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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대택 Aug 09. 2020

026 단일팀 논의를
지연시키려는 남한

결정을 번복하려는 남한에게 로젠에서 만나라는 IOC (62.9-12)


두 번 전의 글은 1962년 8월까지의 IOC와 KOC의 단일팀 밀고 당기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1962년 8월 14일 KOC는 공식적으로 단일팀 구성에 동의함을 IOC에 알린 것으로 끝맺음을 했습니다. 


바로 전 글은 미 국무성과 주한 미 대사관이 남한의 단일팀 대응 전략을 어떻게 평가했고 어떻게 한국 외무부를 움직였는지를 1962년 6월부터 12월까지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다시 KOC와 IOC로 돌아와 1962년 9월부터 1962년 12월까지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지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 기간은 단일팀 구성에 KOC와 남한이 동의했지만 이를 지연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전략이 나타납니다. 여기에 북한과 IOC는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봐야겠죠. 



북한을 직접 만나지 않겠다는 KOC, 직접 만나라는 IOC와 만나자는 북한 



KOC의 단일팀 구성 동의에 IOC는 일단 환영합니다. 하지만 IOC 사무국이 남북 사이에서 연락책 역할을 해달라는 KOC의 요구에는 이견을 나타냅니다. 1962년 9월 17일 오토 마이어는 KOC에 편지합니다. 단일팀 구성 동의에는 감사하지만 IOC 사무국을 통한 소통은 시간도 많이 걸리니 양측이 직접 만나기를 요구합니다 (26-1). 


이 편지에 이주일 KOC 위원장은 10월 10일 답신합니다 (26-2). 답신은 남북의 직접 접촉이 제한되어 있고 우리는 이미 선발위원회를 출범시켜 가동하고 있으니 북의 규정과 임원 명단을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남한에서는 북과의 직접 소통이나 북한의 위원회의 헌장을 보지 않고는 단일팀 구성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이를 IOC 사무국 차원에서 조정하여 진행해 주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한이 단일팀 구성에 동의한 마당에 여전히 일을 빠르게 진행시키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10월 19일, 북한의 홍명희 위원장은 IOC를 통해 남한에게 장문의 전문을 띄웁니다. 아마도 북한의 적극성과 의지에 대한 대외적 명분 쌓기의 일환이었을 것입니다. 전문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6-3). 


‘... 세 번이나 요청했으나 아직도 답을 듣지 못함. 남북 모든 국민과 선수들이 단일팀을 원하고 있으며, 우리가 한 팀으로 나가면 더 많은 실력을 보여 줄 수 있고 같은 땅 같은 민족이 단일팀을 구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음. 이미 몇몇 종목의 예선전이 진행되고 있으니 빠른 양측의 만남이 필요함. 서울, 평양, 판문점 어디서도 좋음. 어서 만나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람.’


오토 마이어는 1962년 11월 5일 같은 내용을 재촉하는 편지를 씁니다 (26-4). 편지는 북한이 남한으로부터 아무런 답을 듣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 단일팀 문제는 갈수록 IOC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 따라서 양쪽이 서울이나 평양에서 직접 만나거나, 대화로도 해결이 안 되면 북한이 단독으로 출전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KOC가 단일팀 구성에 동의한 지 3달이 다하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었으니 답답했겠죠. 


IOC의 압박이 더 강해지면서, 남한 정부와 KOC도 빠르게 움직입니다. 이미 8월 중순 이한빈 주 제네바 공사는 KOC가 빠르게 IOC를 설득할 것과 남한이 선도적으로 단일팀 구성에 대한 구체적 안을 제시할 것, 그리고 가을 중으로 KOC가 IOC를 방문하고 브런디지 회장을 사전에 교섭해야 한다고 건의한 차였습니다 (26-5). 여기에 주한 미 대사관도 사안의 심각성과 시급성을 주지 시켰으니, 행동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남한과 KOC는 대표단을 꾸려 로비 활동에 들어갑니다. 먼저 월터 정은 11월 21일 브런디지를 만납니다 (26-6). 아마도 남한의 입장과 앞으로 전략에 대해 논의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대화 내용은 찾을 수 없습니다. 



북한을 지원하는 동구권 위원들 



주한 미국 대사관의 분석과 평가에서도 그러했지만, 북한의 동구권 국가 IOC 위원들과 IOC 사무국에 대한 로비는 효율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체코의 그루스 교수 Dr. Joseph Gruss가 오토 마이어에게 1962년 11월 20일에 보낸 편지는 북한에 대한 지원을 예를 보여줍니다 (26-7). 


