뚜껑을 열어본다. 밥을 푼다. 밥을 먹는다. 이런 보리밥이 맛있잖아!


보리밥에는 어떤 레거시가 존재한다, 고 생각한다. 보리밥에는 콩나물도 넣고 무생채도 넣고 파란색 나물도 넣어서 된장이나 청국장 국물을 두어 숟가락 넣은 후 고추장 약간 참기름 약간을 첨가하고 숟가락으로 쓱싹쓱싹 비벼서 입 안이 미어터질 만큼 가득 넣어서 우걱우걱 먹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보리밥 레거시이다.


햇수로 5년 묵은 보리쌀로 만든 보리밥이 꽤나 맛있다는 것을 체험한 이후 나는 가게에서 만 원주고 사 먹는 보리밥 비빔밥을 집에서 꼭 만들어먹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만 원짜리 보리밥에는 콩나물, 무채, 취나물에다 집에서 잘 만들어 먹지 않는 고사리나물 치커리무침 두어 가지가 추가되고 걸쭉한 청국장이 보태지지만, 사실 아닌 말로, 잘 된 보리밥은 콩나물과 무채나물만 있어도 맛이 있는 법. 기왕 있는 보리밥에 조금만 손을 보태면 육칠천 원짜리 보리밥 수준정도는 집에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에 가서 커다란 가을 무 하나와 콩나물 340g짜리를 샀다. 집에는 며칠 전 해 먹고 남은 부추와 몇 달 전에 사서 냉동실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청시래기도 있었다. 나는 재료들을 싱크대에 올려 두고 유튜브를 켰다. 참 좋은 세상이다. 유튜브에는 무채 나물 레시피, 시래기나물 레시피가 수십 가지 올라와 있다. 나는 몇 개를 검색한 후 가장 쉬워 보이고 우리 집에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골랐다. 그렇게 고른 요리 채널은, 무생채나물은 류수영 배우 레시피, 시래기나물은 사위 TV_요리와 일상 레시피였다.


장장 서너 시간에 걸쳐 나는 콩나물무침, 무생채무침, 시래기나물볶음, 부추겉절이를 완성하였다. (무가 워낙 커서 씻고 채 써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보리밥 비빔밥을 위해 고추장도 새로 샀다. 고추장 떨어진 지가 보름이 지났는데 요리를 할 일이 별로 없으니 아쉽지가 않았다. 보리밥 비빔밥을 위해 40% 할인하는 청정원 순창 현미 고추장을 9,990원에 1.9kg짜리 한 통을 샀다.

그릇에 보리밥을 담고 그 위에 나물들을 예쁘게 올렸다. 고추장을 살짝 떠서 가운데에 올려두고 고소한 참기름도 반 숟가락정도 둘렀다. 이왕 하는 것. 계란프라이도 하나 만들어서 나물들 부끄러울까 봐 살짝 위에다 덮어주었다. 음~ 보기에도 아주 그럴싸한 보리비빔밥이 되었다.

숟가락으로 쓱쓱 비빈다. 밥보다 나물이 더 많아 밥을 뜨니 기다란 무채나물이 개울가 수양버들처럼 숟가락 밖으로 축 늘어진다. 숟가락 위에 밥은 햇살 좋은 터에 자리 잡은 양반 집네 4대 조상 무덤보다 더 크다. 입을 최대한 벌리고 고봉무덤 같은 밥을 쑤셔 넣었다. 우걱우걱 서걱서걱. 아, 이 밥은 적어도 구천 구백 원은 받아도 되겠다.


자신이 붙은 나는 자신 있게 아이들에게도 보리밥 비빔밥을 권유한다. 웬만해서 내가 먼저 내 요리를 권한 적은 잘 없다. 우리 집 아이들은 집밥 말고는 다 맛있다고 하는 사람들이라 나는 스스로 낭패를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천 구백 원 상당의 홈 메이드 보리비빔밥은 '이븐하게 잘 무친 나물이 이븐하게 잘 비벼졌다'는 평을 듣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오늘 점심은 남은 나물들을 잘 지은 보리밥 위에 얹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두르고 계란프라이로 마무리한 보리비빔밥이었다. 식구들은 그릇이 박박 소리가 날 정도로 싹싹 긁어먹었다. 그리고 나는 집밥에만 입맛이 까다로운 아들 녀석에게 거의 처음 이런 말을 들었다.

-무채나물 맛있네. 또 있나?


아들아, 무가 워낙 커서 작은 김치통 한통 가득 무채나물이 남아 있단다. 아직 9.5kg나 남은 보리쌀로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보리무채나물비빔밥을 또 만들어 주마. 기대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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