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아버지는 35살, 어머니 34살, 나 초등학생 4학년 11살, 내 동생 2살,,
아버지는 건축 자재를 공급하는 사업을 하셨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고 가게 하나를 운영하셨다. 아마 이때 아버지가 사업하신 지 한 1~2년 정도 되었을 것이다. 사업이 아주 잘되었다. 사업하시기 전에 이미 이 업종에 종사를 하셨기 때 수월하게 사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노력하셨다. 이 때는 어음이 쉽게 유통되던 때였다. 거래처에서 어음을 받으실 때면 명랑하고 활기찼던 초등학생인 나와 어머니에게 자랑을 하셨다. 우리는 뿌듯해했다. 어음이 휴지 조각 되기 전까지는,,
점점 건축 자재 물건값 수금이 안되었다. 물건도 잘 팔리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아버지는 점점 예민해지셨다. 가게는 사무실과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네 식구가 그 작은 방에서 살았다.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작은 방에서 잘 들렸다. 어느 날 아버지는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시면서 펑펑 우셨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마 그 자리에 앉아계셨던 분들 모두 피눈물 흘리셨을 것이다. 어디 아버지뿐이겠느냐,, 내 동생 분유와 기저귀 살 돈이 없어서 어머니는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는 겸해서 돌반지 하나 남겨놓고 모두 파셨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이야기하면 대부분 친구들이 아버지, 어머니가 돈 때문에 싸운다고 했다. 우리 집도 그랬다. 어머니는 내 동생과 나를 먹여 살려야 하고 생활비가 필요한데 아버지는 돈 나올 구석이 없으니 화를 내셨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 거래처 사장이 IMF 전, 나라가 힘들어진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외국으로 돈을 빼돌린 후 줄 돈 없다고 잡아 땠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우리 가게 밖에 팔아야 할 물건이 잔뜩 있었다. 어느 날 자고 있는데 밖에서 수상한 움직임과 이상한 소리가 났다. 아버지는 냅다 일어나셔서 가게 밖을 나가니 누군가 우리 물건을 훔쳐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곧장 신고했고 그 아저씨는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몇 시간 지나서 그 아저씨 부인이 찾아오셔서 사죄를 하셨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랬다고,, 어른이 돼서 생각해보니 그 아저씨도 정말 힘들어서 그랬구나 싶었다.
IMF 여파는 몇 년간 지속되었다. 가게를 이사하면서 네 식구 보금자리도 이사를 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압류 스티커가 가구마다 붙여져 있었다. 아버지도 돈 줄이 막히니 아버지 거래처에 돈을 못주고 있었고 그 거래처는 돈을 못 받으니 압류 신청을 한 모양이었다. 그 날 정말 놀랬다. 드라마에서 보던 빨간딱지가 우리 집에 붙여져 있었다. 아버지는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진정시키셨다. 더불어 어머니는 생활비가 없어서 신용카드를 사용하셔서 연체가 되어 빚이 더 늘어난 상태였다. 어렸을 때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
약 20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는 빚을 일찌감치 다 갚으셨다. IMF 시절의 빚을 갚는다고 세월을 거의 다 보내셨다. 아직도 휴지 조각이 된 어음을 간직하고 계신다. 재수 없다고 버리라고 해도 버리지 않으신다. 어려웠던 시간이 잊혀져가고 빚도 모두 갚았으니 이제는 추억이 되신 것 같다. 아버지는 현재 은행 대출을 아예 안 하신다. 빚에 진절머리가 나셨으리라,, 아마 그때를 생각하면 나보다 아버지가 더 마음이 쓰라려 올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강인한 모습을 정말 존경한다. IMF 시절 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지는 처자식이 있어서인지 제 인생을 꿋꿋이 열심히 살아오셨다. 내가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잘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든다. 35살 젊은 나이에 지금까지 대략 10억 원의 빚을 갚으셨다. 지금 집 한 채도 없으시다. 집 사실 마음이 없으신 것 같더라. 집 사려면 빚을 져야 하는데 빚을 안 지시니까,, 아버지는 나에게 "사람은 마음이 편해야 한다."라고 자주 말씀하신다. 이 말에 아버지의 모든 고생과 경험이 내포되어 있었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지금은 이 말이 이해가 된다. 이런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것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