‘... 59차 총회에서 북한 올림픽위원회가 인준되고 남한이 단일팀 구성을 위한 결정을 9월 1일까지 내리지 않고 거부한다면 1964년 올림픽에 북한이 단일팀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결정했었음. 북한위원회는 이후 나와 우리 국가위원회에 세 차례, 7월 28일, 8월 12일, 9월 26일, 남한과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남한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음. 10월 19일, 북한은 11월이 가기 전에 남한과 만나게 해 달라고 다시 요청했음. 남한위원회는 북한과의 어떠한 접촉도 거부하고 단일팀 구성을 계획적으로 방해하고 있음. 북한이 나에게 보내 준 남한의 언론 기사는 남한이 단일팀을 구성할 경우 남한 국기, 국가, 훈련, 선발을 모두 가져야 한다고 보도하고 있음. 북한은 도쿄올림픽 참가의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더 이상 이 문제가 지연되면 안 될 것임.’




[사진 26-1] 조셉 그루스 Dr. Joseph Gruss 교수, 체코의 IOC 위원 (1946-1965)




이 편지에 오토 마이어는 11월 29일 답장합니다 (26-8). 


‘... 총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직 양쪽 모두의 행동이 없음. 양쪽 모두가 나와 접촉했었고, 북한은 IOC의 요구를 수용한다는데 반해, 남한은 북쪽 위원회의 누구와도 만날 의도가 없음. 북한은 심지어 서울에서라도 만나겠노라 하지만 남한은 이를 불가능으로 여김. 오늘 오후 남쪽 대표단장과 제네바에서 만났으며 (26-9), 그는 이 상황을 매우 우려하고 있었음. 나는 솔직하게, 만약 남한이 북한과의 만남을 거부한다면 2월 7일 로젠에서 있을 IOC 집행위에서 북한이 단독으로 참여하도록 결정할 수 있다고 했음. 또한 단일팀 성사 시 선수 선발권, 대표단장, 국기, 유니폼 등에서 동등한 권한을 가질 것이라 했음. 남한은 사무총장인 나에게 결정을 일임했지만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했음. 다음 집행위에서 이 문제가 의제에 오르도록 회장에게 제안하겠음.’


그루스에게 답장을 보낸 날, 오토 마이어는 브런디지에게 메모를 전합니다 (26-10). 메모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남한이 협조하지 않기를 원하며, 우리는 동구국가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을 단독으로 출전시켜야 할 것임. 불행하게도 이 모든 것이 정치이지만 우리는 남북을 모두 출전시켜야 하겠음. 북은 긍정적 의도이고 남은 그렇지 못함. 오늘 오후 남한 대표단과 5분 얘기했음. 스포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인과 얘기하는 것이었음. 나는 내가 생각하는 KOC에 대해 얘기했고, 내 말을 알아들었을 것임.’


실제로 동구권의 압력과 지원은 여전히 강했고, 이를 인지한 오토는 어떠한 식으로도 북한을 출전시켜야 할 상황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명확하게 KOC에게 경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토 마이어는 남한이 단일팀에 관심이 없음을 이미 간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을 브런디지에게 명확하게 알리고 더 이상 지체할 상황이 아닌 것으로 결론 내립니다. 


한국대표단은 이미 주한 미국 대사관의 전략을 장착하고 방문했을 것이기에,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풀고 설명하려 했을 것이며 이는 짜인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남한 대표단의 입장 번복으로 나타납니다. 



단일팀 구성이 어렵다고 입장을 번복하는 남측 대표단



KOC의 단일팀 구성 동의는 이 문제의 해결이 멀지 않음에 기대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관심과 개입에 따른 지연책의 선택은 한국대표단의 태도 변화로 나타납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인 오토 마이어가 한국대표단을 만났을 때 대표단은 단일팀 구성의 어려움을 설명하려 했을 것입니다. 오토 마이어는 놀랐겠죠. 대표단과의 만남이 5분 만에 끝난 것도 이러한 이유였을 것이고, 오토 마이어는 구두가 아닌 KOC의 입장을 문서로 요청했을 것입니다. 문서가 있어야 사무국에서도 명분을 가질 수 있어서였겠죠. 


오토 마이어의 요구에 월터 정은 머물고 있던 호텔에서 단일팀이 어려운 이유와 북한이 스포츠 조직으로 IOC 인준을 받는 것이 왜 부당한지를 문건으로 작성합니다. 1962년 12월 4일의 일입니다. 오토 마이어는 이 문건을 바로 브런디지에게 보냅니다 (26-11). 


월터 정이 작성한 문건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단일팀 구성의 어려움을 적고 있습니다. 먼저, 6.25로 본 피해와 현황, 둘째, 새로운 군사정권은 1957년 소피아, 1962년 모스크바 총회의 결정을 수용하고자 하나 남한 내에서 많은 전사자 가족, 재산을 잃은 사람들, 언론 등이 북과의 단일팀을 극구 반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공산괴뢰가 다른 목적으로 스포츠를 이용할 것이라는 우려를 적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은 절대 북과의 협상이 없었으나, 이번 새로운 군사정권에서는 이를 적극 수용하기로 했음을 적습니다. 그러니 IOC의 중재가 필요하며, 이 중재를 통해, 모스크바 해법에서 제안한 것처럼, 제 3자가 남한과 북쪽에서 서로의 선수를 실력과 기록으로 선발하고 이를 관리해 단일팀을 구성하자는 제안이었던 것입니다. 


