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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ctor Ha Oct 20. 2019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의 등장

2. 이집트를 시작으로 레반트 지역까지 대제국을 건설하다.

The battle of hattin

장기 왕조 2대 술탄 누르 앗 딘 재위 전후 시기 이슬람 세계는 3명의 칼리프가 존재했다. 카톨릭 세계가 로마 카톨릭, 비잔틴 제국 황제의 동방 정교회로 분열된 것처럼 이슬람교 또한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되각 지역을 기반으로 새로운 왕조들이 세워지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칼리프로 칭하는 일이 벌어진다. 수니파는 정통 칼리프 시기 메디나 칼리프, 우마이야 왕조 시기 시리아 다마스쿠스 칼리프 그리고 아바스 왕조 시기 바그다드의 칼리프로 명맥이 이어졌고, 이집트 파티마 왕조를 기반으로 한 시아파 칼리프 그리고 스페인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이슬람 왕국인 후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압둘 라흐만 3세를 시작으로 한 스페인, 북아프리카 권역을 통치한 칼리프가 있었다.

추후 자세하게 스페인 사전 문명 탐험을 할 때 설명을 하겠지만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왕자였던 압둘 라흐만 1세는 이란에서 봉기한 아바스 왕조의 아바스 군에게 쫓기면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고 지금의 스페인 코르도바를 수도로 한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다. 후 우마이야 왕조(*흔히들 아바스 왕조에 의해 멸망한 우마이야 왕조와 구분하게 위해 스페인에 세워진 우마이야 왕조를 후 우마이야 왕조로 구분해서 사용함을 알려드린다)를 시작으로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카톨릭 왕국인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이 주도한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 Reconquista)"에 의해 스페인 남부 지역에서 영원히 쫓겨난 시점인 1492년까지 지배하면서 스페인 남부 지역은 유럽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슬람 지배 후반기 그라나다 왕국(일부는 토후국이라고도 함)에 의해 건설된 알함브라 궁전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후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 압둘 라흐만 1세 사후 압둘 라흐만  3세는 스스로를 칼리프로 칭하면서  이슬람 세계는 비슷한 시기에 3명의 칼리프가 서로 반목하며 분열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1163년 시아파 파티마 왕조에서 내분이 일어나면서 수니파에 의한 이슬람 통일이라는 원대한 야망을 가진 누르 앗 딘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또한 살라딘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 된 이집트 땅을 차지하게 되는 기회를 얻는다.


*참고사항 : 이베리아 반도 시기별 세력 지형도

스페인 문명 탐험시 설명을 드리겠지만 이베리아 반도는 우마이야 왕조, 이슬람교를 기반으로 한 지방 토후국, 모로코를 기반으로 한 알 모라비드/알 모하드 왕조를 거쳐 다시 이슬람 지방 토후국으로 세력이 교체되었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결혼 동맹으로 인해 탄생한 에스파냐 왕국이 주도한 레콩키스타 운동을 통해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된다.  

