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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톨 Sep 10. 2019

열여섯의 기억

20180929

영국・영연방 연구 수업에서 다루는 “The English Patient”를 보면 주인공인 Hana가 전쟁으로 인한 PTSD로 인해 자신의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썩둑썩둑 잘라내는 장면이 나온다. 종군 간호사인 자신의 긴 머리가 계속해서 환부에 닿고, 피 때문에 엉키고, 그래서 걸리적거렸지만 Hana는 머리를 묶지 않는다. 대신 신경증에 걸린 Hana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모양과 길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로 머리를 잘라내 버린다.


열여섯 살이던 나도 그렇게 내 머리를 자른 적 있었다. 베트남으로 이사를 갔던 첫 해였다.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나, 앉아서 공부를 하던 내가 거울을 문득 보고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가 없었지만 자해하기는 무서워서 날개뼈 정도까지 왔던 머리카락을 붙잡고 숭덩숭덩 잘라 귀 밑까지 오는 칼단발을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엄마 아빠가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감정의 기복도 아주 컸고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너무 심해서 그런 식으로라도 나의 존재를 없애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제대로 손질하지 못한 뒷머리를 마저 잘라 주었고. 그때 엄마는 역시 너는 단발이 어울린다고 칭찬해 주었지만 나 자신과 내 신체의 실재를 견디기 힘들어서 그 머리를 자른 걸 대충은 알지 않았을까. 그 일에 대해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오늘 “The English Patient”로 수업을 하면서 그때가 생각났다. 나 자신을 못 이겨 새벽에, 타지에서 스스로의 머리카락을 자르던 열여섯 살의 나.


당시에는 매일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지만 그러진 못 했고 살아남았다. 누구라도 그 시기에는 힘든 걸 겪겠지만 나한텐 유독 열여섯, 열일곱 때가 힘들었다. 그때는 미래의 나를 그리지조차 못 했다. 거울 속의 나를 마주하는 것조차 버거운데 어떻게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겠나. 그래도 열여섯 살의 나한테 지금의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다면, 위로는 잘 안 되겠지만 놀랍게도 지금의 너는 생각보다 잘 이겨내고 있고 아무리 슬프고 마음이 찢어져도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다 괜찮을 거라는 말은 아니다. 괜찮지 않았고 지금도 그다지 괜찮지는 않다. 삶은 꾸준히 힘들었다. 앞으로도 분명 힘들겠지. 그래도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상황들이 바뀌면, 그 힘든 걸 견디고, 자신을 돌보고, 일어나서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긴다. 주변에 함께 할 사람들도 있고 스트레스에 못 이겨 머리를 마음대로 삐뚤빼뚤 잘라내면 그 머리를 다시 다듬어줄 사람도 있다. 마음이 고생할 땐 그 사실을 자꾸 잊기 마련이지만. 이러나저러나 인생이 자꾸 엿을 먹여도 가끔 허락되는 행복들이 분명히 있다. 그 행복을 실감할 때 인생은 그래도 계속해볼 만한 것이 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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