문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 내용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도 적고 있습니다. 문건은 보다 강력한 증거로 남기에 남한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음에도 이 내용이 공개되는 것에 대해서는 월터 정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건이 문제가 됩니다. 


유럽을 거쳐 뉴델리에 도착한 월터 정은 로젠으로부터의 AP통신 기사를 접합니다. 그 기사는 사무총장인 오토 마이어가 자신과의 회의 내용을 언론에 흘려 그 기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후에 월터 정은 이 문제를 오토 마이어와 회장인 브런디지에게 제기했으며, 이에 대한 상호 설명이 오고 갑니다. 



IOC가 결정하고 알립니다남북은 일단 만나시기 바랍니다. 



11월 29일 로젠에서 남한 대표단과 오토 마이어가 만나는 동안 북한올림픽위원회는 오토 마이어에게 그간 북한의 남한 접촉 노력 일지를 작성하여 보냅니다 (26-12). 그루스의 편지와 북한의 그간의 노력, 남한 대표단의 비협조적 입장, 이 모든 것이 오토 마이어로 하여금 상황을 판단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11월 29일 남한 대표단과의 만남 하루 후인 11월 30일 오토 마이어는 KOC에 전보합니다 (26-13). 이 전신은 북한의 동의로 양쪽 위원회가 로젠에서 12월 15일에 만나기로 했으니 빠른 답신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전날 대표단과의 만남에서 오토 마이어는 이를 언급했을 것이고, 바로 북한 측에 동의를 얻어 이 전신을 보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토 마이어가 북한올림픽위원회에 11월 30일에 보낸 전신을 보면 같은 내용이 보입니다 (26-14) 전신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로젠에서 12월 15일 두 위원회 만나기로 동의, 서울에도 알렸음. 2월 7일 로젠에서 열릴 IOC 이사회에서 결정될 것임.’


결과적으로 1962년 11월 30일 전신은 남북회담의 일정이 첫 언급된 최초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남한 대표단에게 그렇다면 문서로 KOC의 입장을 달라했을 것이고, 월터 정은 이를 12월 4일에 전달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로젠에서 12월 15일 남북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시간도 촉박했고 서울에서의 만남 준비도 충분하기 않았을 테니까요. 오토 마이어가 북한올림픽위원회에 12월 5일에 보낸 편지에서 그 정황이 보입니다. 편지는 ‘12월 15일 로젠 미팅이 어려워 보임. 월터 정과 얘기해 봤으나 불가능해 보임. 우리는 1963년 2월 7일 이사회에 상정할 것임.’로 적고 있습니다 (26-15). 


오토 마이어는 11월 30일 양쪽에 만남을 통보하여 동의룰 요구하고, 12월 4일 월터 정과 만나 KOC 입장을 문서로 받으면서, 아마도 월터 정으로부터 12월 15일 일정의 가능성을 타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했겠죠. 


북한에 보낸 12월 5일 편지는 브런디지에게도 전달됩니다. 그러면서 오토 마이어는 메모를 남깁니다. ‘남한을 설득하기 절대적으로 불가능함. 2월 회의까지 기다려서, 모스크바 결정을 다시 확인하고 북한이 단독 출전하도록 해야 할 것임. 유일한 해법임.’으로 적고 있습니다. 오토 마이어는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심지어 오토 마이어는 월터 정과 만나면서 ‘KOC가 단일팀 구성 원칙만을 수락하고 실제 구성을 최종 시까지 지연시키다가, 2, 3 명 정도의 북한 선수만을 편입시켜 단일팀을 구성했다고 한다면 IOC는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남한을 믿지 못했습니다 (26-16). 


12월 15일 만남은 성사되지 못하지만 결국 만남의 일정이 조율되는 것에는 성공합니다. 12월 12일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전신은 ‘KOC가 단일팀 구성에 결정을 내린 것으로 편지했음. 편지는 IOC 요구에 만족됨.’으로 적고 있습니다 (26-17). 


이어 12월 17일 오토 마이어는 KOC에 편지합니다 (26-18). 12월 12일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IOC는 남한이 1월 24일 로젠에서 북한과 만나 1964년 올림픽에 한국 단일팀을 구성할 기회를 만들어 다행이라고 전하면서, 북한에도 긴급하게 알렸다고 적습니다. 북한이 이 만남에 당연히 승낙할 것으로 보이며, 이 만남에서 양쪽에 5명 이상을 원하지 않고 있으며, 동수로 3명씩을 제안합니다. 같은 내용은 북한에도 전해집니다 (26-19). 그리고 회의 일정 등의 개요를 보냅니다 (26-20). 