스페인/포루투갈 지역내 카톨릭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세력 변천사


이집트 파티마 왕조로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살라딘이 가게 된 배경에는 이슬람 세계의 분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4대 정통 칼리프 알리 계승 문제로 분열되고 치열한 내전을 겪는 와중에 세력의 열세를 보인 시아파는 당시 사라센(*서구적 관점에서 흔히들 중동이라 일컫지만 여기서는 사라센으로 통일해서 사용할 것임) 지역을 벗어나 서부 외곽지역으로 이동했고 이들 무리 중 일부는 북아프리카 쪽으로도 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시아파 세력을 등에 업고 자칭 제4대 정통 칼리프 알리와 그의 아내 파티마의 자손이었다는 우바이드 알리에 의해 파티마 왕조(909~1171)가 세워지게 된다. 시아파 파티마 왕조 말기인 1163년 궁정 내부 권력 다툼으로 인해 내분이 발생하였고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재상 샤와르의 요청으로 당시 장기 왕조의 2대 술탄 누르 앗 딘에 의해 살라딘(살라흐 앗 딘)의 작은 아버지인 시르쿠프를 총대장으로 한 시리아군이 파병되었다. 누르 앗 딘의 입장에서는 이집트 파티마 왕조와의 전쟁을 통해 당시 시아파인 파티마 왕조를 병합시켜 수니파인 장기 왕조와 시아파 파티마 왕조를 하나의 이슬람 제국으로 통일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십자군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를 계속해서 침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시아파 국가였던 파티마 왕조의 내부 권력 싸움에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신뢰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소수 부족 출신인 쿠르드족 시르쿠프를 이집트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혹시 모를 반란에 대한 위험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역사가 말해주듯 반란의 씨앗은 시르쿠프가 아니라 숙부 시르크푸를 따라 원정길에 오른 조카 살라딘이었다. 살라딘은 시르쿠프와 함께 이집트 원정길에 오르면서 이후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이룩한 위대한 이슬람의 영웅으로 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1169년 초 장기의 시리쿠프는 3차에 걸친 파티마 왕조 원정을 통해 결국 파티마 왕조의 지배 세력을 교체하고 자신이 직접 파티마 왕조를 통치한다. 이때까지도 시리쿠프는 실질적인 이집트의 통치자였음에도 직접 칼리프로 등극하지 않고 당시 칼리프였던 시아파 알 아디드가 칼리프직을 유지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시리쿠프 입장에서는 굳이 자신이 파티마 왕조의 시아파 칼리프로 등극함으로써 바그다드 수니파 칼리프와 맞설 필요가 없었을 것이며 또한 자신의 주군인 누르 앗 딘이 계속해서 자신을 경계하는 상황에서 칼리프로 등극한다면 장기 왕조에 대한 모반을 의미함과 동시에 누르 앗 딘과의 일전을 준비해야 했기에 당분간은 이집트 지역의 내부 역량을 키우는 데에 집중한 것이다.      

살라딘은 알라의 계시를 받았던 것일까? 아니면 주어진 자신의 운명에 당당히 맞서며 레반트 지역을 통일한 것일까? 물론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스스로의 운명이 개척되는 게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살라딘에게는 이슬람 제국을 통일하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만큼의 거부할 수 없는 숙명과 마주하게 된다.

1169년 숙부인 시리쿠프가 과식으로 인해 사망하고(*정말 과식으로 사망했을까? 하여튼 모든 자료는 과식으로 사망했다고 함) 또한 자신의 주군인 장기의 누르 앗 딘이 1174년에 사망한 것이다. 사실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인 알 아디 드가 사망하자 누르 앗 딘은 살라딘에게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수니파 교리를 확립할 것을 명령했으나 살라딘은 누르 앗 딘의 명령을 무시한 채 자신만의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면서 누르 앗 딘과 대립하는 형국이었다. 실제로 누르 앗 딘은 살리딘을 공격하기 위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와중에 병사한 것이다. 살라딘의 입장에서는 상기 두 영웅의 급사로 인해 새로운 기회를 얻었기에 개인적은 슬픔은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는 결코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누르 앗 딘과의 전쟁을 피함으로써 비옥한 이집트 땅을 근거로 이스라엘/팔레스티나 지역에 위치한 십자군 왕국 예루살렘 왕국 및 트리폴리 백작령과의 전쟁 준비를 차곡차곡할 수 있었고 누르 앗 딘 사망 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던 장기 왕조를 큰 피해 없이 접수함으로써 레반트-이집트를 잇는 유일무이 이슬람 제국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으로 등극한 살리딘은 누르 앗 딘의 정신적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정식으로 술탄의 지위를 인정받게 된다.


살라딘에게 이제 마지막 남은 과업은 요르단강 서안에 위치한 십자군 왕국 예루살렘을 이스라엘/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몰아내고 진정한 이슬람을 통일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단 예루살렘을 바로 공격하는 대신에 시리아 지역에서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는데 역점을 두고 누르 앗 딘의 미망인과 결혼을 통해 자신이 유일한 장기 왕조의 계승자임을 선포하였다. 동시에 누르 앗 딘 사후 각 지방 제후 세력들로 사분오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데 집중하기 위해 예루살렘 보두엥 4세와는 평화협정을 맺어 당분간 십자군과의 전쟁을 피하는 결정을 한다.  