일단 1963년 1월 24일 로젠에서의 남북의 만남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성사됩니다. 



월터 정의 보고서



KOC는 1962년 12월 12일 IOC에 통지합니다. 1월 말 로젠에서 북한과 만나겠다고. 


하루 전인 12월 11일, 월터 정은 모스크바 총회 의결 건으로 수행한 여정과 일정을 9장 분량의 영문으로 정리하여 보고합니다 (26-21). 자세한 내용은 국립외교원문서를 참고하시면 되겠지만 여기서 눈에 띄는 문구가 보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 마지막으로 우리는 실제로 1957년 소피아와 1962년 모스크바 총회의 결정을 이행하지 않고 지체할 더 이상의 명분이 없다.’


월터 정의 보고서 이후 내각회의 보고사항 문건은 1956년부터 1962년 말까지의 단일팀 관련 경과보고를 일지형식으로 상세히 기록되어집니다 (26-22).







인용 자료



(26-1)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내는 편지 (1962. 9. 17.)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2) 이주일이 오토 마이어에 보내는 편지 (1962. 10. 10.)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3) 홍명희가 KOC에 보내는 전문 (1962. 10. 19.)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4)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내는 편지 (1962. 11. 5.)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5) 국립외교원. [L-0002-04/1262/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 단일팀 구성 문제, 1962-63. 전 4권 (V.1 1962). pp. 3-45.


(26-6) 월터 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전신 (1962. 11. 15.)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7) 그루스가 오토 마이어에 보내는 편지 (1962. 11. 20.)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8) 오토 마이어가 그루스에 보내는 편지 (1962. 11. 29.)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9) 주한 미국 대사관의 자료 [600.3 Amusement, Sports, 1962 (기록물명), RG 84 Records of the Foreign Service Posts of the Department of State, 1788-1964 (문서군명), Korea, Seoul Embassy, Classified General Records, 1952-63 (시리즈명). 국립중앙도서관 해외기록물. pp. 8-9.]에 의하면 당시 월터 정이 11월 17일 서울을 출발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 이 문건은 [한국 외무부와 KOC 자문관인 월터 정은 1964년 올림픽 단일팀 구성과 관련해 많은 IOC 위원들을 만나려고 11월 17일 한국을 출발함. 대상자는 IOC 위원장인 미국 에이버리 브런디지 Avery Brundage,  IOC 부위원장인 영국 엑스터 Marquess of Exeter, 부위원장 프랑스 마사드 A. Massard, IOC 위원 독일의 다움 W. Daume, 회장 비서 스위스 타허 M. Taher, IOC 사무총장 스위스 오토 마이어 Otto Mayer, 집행위원 인도 손디 G. Sondhi 임.]로 월터 정이 만나려는 사람들이 적혀 있음. 1962년 11월 29일 오토 마이어는 한국대표단과 만났을 것이며, 월터 정도 포함되었을 것임


(26-10)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 보내는 편지 (1962. 11. 29.)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11)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메모, 월터 정이 작성한 KOC 입장 문건 (1962. 12. 4.)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12) 북한올림픽위원회가 오토 마이어에 보내는 편지 (1962. 11. 29.)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6-13)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낸 전신 (1962. 11. 30.)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14) 오토 마이어가 북한올림픽위원회에 보내는 전신 (1962. 11. 30.)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6-15) 오토 마이어가 북한올림픽위원회에 보내는 편지 (1962. 12. 5.)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6-16) 국립외교원. [L-0002-04/1262/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 문제. 전4권 (V.1 1962) pp. 120-121. 


(26-17) 오토 마이어가 브런디지에 보내는 전신 (1962. 12. 12.)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18)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내는 편지 (1962. 12. 17.) Brundage Collection, KOC-01, 로젠, 스위스. 


(26-19) 오토 마이어가 북한올림픽위원회에 보내는 전신 (1962. 12. 17.)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6-20) 오토 마이어가 북한올림픽위원회에 보내는 편지 (1962. 12. 19.)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26-21) 국립외교원. [L-0002-04/1262/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 문제. 전4권 (V.1 1962) pp. 146-154. 


(26-22) 국립외교원. [L-0002-04/1262/757.1] 1964년도 동경올림픽 남·북한단일팀 구성문제. 전4권 (V.1 1962) pp. 184-191. 



[사진 설명]


월터 정 Walter Jhung 정범택, 정성복. 해방 후부터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한국 스포츠 외교의 실행자이며, 1962년 단일팀 논의와 관련하여 IOC와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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