살라딘 치세 아이유브 왕조 영토

보두엥 4세 사후 예루살렘 왕국은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에 빠지는데 보두엥 4세 여동생인 시빌라는 자신의 아들인 보두엥 5세가 죽자 자신이 왕위에 오른 뒤 다시 남편인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에게 재 양위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기 드 뤼지냥의 사주를 받은 카락의 영주 르노 드 샤티용이 아이유브와의 평화 협정을 무시하고 이슬람 대상인(*일명 카라반)을 수차례 공격함으로써 살라딘에게 전쟁의 명분을 제공하고 만다.

Kerak castle

1차 십자군에 의한 십자군 왕국이 세워진 후 카락성의 전략적 중요성은 커졌는데 카락성 중심으로 한 쇼박, 아카바의 3각 방어선을 구축(*각 성의 위치는 아래 지도에서 확인 요망)함으로써 지정학적으로 요르단 동쪽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명 "왕의 대로(지금의 요르단 강 동안에 위치, the king's highway)"상 관문에 위치해 있으면서 당시 아랍권 무역로를 통제하였기에 경제적 이익도 가져다주던 곳이었다.  

그런 카락성은 기 드 뤼지냥이 영주로 오면서 이슬람 상단을 약탈함으로써 이슬람 통일 왕조 아이유브의 술탄 살라딘을 자극하기 시작했고 보두엥 4세와의 평화 협정으로 전쟁을 잠시 중단해야 했던 살리딘에게는 보두엥 4세 사후 대 카톨릭 십자군 왕국과의 지하드를 일이킬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문제아가 되어 버렸다.     

The king's highway in Jordan

1187년 7월 2일 드디어 성전의 날이 밝아왔다. 살라딘은 친히 군사를 일으켜 갈릴리 호로 남하하여 티베리아 성을 먼저 공격하는 척하며 본진은 나사렛 북쪽/세포리에 남쪽(*아래 지도에서 확인요망)에 진을 치고는 기 드 뤼지냥이 이끄는 십자군이 하틴의 언덕에서 야영을 하기를 기다렸다. 하틴의 뿔 지역은 원래 화산으로 방어하기 좋은 언덕이라는 장점은 있었으나 물이 나지 않고 군대 이동 당시 한 여름이었음에도 식수 부족으로 십자군 대부분의 병사들은 지쳐있는 상태였다. 아래 살라딘의 이동 경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슬람군은 십자군을 하틴의 뿔 지역을 에워싼 다음 마른풀에 불을 른 뒤 바람을 등에 지고 언덕적으로 진격해 나갔다. 무더위와 갈증 그리고 연기와 먼지가 자욱한 지옥같은 상황에 놓인 십자군 병사들의 사기는 이미 껶여 있었고 그야말로 일방적인 살육전에 가까울 만큼 살라딘의 이슬람군이 기 드 뤼지냥의 십자군을 섬멸한다.

하틴 전투 당시 십자군과 이슬람군의 이동로

아래 사진은 실제 하틴의 뿔 지역의 사진으로 바로 옆 삽화는 이 하틴의 뿔 지역과 당시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오른쪽 그림은 아마도 십자군 병사 대부분이 살해되고 포로가 된 상황에서 언덕 위에서 성전기사단들이 최후의 방어를 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전투 마지막에 살아남은 백여 명의 기사들이 수만 명의 이슬람 전사들과 마지막까지 상대하며 천여 명 이상의 이슬람 군대를 사살했다고 하니 백병전 시에는 완전 무장을 한 유럽 기사단을 기마병, 경보병 중심으로 편재된 이슬람 군대가 이길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실제 the horns of hattin                        the battel of hattin         


이 하틴의 전투를 통해 살라딘의 명성은 사라센 뿐만 아니라 중세 유럽 사회에 까지 미치게 되고 하틴전투 승리를 발판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살라딘의 손에 함락됨으로써 3차 십자군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위대한 왕 Lion heart 리쳐드가 참전을 결정함으로써 역사적인 두 영웅의 만남이 이스라엘/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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